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체육대회
* * *
시간은 바야흐로 화살과 같다는 격언이 단순한 빈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신세계 질서의 간섭도, 별다른 음모의 흔적도 없이 체육대회가 막을 올렸다.
사소한 협잡의 그림자는 있었지만, 이 정도면 실로 평화롭다 할 법했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눈 앞의 광경은 체육대회라기보단 차라리 축제에 가까웠다.
학교 건물은 완성된 데에 비해, 이용자가 영 마뜩찮은 게 현 아카데미의 현실이다.
당장 2학년은 간신히 머릿수만 채우고 있는 수준이요, 3학년은 아예 존재하질 않는 판국이니.
이번 신입생들 덕분에 최소한의 머릿수는 채울 수 있었지만,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휑한 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는 현재 때 아닌 인파에 북적이고 있었다.
실로 다양한 인간군상이었다.
예를 들면, 보호자 자격으로 방문한 학부모들.
혹은, 이번 아카데미 사업에 투자한 출자자들.
나아가서는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기자들까지.
고작해야 일개 체육대회라 평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양복쟁이들의 모습이 눈에 밟히는 건 사실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최승준이 의도한 바도 거기에 있으리라.
신세계 질서의 개입이 어렵다는 게 거의 확실해진 지금 이 시점.
아카데미의 체제를 반석에 올려야 다음 승부에 나설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이렇게 교문을 널리 연 이상모든 이들이 선의만 가지고 접근하리라 생각할 수는 없겠지.
오히려 이런 모습을 보고 신세계 질서 등이 무리해 습격 계획을 쥐어짜려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승준은 그 모든 위험보다 득이 더 크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뭐, 오판이리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
당장 이 자리에 모인 전력만 해도 그랬다.
최승준은 물론이요, 티아마트나 서아.
거기에 남상원을 필두로 한 혼인회 경비원들까지.
당장 학부모 자격으로 참관할 가능성이 있는 이준구마저 고려하면 오히려 차고도 넘칠 정도였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단순한 고등학교 방비 인력이라 칭하기에는 도리어 퍽 지나친 수준인 게 사실이다.
적어도 단순한 무력으로는 신세계 질서도 어찌할 수 없겠지.
만약 여기가 중동이었다면 목숨을 걸고 테러를 일으키는 놈들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대한민국.
막말로 제 목숨 아까워 몬스터 측에 붙고자 결심한 놈들이 그런 짓을 할 리도 없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제 무력 하나만 믿고 활개치는 왈패들이 아니다.
이 틈을 타 암암리에 드나드는 첩자들.
다시 말해 스파이들 쪽이 되겠지.
다만.
'아무려면 뭐 어때.'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그런 놈들을 분간할 능력 따위는 없다.
아니, 몬스터들이 잠입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바보는 아니겠지.
그러니 첩자를 색출하는 일 따위는 오히려 시원스레 다른 녀석들 편으로 맡겨버릴수 있었다.
뭐, 최소한 촉각은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겠지만.
만에 하나 큰 일이 발생한다면 즉각 움직일 수 있도록, 나는 조용히 교정을 돌고 있었다.
작년 1학기 중간고사 당시 그랬듯, 가벼운 점검 차원이었다.
……그 날 이후, 주지승이 어설픈 수작을 부리며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아니, 그야 그렇겠지만.
당연한 이야기였다.
주지승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의 수가 정확하게 들어간 상황일 테니까.
구태여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오히려 내가 행동에 나서지 않는 걸 보고 의아하게 여긴다면 또 모를까.
그조차 주지승의 성격을 생각하면 역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으리라.
물론 내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수는 전부 둔 상황이니, 머잖아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뿐었다.
도리어 지금까지 별다른 행동이 없었던 시점에서 주지승 이 친구의 한계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그야 심심하면 누구는 A+랭크요 다른 놈은 S랭크입디다 하고 튀어나오는 신세계 질서 측이 이상한 거겠지만.
어쨌든, 이와 같이 사소한문제를 제외하면 퍽 평화로운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와플 굽고 있는 윤하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윤하야. 뭐 하니?"
"알바요."
그렇게 말하니 내가 또 할 말은 없었지만.
물론 사정은 짐작이 갔다.
윤하는 이번 체육대회에 불참하기로 했으니까.
다름이 아니라, 출전 분야 문제 때문이었다.
윤하의 실력은 출중한 편이다.
적어도 학생들 중에서 쉬이 따라올 자는 없겠지.
단순한 방어력이라면 이 아카데미에서도 첫손에 꼽힐 테고.
허나, 딱 거기까지.
무기술 분야에 출전하기엔 당장 손에 익은 물건이 방패 뿐이요, 창술은 아직 미흡한 수준이니.
윤하 스스로도 자격이 되지 않는다 생각한 모양이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이번 체육대회는 결국 바깥에 보여주기 위한 면도 없잖아 있으니까.
능력을 사용한 상태에서 얻어맞는 윤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그야 헌터 협회 측에는 어필이 되겠지.
윤하 개인의 실력을 알리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고.
다만, 아카데미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래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예쁘장한 계집애가 얻어맞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줘서 도대체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거부감이 강해진다면 또 모를까.
때문에, 윤하는 일찌감치 체육대회에 손을 털었다.
그리고 이렇게 따로 아르바이트를 잡은 셈이었다.
물론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요란한 물건은 아니었다.
저번 초대형 게이트 발생 당시, 이 신도시는 하루아침에 평지가 될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사태를 피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반대로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닌 게 사실.
덕분에 박살난 가게를 고치고자 때 아닌 지출을 감수해야 했던 자영업자들은이런저런 부업에 발을 들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대적으로 교문을 연 아카데미의 방침에 호응해, 이런 식으로 분점을 낸 가게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초부터 최승준이 교문을 연 이유가 거기에 있겠지만.
뭐, 어느 쪽이든.
자영업자들과 연줄을 만들고자 한 최승준의 선택 덕분에 축제 분위기는 또 한창이었으니 나쁜 일도 아니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힘들어 죽겠구만."
그렇게 투덜거리는 윤하.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뒤, 나는 곧 내 몫으로 나온 와플 중 하나를 받아 윤하 앞에 두었다.
"자."
"잡상인 안 받아요."
"싸가지 없는 것."
피식, 뜬금없는 말에 무심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아니, 그거야 어쨌든.
"너 사주는 거야, 인마."
본인이야 납득했겠지만, 담임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날에 아르바이트 뛰고 있는 윤하의 모습은 다소 안타까운 면이 있었다.
어깨에 힘이 빠진 건 좋을 일이지만.
본래 윤하였다면 이런 일에 빠지려 하지 않았겠지.
오히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가하고자 억지를 부렸으리라.
자신과 가족들의 미래를 위해 더더욱 나은 결과를 내야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리고 있던 윤하다.
억지로 창 한 자루 꼬나쥐고 자신의 방어력을 앞세워 다른 애들을 깔아뭉게는 모습.
그리고 그런 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모습이 눈에 밟힐 듯 떠올랐다.
그러나.
저번 강원도 지부에서 겪었던 스카우트 경험 덕분일까?
나름 스스로의 재능에 자신이 붙기라도 한 건지, 윤하는 이번 일에 눈을 부릅뜨고 나서는 대신가볍게 손을 떼엇다.
그 모습에 모종의 대견한을 느끼는 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원스레 아르바이트 쪽을 택해 와플을 굽고 있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나도 있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마음이 섞이니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온 거겠지.
물론 윤하가 듣기엔 코웃음이 나올 상황이겠지만.
알바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주문 하나 더 넣는다니,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일까?
정작 당사자인 윤하는 내가 선물한 와플을 받아들고도 피식 헛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진심이세요?"
"응? 뭐가?"
"아니, 내가 자신감 붙은 게 강원도 지부 때문이겠냐구요. 내 질문에 대답 하나 안 하는 누구누구 때문이지."
마치 지나가듯 그렇게 말하며 윤하는우적우적 와플을 씹었다.
짐짓 개의치 않는다는 듯 일부러 과장스레 와플을 씹어먹는 그 모습 속, 감출 수 없는 섭섭함이 유독 눈에 밟혔다.
"존나 너무해."
"크흠."
물론 나로서는 헛기침 몇 번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지만.
확실히 조금 섭섭할 법도 했다.
특히 요 최근 예은이의 태도를 고려하면 더더욱.
모르긴 몰라도, 윤하 입장에선 화가 날 수밖에 없겠지.
예은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신과 다른 대답을 들은 게 아닌가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
다만, 내게도 할 말은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입으로 직접 예은이의 선언을 옮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딱히 내가 마음 받아주진 않겠지만, 나를 좋아하는 건 상관 없다?
원한다면 내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노력해라?
'씨발.'
내 입으로 직접 말하면 그게 미친 놈이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만다.
그런 내 마음이 낯빛으로 드러나기라도 한 걸까?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린 윤하는 그대로 내게 받은 와플을 가볍게 흔들었다.
방금 전 윤하가 남긴 잇자국 너머로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됐어요. 그런 사람인 거 알고 있었고. 잘 먹겠습니다."
단순한 축객령인지, 아니면 정말로 괜찮은 건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직접 물어볼 만한 용기는 없었다.
때문에, 나로서는 허겁지겁 도망치듯 인파 사이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와플은 맛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