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240화 (240/371)

〈 240화 〉 빼돌리기

* * *

아카데미 1학년 교사, 주지승에게 있어 이번 회의동안 박우찬이 내비친 태도는 상당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여하간, 그의 예상에 따르면 박우찬은 진즉에 힘이 빠진 퇴물이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지승은 눈에 띌 정도로 강력한 헌터는 아니다.

헌터 협회 기준으로 따졌을 때 B랭크.

중견 헌터들 중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만, 눈에 띌 만큼 우수하진 않다.

그리고 주지승은 그런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었고,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에게 있어, 헌터라는 건 어디까지나 직업에 불과했다.

몬스터를 잡아 죽이면 돈이 나온다.

그렇게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말하자면, 주지승에게 있어 헌터란 단순히 상황 맞추어 적당히 들어간 직장에 불과했다.

딱히 나쁜 태도라는 건 아니다.

적어도 박우찬이 들었다면 그렇게 평했겠지.

복수심에 스스로의 몸을 태우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냥에 나서는 헌터.

분명히 그런 사냥꾼들의 행동은 장렬하기 짝이 없고, 고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헌터 또한 사람이다.

생계를 꾸릴 여유가 없으면 사냥 또한 준비할 수 없고, 밥을 먹지 못하면 힘을 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주지승의 태도 자체는 나쁠 건 없었다.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크게 흠잡힐 건 없다.

주지승이 아카데미 교직 자리에 신청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요 최근 헌터 쪽 수익이 나빠지기도 했고, 최근에 있던 초대형 게이트 발생 사건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만약 본격적인 제 3차 대침공이 발발한다면?

적어도 수익이야 좋아지겠지만, 그 위험성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주지승은 그런 일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주된 전장으로 삼던 건 어디까지나 최전선 헌터들의 잔반 처리.

자신보다 약한 몬스터들이나 뒤로 빠져나온 몬스터들을 추적해 소탕하는 일이었다.

정면에서 몬스터와 치고받고 싶지는 않다는 게 본심이다.

그래서 주지승은 아카데미 교사 자리를 자원했다.

몬스터와 정면으로 싸우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지만, 반대로 도망쳤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적당히 제자를 기르며, 교사라는 직함으로 대침공 시대에 기여한다.

다행스럽게도, 교직에 안착하는 일은 쉬웠다.

아카데미 자체가 만성 교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헌터 아카데미는 아직 신흥 사업.

그렇게 전도유망한 업계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지승은 망설이지 않았다.

주지승은 스스로의 감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 업계는 곧 뜬다.

다가올 대침공에 앞서 목숨이 아까울 자들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런 자들보다 앞서 이 업계에 발을 들인 주지승은 먼저 자신의 입지를 다져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박우찬은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박우찬과 같은 부류는 주지승 또한 알고 있었다.

이 업계에선 흔한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복수심. 혹은 모종의 의무감.

그런 이유로 현장에 발을 들인 사냥꾼들은, 자신의 한계에 맞부딪히고도 뒤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거기에 남는 건 이미 마음이 부러진 헌터나, 혹은 남은 모든 걸 쏟아내 타버린 재와 같은 찌꺼기 뿐이다.

주지승이 박우찬을 그런 부류라고 착각한 일 또한 당연한 셈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도대체 S랭크 헌터라는 직함을 달고 아카데미에 정착할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참으로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문제는 판단의 대상인 박우찬이 상식적인 헌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문제로 주지승을 무어라 책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겠지.

설마 주지승이라 해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박우찬이 아카데미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가 근본적으로는 지하에 있는 E랭크 게이트 하나 놓치기 싫어서라는 사실을.

하물며 S랭크 헌터로서 자신의 몸값을 생각지도 않고 게이트 뺑뺑이를 도는 이유가 단순히 취미.

혹은 몬스터를 죽이는 게 기분 좋아서라니.

스스로를 세상 현명하게 살고 있다 자부하고 있는 주지승으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으리라.

덕분에, 주지승의 계획은 첫걸음부터 빗나가고 말았다.

박우찬은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다.

자신의 한계를 밀어내며 끝없이 싸운 끝에,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전제를 두고 행동하기엔 박우찬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모든 힘을 쏟아내고 힘이 빠진 종이 호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단순한 허세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리스크가 크다.

막말로, 헌터 협회의 기준에 의하면 박우찬의 능력은 S랭크 가량.

어느 정도 쇠퇴를 겪었다 한들, B랭크 수준인 주지승으로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일기토 따위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

어느 쪽이든 손해만 볼 뿐이다.

허면?

주지승은 그대로 머리를 굴렸다.

박우찬이 단순히 허세를 부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어차피 이 쪽으로서는 확인하겠답시고 일기토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건 너무 확률 낮은 도박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 꼬리를 내릴 수는 없었다.

단순한 자존심 싸움 따위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대대적으로 도발을 한 이상 뒤로 뺀다 한들 저 쪽에서 가만히 있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지승은 그대로 다음 스텝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국 주지승이 아카데미 내에서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다.

허면?

구태여 박우찬과 직접 격돌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실력을 겨룰 까닭도 없다.

지금 필요한 건 교사로서의 실적 뿐.

즉, 자신의 교사로서의 실력이 박우찬보다 위라는 걸 만천하에 보일 수 있으면 충분한 일이었다.

마침 적절하게 타겟 또한 골라두기도 했고.

주지승이 그럭저럭 자신이 있는 건 다른 사람을 맞출 여지도 없고, 그나마 거리를 벌리고 싸울 수 있는 장병기술이었다.

허면, 박우찬의 제자들 중 장병기술에 그럭저럭 소양이 있는 아이.

개중에서도, 실력이 나쁘진 않지만 이예은이나 정필연 등보다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신입.

별다른 뒷배경 하나 없는 고아 즈음이 적당하다.

아마도 박우찬의 반 내에서 알게 모르게 열등감 등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걸 자기가 키워주기만 하면?

박우찬이 이예은과 정필연이라는 빅네임에 눈이 팔려 묻혀 있던 인재를 발굴한 교사.

그런 타이틀을 먹는 건 순식간이다.

"네? 싫어요."

……그렇게 생각해 접근한 끝에, 주지승은 고작해야 10초도 안 되서 패배감을 맛보게 되었다.

이예은이나 정필연에 필적하는 자질이 있지만, 그 둘에 묻혀 별다른 빛을 못 보고 있는 신인.

다시 말해, 자하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

자하연은 요 최근 한창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번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이예은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린 거?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그 부분에 있어 자하연은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맞을 짓을 해서 맞은 게 아닌가?

오히려 마음 같아서는 스무 발은 더 때렸어야 할 문제였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이예은 그 앙큼한 계집애가 다음 날 멀쩡한 얼굴로 등교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딱히 차인 듯한 모습도 아니었다.

하물며 박우찬 또한 무언가 어물쩡한 태도로 넘어가고 있었고!!

심지어 학교 내에서 돌고 있던 소문 또한 그런 태도로 정면에서 잠재우지 않았던가.

자하연으로서는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바야흐로 마장을 달리는 말과 같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마 받아들인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는데?

그럼 저 분위기는 뭐야?

나도 스퍼트를 넣어야 하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다른 경주마들의 자멸을 유도하는 질주인가…….

자하연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승부를 강요받는 듯한 경주마의 감상이 이러할까 싶은 느낌.

덕분에, 자하연은 요 최근 매의 눈으로 반 내부의 분위기를 살피는 게 일과였다.

'적어도 다른 애들은 별다른 변화 없는 것 같은데…….'

다들 그녀와 마찬가지로 당황하거나, 이예은과 박우찬 사이에 감도는 기류에 의아함을 품거나.

혹은, 저번에 이예은과 박우찬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한껏 당황하거나.

그런 부류는 있어도, 달리 행동에 나선 이들은 없는 듯했다.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자하연은 곧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상황에 변화가 없다고 안주해선 안 된다.

그래서야 '티아마트' 꼴이 날 뿐이다.

자하연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 안녕? 네가 자하연이지?"

"네?"

"나는 1학년 C반 담임 주지승이야. 네 진로에 대해서 잠깐 할 말이 있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네? 싫어요."

그런 만큼, 당연히 저런 말에 귀를 기울일 시간도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조금 놀랄 정도였다.

'아카데미 안에도 잡상인이 오나?'

만약 정말로 교사라면 구태여 저런 식으로 자신에게 따로 접촉할 필요가 없다.

교무실로 부르거나 했겠지.

현재 아카데미 내에서 흐르고 있는 미묘한 분위기.

나아가서는, 시시콜콜한 투닥거림.

그런 부분에 대해선 알아봤자 방해만 된다며 일절 가르쳐주지 않은 박우찬 덕택이었다.

때문에, 이예은은 마치 잡상인을 떨쳐내듯 일언지하로 그 제안을 거절한 뒤 종종거리는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애초에, 진로라니?

그런 이야기는 담임이자 그녀의 보호자인 박우찬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야 할 일이었다.

덕분에, 상쾌한 얼굴로 그녀에게 작업을 치러 온 주지승은 채 10초도 되지 않아 홀로 덩그러니 복도에 남게 되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