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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245화 (245/371)

〈 245화 〉 체육대회

* * *

"그럴 만도 하죠."

"너무하네."

윤하를 두고 비실비실 도망친 내 모습을 보며, 예은이는 그렇게 소평했다.

나로서는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 문제에서 목소리를 높이긴 힘들었다.

덕분에 꿀 먹은 벙어리 꼴이 될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을 보며, 예은이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원거리 분야, 능력 종목.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무대가 되는 운동장 한복판.

학생들이 참가자 자격으로 대기하고 있는 천막 어귀에서 나는 예은이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는 어떠다 보니 발이 닿았을 뿐.

딱히 예은이를 찾아 걸음을 옮긴 건 아니었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은이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짤막하게 기지개나 켜고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이번 체육대회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근거리 분야.

직접 치고받는 격투나 무기술 종목에 비하면 타 분야는 아무래도 인기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보조 분야를 포함한 원거리 종목 일정은 모두 오전에 밀집된 지금 이 상황.

반대로 이목을 끌기 좋은 근거리 분야는 모조리 오후에 집중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퍽 차별적인 구성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거리 분야나 보조 분야 측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그 담당자인 티아마트나 서아가 목소리 높이는 데에 관심이 없다는 점.

거기에 남은 하나는 바로 눈 앞의 예은이 때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원거리 분야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과제 또한 쉽지는 않다.

운동장 끝에서 반대편 끝자락에 있는 과녁을 맞춰야 하는 묘기.

화려하게 능력을 방출할줄만 아는 1학년들에겐 도저히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세한 조작. 가시거리 바깥에 있는 표적을 포착하는 방법.

어느 쪽이든,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이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예은이는 달랐다.

본래부터 남달랐던 센스. 실제로 투척 무기를 다루었던 경험.

거기에 지난 1년 사이 습득한 지식이나 기술까지.

이 정도 거리는 예은이에게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녀의 능력이 염동력이라는 점.

결과적으로, 대회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이예은 몫으로 준비된 과녁이 대뜸 쓰러지는 광경 뿐이었다.

이래서야 흥미를 끌 수 있을 리 없지.

실력이라도 나쁘면 또 모르겠지만, 결승전까지 오르는 건 사실상 따놓은 당상이니.

노리고 한 일은 그야 아니겠지만,이렇게 되고 보니 속 좁은 게 아니라 오히려 선견지명이라 할 법했다.

지금 이 천막에 감돌고 있는 끝물 분위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아도 우승은 명백.

어지간히 운이 없는 게 아닌 한 예은이의 우승은 불변이요 부동이다.

그러니 다들 자리를 털고 있을 수밖에.

"윤하 입장에서 보면 그야 섭섭하지 않을까요?"

"아니, 섭섭하다 해도 말이지."

그야 섭섭하긴 하겠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말마따나 윤하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 마음은 거절한 주제에 예은이를 상대로 헤실대고 있는 듯 보일 테니.

막말로, 저지른 일이야 윤하보다 예은이 쪽이 더 크지 않던가.

단지.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조금 구차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똑같은 답을 건넸는데도 각자 반응이 달랐던 걸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지희도 마찬가지일 테구요."

그러나.

예은이는 그런 내 태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등 뒤에 한 줌 더 부담을 얹을 정도였으니.

틀린 말은 또 아니었지만.

요 최근, 하연이와 특훈을 일삼느라 다른 녀석들과 얼굴 맞댈 기회가 없었던 건 사실이니까.

안 그래도 그 날 이후 영 미묘한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고 있던 판국에 내가 대놓고 그렇게 나오니 섭섭할 법은 했다.

물론 예은이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순전히 제 친구들 챙기는 데에 있는 건 아니겠지만.

윤하도 섭섭하겠지. 지희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니 자신 또한 마찬가지다.

알 듯 모를 듯한 마음이 그 저변에서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땐 천생 아가씨였는데 말이지.'

언제부터 이런 잔수작을 부릴 줄 알게 된 건지.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 한들 정말로 그녀들에게 시선을 둘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마치 학생들에게 관심을 '하사'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말한들 곤란할 따름이다.

허나, 그 이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이번 오후에 있을 하연이의 시합이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하연이가 이번 체육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건 결국 내가 꼬드긴 바.

때 아닌 특훈까지 군말 별로 없이 감수한 하연이를 두고 다른 애들 시합부터 구경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나마 예은이 정도라면 시간도 맞물리는 편이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당사자인 나도 내 속내를 다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그녀들의 마음을 거절한 이후, 다소 미묘한 분위기가 생긴 건 사실이다.

하필이면 예은이 쪽 시합을 구경하겠다 나선 이유 또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

윤하나 지희에 비하면 그나마 대하기 편한 건 사실이니까.

내심 그런 마음이 드러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으로 복잡한 일이었다.

"후후. 그럼, 잠깐 다녀올게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짧게 웃던 예은이는 이윽고 자신을 호출하는 소리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채 3초도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할당된 과녁을 모조리 쏘아 맞춘 예은이의 이름이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제 1회 헌터 아카데미 체육대회.

원거리 분야의 우승자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

오후가 찾아왔다.

그 사실에 자하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모르긴 몰라도, 결승전까지 가는 건 거의 확실하다.

문제가 되는 건 정필연 뿐.

이번 대회를 앞두고 박우찬은 그리 평했다.

박우찬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자하연 또한 구태여 반대하진 않았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자하연이 헌터가 된 건 고작해야 1년 전 이야기.

그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던 보육원 출신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이 급변한 건 박우찬과 얽힌 뒤 이야기.

나아가서는 신세계 질서와 관련된 사연 때문이다.

박우찬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실력 또한 급격한 인생 굴곡에 맞추어 괄목상대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확신은 없었다.

물론 그녀 또한 스스로의 힘을 실감할 기회는 없잖아 있었다.

예를 들어, 도시 한 가운데에 대뜸 초대형 게이트가 열렸을 때.

혹은, 던전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태백산맥 한 가운데에서 고생했을 당시.

자하연은 본디 자신이라면 절대로 상대할 수 없었을 법한 괴물들을 쓰러뜨리는 스스로의 모습에 놀란 바가 있었다.

다만, 딱 거기까지였다.

성장세가 뛰어나다. 이미 현역 헌터에 필적할지도 모른다.

박우찬은 그렇게 말했지만, 자하연으로서는 그런 모양이다 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간, 그녀가 헌터가 된 건 고작해야 1년 전 이야기.

현역 헌터들 이상으로 밀도 높은 사건에 얽힌 건 사실이지만, 잔뼈가 굵다고는 도저히 말 못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자하연에게 다른 사람들의 솜씨를 가늠할 만한 안목이 부족한 이유 또한 바로 그 탓이었다.

안목이란 실력 따라자연스레 상승하는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상대방의 강함을 파악하는 데에 필요한 건 단순한 경험.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하연에게는절대적인 경험의 총량이 부족했다.

물론 평소였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겠지.

당장 박우찬이 그녀의 실력을 보증하기도 했고, 친구들과 능력을 비교할 기회도 있었다.

덕분에 자하연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힘이 아카데미 내에서도우수한 편에 꼽히는친구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아니, 신세계 질서가 얽힐 때마다 멋대로 늘어나는 마력 따위를 자신의 힘이라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이서 대뜸 대회에 나가게 되었으니 긴장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당장 눈 앞에 있는 학생들의 실력도 가늠할 수 없는 처지니 더더욱.

다시 한 번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지만, 마찬가지로 별다른차도는 없었다.

쿵쿵 뛰는 심장.벌벌 떨리는 손가락.

대련을 앞두고 요란하게 경련하는 빈 속이 손에 잡힐 정도였다.

어쩌면 꼴사나운 실수를 저질러 초전부터 패퇴하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하연 본인에게 있어선 그래도 상관 없는 일이긴 했다.

막말로, 고작해야 체육대회 입상 한 번 못 했다고 앞날이 막히기라도 하겠는가.

박우찬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실력은 꽤나 괜찮은 수준.

고작해야 1년 사이 여기까지 올라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적어도 앞날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라.

다만.

자하연의 스승은 박우찬이다.

그리고 자하연은 오빠의 이름에 먹칠하는 결과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 이예은은 오전에 있었던 원거리 분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류지희 또한 격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테고.

자하연은 거기에 자신도 한 숟갈 보태고 싶었다.

박우찬 반의 학생들이 줄줄이 우승을 차지한 모양이더라.

담임인 박우찬에게 범상한 실력이 있으니 그러지 않겠느냐.

그런 말이 나오게 하려면 가급적 그녀 또한 우승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정필연이 우승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정필연이 우승할 경우, 대다수 사람들의 이목은 십중팔구 정필연에게 쏠리기 마련이리라.

그런 점을 생각하면 역시 자신이 우승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이 이상 정필연이 수제자 운운하게 둘 수도 없었다.

때문에.

질끈 하고 틀어올려 묶은 머리칼 너머로 그녀의 이름 호명하는 소리가 들린다.

짧게 심호흡.

이윽고 자하연은 준비된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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