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 뒷수습
* * *
물론 실제로는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다.
박우찬이 한 일은 결국 단순한 화풀이.
뒤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도시를 구했다 한들, 당장 박우찬의 평가는 개선되지 않는다.
덕분에 박우찬은 절찬리에 변태라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오히려 박우찬 쪽이 피해자였지만, 여고생이라는 이름은 그토록 강력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예은아, 괜찮아?"
"응? 뭐가?"
"아니, 저번에……."
"아아, 선생님한테키스했던 일 말이지?"
"응? 으응, 맞아!"
"물론이기.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 그래? 다행이다.……저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얼마든지."
"그 때 그거, 결국 무슨 일이었어?"
"딱히 별다른 이유는 없는데. 글쎄, 하고 싶어서?"
여고생이자 당사자인 이예은이 나서자, 헛소문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물론 머지 않아 이예은의 행동에 대한 군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겠지만, 그거야 사실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이 쪽을 향해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는 일부도 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같은 동아리 친구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을 향해, 이예은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메롱.
짧게 혀를 내밀고 휙 고개를 돌린다.
곧이어 시선 너머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귓가 너머로 드리는 소리에 키득키득 하고 웃음을 흘리기도 잠시.
이예은은 짤막하게 기지개를 켰다.
물론 어느 쪽이든 진심으로 성질을 부리는 건 아니었다.
단지.
다른 애들이야 어쨌든, 이예은은 조금이나마 본심을 담은 게 사실이었다.
조금 괘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겁해.'
그 때.
그러니까, 던전 체험 전.
서로 작당모의하듯 쑥덕거릴 때만 해도 우리는 친구라는 듯이 말했던 주제에 먼저 고백하다니?
게다가 이야기도 안 하고 입만 싹 닦고 있었단 말이지?
선생님이 전부 거절해서 불행 중 다행이지, 만약 받아들였으면?
십중팔구 스릴 있는 비밀 연애를 즐기려 했으리라.
이예은은 그렇게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만 해도 그랬을 테니까!
물론 사정을 물으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리라.
분위기가 그렇게 되서 어쩔 수 없었다고.
분명히 그녀들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흐름을 탄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발을 뺄 만큼 박우찬 주변에 있는 여자애들은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제일 여유로운 포지션을 선점하고 느긋하게 관조하던 자하연.
평소엔 언제나 두루뭉술한 분위기인 주제에, 자신이 눈 앞에서 흐름을 잡자 뒤통수를 갈긴 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자신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겠지만!
그거야 어쨌든.
때문에, 이예은 또한 구태여 시시콜콜한 설명을 하진 않았다.
자신 또한 담임인 박우찬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고.
그리고 거절당했다고.
하지만 자신은 포기할 생각 따위는 없다고.
어떻게든 선생님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 때까지 문을 두드리고 있을 거라고.
말하자면, 그건 이예은 나름의 견제였다.
견제.
연애, 하물며 친구들과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상황.
비단 이예은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에게도 낯설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예은에게 있어 가장 익숙하지 않은 건 바로 지금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계기는 여럿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학기 초의 내기.
당시에는 짜증만 났을 뿐이지만,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면 진지하게 자신의 제자를 걱정한 결과물.
예를 들면, 여름방학 당시 보았던 남해에서의 모습.
단순히 경박한 오빠의 친구가 아니라, 한 명의 사냥꾼으로서 그 모습을 보게 되었던 언젠가.
예를 들면, 이 도시 위에 초대형 게이트가 나타났던 바로 그 날.
자신을 구하기 위해 구울과 싸우고 용을 사냥하던 그 처절함.
혹은, 단순한 의료 행위를 위해 입을 맞춘 자신을 보고 귓가를 붉히던 그 얼굴까지.
의식할 만한 계기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이 쪽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모습에, 무심코 화가 났다.
가끔씩 돌발 행동을 벌이면 당황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당황하기는 할지언정, 근본적으로 이 쪽을 학생이 아닌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초대형 게이트 발생 이후 열렸던 파티에서 이예은은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사실에 화가 났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겠다고 다짐해…….
그리고.
겨울이 지나, 다시금 봄.
친구들 사이에서 감도는 분위기를 보고, 묘한 초조함을 느꼈다.
자신만이 뒤쳐져 있는 듯한 감각.
거기에.
'빼앗길지도 몰라.'
이예은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빼앗긴다고 해도, 박우찬은 그녀의 물건이 아니다.
그리고 이예은은 그런 사실에 이상할 정도로 화가 나는 자신을 발견했다.
동시에, 그제서야 깨달았다.
학기 초부터 지금까지.
박우찬이 자신을 인정하게 하겠다고.
박우찬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박우찬이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고.
박우찬이 자신을 돌아보질 않는다면, 자신이 돌아보게 하겠다고…….
박우찬. 박우찬. 박우찬.
작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거의 1년 내내 이예은은 계속 그녀의 담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한 점을 깨달았을 때, 이예은은 더할 나위 없이 뛰기 시작하는 자신의 심장을 깨달았다.
그 틈을 찔려 마신이라는 자들에게 빈틈을 내준 건 물론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지만.
쿵. 쿵.
심장이 기분 좋은 리듬으로 뛴다.
그리고 거기에서 박우찬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은 격조 없이 크게 발구름을 시작한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도 들리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로 큼지막한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리듬이 자신의 안에서 박우찬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자신의 안에서 그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있다 생각하면, 이예은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려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예은은 푹 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각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혹은, 마신의 충동질에 등을 떠밀려 지독할 정도로 과감하게 발을 딛은 이후.
자신이 내심 정해두고 있던 일선을 넘은 뒤, 이예은은 오히려 한층 더 절조 없이 뛰는 자신의 마음에 곤혹을 겪었다.
……말하자면, 이예은은 틀림없는 모범생이었다.
여태까지 남자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서, 오빠에게 부끄럽지 않은 헌터가 되고자 달려왔다.
허나,이제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싶다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예은은 난생 처음으로 일탈을 경험했다.
그리고.
일탈이라는 물건이 으레 그렇듯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탈의 맛은 참으로 짜릿했다.
*
그리고.
그림자조차 지지 않는 땅 밑.
불만의 마신은 자신의 거처에 나타난 또 한 명의 마신을 반겼다.
"오오, 역시 무사하셨구려."
물론 그럴 법도 했다.
눈 앞의 그림자는, 그 악의의 마신과 쌍벽을 이루는 일곱 마신들의 필두.
악의의 마신이 정신을 관장하듯, 마신들의 무력을 상징하는 존재.
도축업자. 그리고 인류 최강.
그렇게 불리는 헌터들이 모이는 장소라 할지라도 패배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불만의 마신은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체를 이룬 그림자는 담담하게 물었다.
"그래서."
"으음?"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나하이트."
그 날.
그 뒷골목에서 물었던 물음을, 마신은 다시 한 번 던진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여하간, 이번에 불만의 마신이 저지른 행동은 그럴 만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일곱 마신은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다.
분야가 따로 깔끔하게 나뉜 만큼, 서로의 행동에 간섭해 봐야 변변찮은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불만의 마신이 저지른 행동은 달랐다.
도시의 불량배들을 거두어, 그 감정을 쥐어짠다.
거기까지는 상관 없다.
다만.
성좌로서의 가호를 내린다.
그건 상당히 곤란한 일이었다.
여하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 첫 번째 대침공 당시 가장 먼저 눈을 뜬 희랍의 신화가 그랬듯이.
선과 악은 표리일체.
선이란 곧 악이 될 수 있고, 악은 곧 선으로 통하는 법.
일찍이 한 몸에서 나온 두 신을 섬기는 그들은, 각각이 곧 또 하나의 신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성좌와 몬스터는 사실 한 핏줄.
마신 또한 신이라는 점을 이용하면, 그들은 성좌들처럼 신자를 늘릴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 시대에서 몬스터 또한 성좌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게 유명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마신들에게 있어 일종의 무기가 될 수도 있었을 사안.
하물며, 다른 마신들과 공유하는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낸 그에게는 형식적으로나마 문책할 필요가 있었다.
"흠. 자네도 알고 있지 않소?"
"무얼 말이지?"
"일찍이 이 조직 내에서 진행되었던 계획을."
실제로, 불만의 마신 또한 별다른 내색은 없었다.
필시 형식 뿐인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내심 한숨을 돌리는 그와 달리, 불만의 마신 나하이트는 곧 열정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모른다."
"허면 내 알려드리리다. 일찍이 이 조직에서는 우리들의대모를 재현하고자 시도하였소이다!"
재현.
그 말에 마신의 눈꼬리가 휙 하고 올라갔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작은 파문.
단순히 그림자가 일렁인 게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장 눈 앞의 나하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 자신의 동포가 보인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야기를 떠벌리고 있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들의 접근은 나쁘지 않았지. 우리들의 대모를 재현하기 위해, 성좌와 비슷한 그릇을 사용한다!"
"……그래서?"
"당연히 그 의식은 실패했소. 당장 우리들이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이유만 해도 그 때문이 아니오이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번에 이 신세계 질서라는 조직에서 저질렀던 일.
현재 지상의 도시 위에서는 초대형 게이트 발생 사건이라 불리고 있는 일을 틈타, 그들은 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당시 이 현세에서 일어났던 일에,그들의 왕께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왕의 심복 된 일곱 신을 파견할 정도로.
분명히 당시 게이트라 불리는 관문을 열었던 게 그런 실험이라고 했던가.
우리들의 대모.
즉, 신세계 질서 내에서촉매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는 성질을 재현하기 위한 시험이다.
"뭐, 그렇지만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들의 대모께서는 단순한 신이 아니지요."
"흠."
"그러니 이번에는, 저번에 이용되었던 그릇에 나의 마력을 통해……."
"아니, 됐다."
그림자는 고개를 저었다.
대충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다.
성좌를 닮은 그릇.
바로 어제, 나하이트가 점거하고 있던 여아를 뜻하는 말임은 알겠다.
다만, 어쩌다가 일개 인간이 성좌와 비슷한 파장을 지니게 된 건지 마신은 알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별로 관심도 없었다.
거기에 마신의 마력을 섞어, 그들의 대모 되는 그릇과 한층 더 가까운 성질을 부여한다…….
계획 자체에도 문제는 없다.
여하간, 당장 어제만 해도 그러지 않았던가.
거의 반 년에 걸쳐 나하이트가 준비했던 그릇.
성좌로서 가호를 내린 자신의 신도에게 깃들었던 나하이트가 발휘한 힘.
그리고.
제대로 된 계약이나 준비 하나 없이 자신의 마력을 사용해 그릇을 탈취한 나하이트가 발휘한 힘.
박우찬은 그 둘이 발휘한 힘을 얼추 비슷한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즉.
불만의 마신이 반 년에 걸쳐 준비한 신도와 이예은은, 단순한 상성만 봐도 후자가 압도적이었다.
만에 하나, 그렇게 장악한 이예은을 토대로 다시 한 번 의식을 벌일 수만 있다면…….
나하이트의 말마따나, 이번에는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낼 수도 있겠지.
그런 불만의 마신이 발휘하는 자세는 필시 존경할 만한 물건이다.
스스로의 현황에 불만을 가지고,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마신.
어떤 의미로, 불만의 마신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도록 참으로 진취적인 친구였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겠지.
신세계 질서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계획이 정체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만스럽다.
그러므로 그 딴에는 나름 수단을 궁구하려 한 셈일 터.
그렇지만.
"여기까지다, 나하이트."
"음?"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세에서 불만의 마신이 내뱉은 마지막 단말마였다.
퍼어엉!!
주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폭음에 가까운 일격이, 작렬한다.
비록 정신 간섭에 특화되었다고는 하나, 단순한 육체 능력만 해도 A+랭크 몬스터.
당장 박우찬이 그렇게 평했던 나하이트의 육체가 기우뚱 하고 기울기도 잠시.
곧 풀썩 하고 쓰러진 나하이트의 하반신 위로,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에 어울리지 않는 비가 내렸다.
피와 뇌수, 체액과 내장으로 이루어진 비였다.
일격.
동격의 마신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재빠른, 비유하자면 단순한 잽.
고작해야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 그림자의 일격이, 마신의 육체를 뜯어 날린 것이다.
완전히 폭발한 상반신 너머로, 동떨어져 남은 다리가 완전히 무너진다.
그리고.
"네 성질은 이해한다. 어떻게 해서 그런 결론에 다다른 건지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신의 상반신으로 이루어진 육편의 비 사이에서, 그림자와 같은 마신은 그렇게 고했다.
"감히 우리들의 대모를 그 손으로 직접 빚으려 한 불경, 네 목숨을 다하고도 되갚기 어렵다."
바야흐로, 이제 고작해야 여섯 남은 마신 중 한 기를 스스로의 손으로 숙청해서라도.
남은 여섯 마신들의 필두 되는 마신들의 장자는, 감히 그렇게 단언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