〈 249화 〉 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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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대를 강타한 섬광!! 그리고 그 뒤에서 승리를 거머쥔 건, 다름 아닌 자하연 학생!!"
운동장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사회자의 목소리를, 최승준은 마치 남의 일처럼 흘려듣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남의 일이 맞았다.
여하간, 그의 뜻은 체육대회를 무사히 개최하는 데에 있었으니.
박우찬과 주지승 사이에 있었던 사소한 다툼이나 그 결과 따위는 최승준에겐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애초에 당사자인 박우찬부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해 굳이 보고하지도 않았고.
비서 편으로 전해듣긴 했지만, 달리 손을 댈 필요도 없을 듯했다.
아카데미 운영에 지장이 생길 정도라면 또 모를까.
신세계 질서를 비롯한 재계의 거물들과 어깨를 견주는 최승준에게 있어, 주지승의 수작질은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었다.
때문에.
저 멀리 박우찬의 제자가 휘두른 지팡이에 맞아 주지승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최승준은 별다른 감개를 품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하셨습니까?"
창 밖에 두고 있던 시선을 떼고, 최승준은 다시 한 번 교장실 안으로 눈을 돌렸다.
혹여라도 밖에서 쳐다보는 자 있을까 싶어 두텁게 커튼을 친 교장실.
그 안에 깔린 그림자는 도저히 한낯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짙고, 그 이상으로 어둑했다.
마치 주인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듯한 풍경에, 최승준 또한 내심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번 체육대회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의 내실을 다지는 데에 있다.
상대는 이 나라의 절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진 어떻게든 공세를 받아넘기는 데에 성공했고, 가끔씩 반격도 가할 수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도심 한 가운데에 초대형 게이트를 열어젖힌 놈들이다.
이 이상 정면으로 치고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부 의견을 하나로 규합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아카데미 채산성 문제 따위로 아군에게 발목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우찬이나 이준구 또한 동의한 이야기다.
때문에.
마침 신세계 질서 측에서 내분을 겪고 있는 지금, 프로젝트 자체를 반석에 올린다.
당장 신세계 질서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최소한 아카데미의 목적이나 프로젝트 진행 척도 따위에 발목이 잡히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지.
그게 바로 최승준의 목표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저 쪽이 이 쪽을 건드리지 못할 때 내부 기강을 다잡자는 뜻이다.
물론 최승준은 바보가 아니다.
신세계 질서가 기능 부전에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개개인마저 발이 묶인 건 아니니.
이렇게 교문을 열고 외부에 소식을 알리면 신세계 질서 측에서도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간단하게는 첩자.
다소 과감하게 수를 둔다면, 테러 또한 불가능하진 않겠지.
때문에.
최승준은 이번 체육대회 내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단지,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건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지금 최승준의 눈 앞에 앉아있는 건 이 나라에서도 유명한 테러리스트 집단의 수장이었다.
만약 그의 소꿉친구인 비서가 알았다면 당장 경기를 일으켰을 회담이다.
허나, 그렇다 쳐도 지금 그의 제안을 처음 들었을 당시 최승준의 동요를 따라오진 못할 것이다.
현재 헌터 협회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테러 조직, 괴수 신앙 교단.
그 우두머리이자 신세계 질서의 일원이었던 '교주'가, 이번 기회를 틈타 항복을 청했기 때문이다.
*
'이 정도면 충분하지.'
헌터 아카데미, 교장실 안.
마치 취조실처럼 꽉 막힌 사각형 방 한 가운데에서, 교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신세계 질서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조직과 얽히고 난 이후 깨달은 점이 있다면, 그의 이미지는 이미 나락 한 발짝 앞이라는 점이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신세계 질서에 붙은 기업가들이나 권력자와는 다르다.
처음부터 몬스터의 존재를 신앙하고 있던 미치광이.
헌터 협회가 제일 눈독들이고 있는 사상범이자 테러리스트.
신세계 질서와 협력한 이래, 온갖 공적을 독차지하고 있는 열성분자.
그게 바로 신세계 질서 내에서 교주가 받고 있는 평가였다.
물론 교주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애초에 괴수 신앙 교단 따위는 그에게 단순한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사상범 취급을 받았던 건 사실이지만, 딱 거기까지.
본격적인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화하게 된 건 확실하게 머리가 맛이 간 김민철이 들어온 이후부터.
그 전까진 테러를 저지를 무력도 무엇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김민철을 제어할 힘 따위는 교주에게 있지도 않았다…….
그런 사실엔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교주는 어느 누구보다 열성적인 신세계 질서의 앞잡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교주의 성향을 확보하기 위해 신세계 질서 측에서 내렸던 소소한 지시들은 곧 교주만이 해결할 수 있었던 어마어마한 문제처럼 둔갑하게 되었다.
물론 교주의 행동이 이상할 정도로 장대한 나비 효과를 부른 건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아카데미 내부 시설 정찰.
당시 적당히 보낼 사람이 없어 교주를 보냈던 신세계 질서.
그러나 그들은 곧 교주가 그 날 가져왔던 정보를 바탕으로 초대형 게이트 사태 당시 텅 빈 아카데미를 제압할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 초대형 게이트 사태부터 문제였다.
교주로서는 적당히 도시 외곽을 돌며 언제나처럼 신세계 질서의 지령에 따라 순찰하고 있었을 뿐인데.
언젠가 신세계 질서 측에서 보여준 적 있던 김민철의 사망 당시 영상.
거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발의 여인이 도시를 떠나고 있지 않던가?
그 모습을 보고 지레짐작하여 신세계 질서 쪽에 보고를 올린 게 화근이 되었다.
왜냐하면 교주가 보기에 그녀는 당시 신세계 질서의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박우찬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박우찬의 연인이 홀로 도시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떠났으니, 머잖아 박우찬 또한 행동에 나서리라.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행동에 나설 기회가 있으리라 신세계 질서 측은 판단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때문에.
어느덧 신세계 질서 측 상층부에서도 교주는 단순한 끄나풀이 아닌 핵심 일원 중 한 명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교주로서는 전혀 바라지 않았던 영전이었다.
그런 기조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마신이라는 작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신세계 질서에게서 비슷한 말을 들은 건지,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인지.
여타 신세계 질서 소속 일원들에겐 별다른 내색 하나 없던 마신들이 유독 그에게는 살갑게 굴기 시작했던 탓이다.
물론 거기에는 교주가 가진 직함이 큰 역할을 했다.
괴수 신앙 교단이라니?
일찍이 괴물이 아닌 악신이라는 이름으로 숭배받고 있던 마신들에게 있어, 교주의 행동은 퍽 귀여운 면이 있었다.
적어도 단순히 강력한 몬스터 취급하는 다른 신세계 질서보다야 훨씬 더 마왕의 신자에 어울리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런 상황이 되었으니, 교주의 입장도 참으로 미묘한 상황이 되었다.
동원할 수 있는 실권이나 세력은 특출날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세계 질서에 몇이나 되는 공을 세웠고 그 이상으로 마신들이 비호하고 있다.
자연스레 현 교주의 입장과 대우 사이에서 불일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교주는 이번 신세계 질서의 내분에서도 한 걸음 벗어난 스탠스를 취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번 체육대회 정찰에 자처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달리 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 교주는 그 날 그 때의 말단이 아니었다.
덕분에.
교주를 감시할 인원도, 교주를 경계하는 누군가도 더 이상 있기 힘든 지금.
교주는 언젠가 세웠던 계획을 실제로 옮기고자 결심했다.
즉, 배신이다.
'아니, 바보 아니냐?'
물론 다른 이들이 보자면 전혀 예상하지 못할 움직임이었으리라.
하지만 교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리석은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신세계 질서 놈들이라고.
아니, 진심이냐?
그야 괴수 신앙 운운하는 걸로 기금 좀 땡기긴 했지.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 몬스터랑 협력하다니.
처음에는 단순히 머리 이상한 놈들의 망상이라 생각했을 뿐인 신세계 질서의 계획.
어디까지나 활동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지갑 하나 더 마련할 생각이었던 교주도,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어째서인지 상황이 이상하게 풀리면서 조직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조금 머리 이상한 놈들의 모임이라 생각한 신세계 질서에서, 교주는 이름만 들어도 알 기업 회장이나 정치가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기에 추가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고랭크 몬스터 일곱 마리까지.
그제서야 교주는 이 놈들이 진심으로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이구나 하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신세계 질서 측에서 한 가지 유감인 점이 있었다면, 교주가 정말로 소시민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교주는 사기꾼이다.
지금은 김민철 탓으로 돌리고 있긴 했지만, 제 지갑 하나 불리자고 위험한 사상을 잉태한 사상범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주는 소시민이었고, 그 이상으로 한국인이었다.
교주로서는 아무리 그래도 자기 이름이 이완용 위에 올라서는 몰골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양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자기 영달을 위함이었지만.
뭐,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신세계 질서 측의 착각 또한 도움이 되었다.
입장적으로는 말단.
그렇지만, 실제로는 누구 하나 건드리기 힘든 입장.
덕분에 교주는 아직도 여타 신세계 질서가 새기는 주술적인 계약 또한 받지 않았다.
물론 그만큼 핵심적인 정보에선 비교적 먼 편이었지만…….
그조차도 이젠 상관 없는 일이었다.
일곱 마신들에게 어느 정도 보살핌을 받은 지금.
교주는 다른 신세계 질서 소속 일원들도 모를 정보들을 몇 가지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얄밉게도, 교주 스스로의 말마따나 그에게는 나름의 상재가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몸값이 가장 높을 때 움직일 줄 아는 안목은 확실한 모양이니.
다만, 대침공 이전 비트코인이라는 물건은 상재가 있다고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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