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특훈
* * *
"하연아, 우승 한 번 해볼래?"
어느덧 4월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박우찬은 느닷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물론 이제 와서 그런 말로 하나하나 당황할 자하연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의 '오빠'가 이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오히려제대로 된 사정을 주변에 설명하고 행동에 나선 경우가 더 드물 지경이었다.
다만, 이번 일은 아무래도 경우가 달랐다.
박우찬이 그런 식으로 먼저 행동에 나서는 건 주로 신세계 질서와 관련된 일.
다시 말해, 자하연 그녀의 신변에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우승이요?"
이번에 박우찬이 언급한 건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내의 사정.
다시 말해, 이번 체육 대회 이야기였다.
때문에, 자하연이 혼란을 겪는 일 또한 당연한 바였다.
설마 신세계 질서 측에서 체육대회까지 손을 뻗을 생각인 걸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칠 만큼 허황된 발상이긴 했지만, 자하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여하간, 저번에 자신이 지나가듯 말했던 이상한 교사 이야기가 이렇게 발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물론 박우찬 또한 할 말은 있었다.
이번에 박우찬이 자하연에게 사정을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이런 학사 내 정치꾼 노릇에 자하연이 허물을 쓰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정 탓에 신세계 질서와 싸우는 데에 학생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세계 질서가 앞뒤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두르는 미치광이였기 때문.
적어도 박우찬 쪽에서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박우찬은 자하연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 또한 충실한 학창 생활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처럼 학교 내 자리 싸움에 얽히는 일 없이.
즉, 박우찬은 확신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지금 자신과 주지승 사이에 있는 갈등을 눈치챌 경우, 자하연이 단박에 행동에 나서리라는 점을.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여하간, 박우찬은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애매한 듯 흐릿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하연이가 단박에 예은이의 뒤통수를 내려친 그 날의 모습을.
박우찬이 보기에, 그와 얽힌 여자애들은 성격이 지나치게 괄괄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엉."
물론 말이야 그렇게 하긴 했지만,딱히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번 실력 교류회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참여를 기조로 한다.
여태까지 교무실에 쌓인 신청서만 봐도 참가자가 부족할 일은 없겠지만, 당사자인 하연이의 마음은 또 모르는 법.
어쩌면 참가 자체가 내키지 않을지도 모르지.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주지승은 졸지에 닭 쫓던 개 꼴이 되리라.
주지승이 그린 그림은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다.
근접전 분야, 무기술 종목.
그 우승자는 별다른 차질이 없다면 무난하게 정필연이 차지하게 되겠지.
허면?
우승자를 위한 이벤트 매치라는 명목으로, 주지승 자신이 정필연을 꺾는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정필연이 아닌 정필연에게 패배한 학생들 중 한 명을 골라 은밀히 접근한다면?
대다수 학생들은 십중팔구 넘어갈 수밖에 없다.
여하간, 아카데미 내부 사정을 알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정필연의 우승을 사실상 당연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무기술 종목 담당자인 정일현 선생도 자식 편애 운운하는 이유로 주지승의 자리를 고사할 수밖에 없었던 판국이니.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박우찬이 보기에 그건 지극히 객관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 입장에선 어떨까?
그야 서러울 수밖에.
안 그래도 정필연과 비교당하기 십상인 무기술 종목 참가자들이다.
단순한 감언이설이라 해도 흔들리지 않기 힘들겠지.
하물며, 무기술 종목 우승자인 정필연을 상대했던 교사가 오히려 자신 쪽을 더 높게 평가한다?
그런 상황에서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는 학생이 세상 천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주지승이 지금 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까지나 무난한 인선이었기 때문.
허나,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무기술 종목 우승자를 상대로 한 이벤트 매치.
소위 말하는 우승 상품을 전담할 정도로 주지승의 실력이 범상찮다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당연히 주지승이 점찍은 학생 또한 그렇게 여길 테고.
그만한 실력자가 자신을 지목했다는, 언뜻 듣기에 무협지 속 기연처럼 느껴지는 만남.
장담할 수 있다.
대다수 학생들은 주지승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으리라.
어쩌면 정필연 또한 자극당할지도 모르지.
우승자인 자신이 아닌 다른 학생에게 더 눈독을 들였다는 사실에.
주지승이 노리고 있는 점 또한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고.
뭐, 어느 쪽이든.
박우찬으로서는 그런 잔수작 따위, 부릴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요컨대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학생들의 미래를 발판으로 삼겠다는 뜻 아닌가.
영 내키지 않을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박우찬이 선택한 건 지극히 정석적인 정공법이었다.
요컨대, 자신의 제자인 하연이를 우승시킨다.
그리고 그대로 주지승까지 꺾어버린다.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주지승 쪽도 찌그러질 수밖에 없겠지.
당사자인 박우찬은커녕 그 제자에게 패배한 주지승이, 고작해야 1년 사이 주지승 이상의 실력자를 양성한 박우찬에게 입을 놀릴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그녀에게 나쁜 이야기도 아니었다.
자하연은 썩 나쁘지 않은 재목이다.
실력도 괜찮고, 비주얼도 출중한 편이니까.
다소 태평한 인상인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실력이 있으면 그 또한 신비주의라고 포장할 수 있는 법이다.
즉, 그녀가 헌터로서의 입지를 다지기에 이번 체육 대회만큼 적절한 자리도 없다는 뜻이었다.
졸업까지 2년.
박우찬은 이번 기회에 자하연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내가 하연이를 데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하연 쪽에서 바라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던 자하연의 독립심을 생각하며 박우찬은 짤막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 어쨌든.
박우찬 입장에서도 자하연의 우승은 바랄 수 있는 한 최선의 결과였다.
무엇보다, 자하연의 빈약한 신상명세가 도움이 되었다.
보육원 출신. 헌터로서 정식 등록한 건 바로 작년 이야기.
정필연처럼 본래부터 우수한 학생이었다느니 입방아를 찧을 여지도 없다.
오히려 그런 자하연을 발굴한 박우찬의 안목이 호평을 듣는다면 또 모를까.
학생 측에게 패배한 교사진의 위신을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 하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박우찬은 당연히 그런 데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사실상 학생들 중 한 명에게 전담 과외를 붙여주는 일과 다를 바 없지 않나 하는 점인데…….
박우찬은 그 부분 또한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필연의 실력이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소 지나칠 정도로.
게다가, 자하연 또한 헌터로서의 실력과 별개로 단순한 무기술에 한해선 여타 학생들에 비해 조금 처지는 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기술 종목 출전자들은 대부분 무기술 동아리 출신이었으니까.
물론 자하연 또한 따로 정일현 선생에게 사사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말하자면, 이번 일은 문제 유출이나 성적 조작보다는 오히려 보충 수업에 가까웠다.
남은 건 당사자인 자하연의 동의 뿐인 상황.
그러나 자하연은 곧바로 답하는 대신 체단실 바깥을 향해 멀찍이 시선을 던졌다.
다른 건 몰라도, 하필이면 오빠가 왜 무기술 쪽을 추천한 건지는 그녀 또한 알 수 있었다.
보조 분야 교사가 티아마트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호불호 때문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축복이나 회복 계통의 능력이 많은 보조 분야.
거기에서 자하연의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십중팔구 부상자의 상처를 회복시키는 등의 시험으로 성적을 겨룰 테니까.
하물며 저주 쪽은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이 부족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년부터 박우찬이 그토록 들여오자 주장했던 능력 계측기가 들어오지 않은 탓이었다.
때문에, 만에 하나 자하연이 이번 체육 대회동안 활약하려면 부무장인 쿼터스태프를 사용하는 근접전 분야.
개중에서도 무기술 종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하연에게 있어, 박우찬의 제안은 썩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기술 종목엔 정필연이 출전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하연이 정필연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정일현 선생에게 따로 가르침을 받는 건 그녀와 박우찬, 그리고 정필연 뿐이었으니까.
다만.
도대체 뭘 잘못 먹은 건지, 개학 이후 정필연이 은근슬쩍 으스대는 게 영 아니꼬웠다.
"자, 먼저 마셔."
"응? 고마워."
"뭘, 사형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사형?"
아니, 내가 왜 사매야?
자하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정일현 선생을 기준으로 따지자면 틀린 말도 아니겠지만, 정필연이 말하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가당찮게도, 정필연은 자신이 박우찬의 제자로서 자하연의 사형이라 자칭하는 것이었다!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박우찬에게 훈련을 받았던 자하연으로서는 코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필연이 그런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단지, 정필연은 이번 학기 초 박우찬과 함께 자경단 노릇을 하며 악마를 상대한 적 있었다.
안 그래도 박우찬을 심상찮게 존경하고 있던 정필연이다.
그런 정필연에게 마신 운운하는 이야기를 피하기 위해 악마 이야기를 꺼낸 박우찬의 핑계는 정필연의 마음에 불을 당길 뿐이었다.
초대형 게이트 발생 당시, 이 땅으로 넘어온 악마!
이런 악마를 함께 토벌한 사제!
한껏 겉멋이 든 나이에 정필연이 내심 박우찬의 수제자를 자칭해도 이상하진 않을 일이었다.
심지어 자하연과 달리 정필연 자신은 무기도 박우찬과 비슷한 검을 쓰지 않는가.
물론 세세한 부분을 따지면 비슷하다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다른 점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자하연의 육척봉보다는 나았다.
하물며 자하연의 능력은 박우찬 쪽과 별다른 관련도 없으니.
이 정도면 오히려 자신이 수제자를 자칭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고작해야 두어 달 먼저 체력 단련 좀 받았다는 이유로 수제자를 자칭하는 쪽이 더 우스울 따름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하연으로서는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오빠한테 달라붙는 계집애들까지 생긴 판국에, 무슨 수제자는 수제자란 말인가?
고작해야 두어 달.
정필연은 그렇게 말했지만, 자하연은 생각이 달랐다.
여하간, 자신이 헌터라는 사실을 발굴한 게 박우찬 아니었던가?
내제자이며 수제자.
그 이름에 어울리는 건 어딜 어떻게 봐도 자신 뿐이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진짜 내제자이며 수제자요 첫 번째 제자였던 신서아가 들었다면 코웃음을 칠 일이었겠지만, 둘은 나름대로 진지했다.
이 나잇대 학생들이란 으레 그런 법이었다.
내가 누나고 네가 동생이니 하는 시시콜콜한 면에 있어 누구보다 진심일 수 있는 나이.
때문에.
"괜찮을 것 같네요."
만약 정필연을 때려눕힐 수 있다면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리라.
자하연은 진지하게 그리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