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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230화 (230/371)

〈 230화 〉 연장전

* * *

싸움이 끝났다.

정필연은 어느 누구보다 빠르게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 그가 상대하고 있던 헌터들이 단번에 쓰러졌기 때문이다.

……시그니처, 예쁘게 베기.

담임인 박우찬의 절기다.

일찍이 눈 앞에서 시연하는 모습을 본 정필연은 알고 있었다.

정신 나간 이름과 달리, 바야흐로 시그니처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완성도.

방금 전, 이 주변 일대를 휩쓴 일격은 틀림없이 예의 시그니처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물론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해야 한 번 견식했을 뿐인데 성좌와 헌터 사이의 계약조차 벨 수 있다 생각할 수는 없겠지.

실력이 아니라 상식적인 문제다.

'일단 다들 다친 데는 없고…….'

혹시 몰라 쓰러진 헌터들의 상태를 확인해보기도 했지만, 눈에 띄는 부상은 없었다.

설마 목이라도 잘랐을까 싶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상 하나 없을 줄이야.

오히려 어떻게 제압한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쓰라린 상처를 감싸며, 정필연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정작 승리한 자신 쪽이 더 너덜너덜한 꼴이라니.

자칭 자경단으로서는 아무래도 미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심검이라도 되는 건지.

마치 의식을 베어 잘라낸 듯한 모습을 보며, 정필연은 그렇게 품평했다.

이윽고 쓰러진 헌터들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정필연.

곧 그 눈길이 숫제평지가 되어버린 집터로 향했다.

"끝났어요?"

"아마도."

던진 물음에 비해, 대답은 실로 단조롭다.

그렇지만 정필연은 그 담담한 반응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전부 끝났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이 근처를 장악하고 있던 불길한 마력 또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정말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당장 여기에 있는 헌터들의 뒷처리는 물론이요, 오늘 내내 들쑤시고 다녔던 비밀 조직들에 대한 처우도 결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한 불은 껐나.'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끝냈다.

그런 확신과 함께, 정필연은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있었다.

*

그렇기에.

다음 순간, 정필연은 자신을 덮치는 마력의 파도에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일로 정필연이 방심했다폄하하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이야기겠지.

오히려 칭찬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정필연은이번 기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예상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필연은 아슬아슬하게 검을 들어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마력을 뿌리칠 수 있었다.

다만.

딱 거기까지였다.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기습.

만에 하나 온전한 상태였다 할지라도 막아낼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공격이었다.

하물며, 그는 너무나도 지친 상태였다.

하교 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서른은 넘는 폭력 조직을 상대로 칼을 휘둘렀고, 거기에 방금 전까지는 스물 가까이 되는 헌터들을 상대해야 했던 상황.

어느 쪽이든, 예상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이상 여력을 짜내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씨발."

콰아앙!!

나지막한 욕지거리.

작렬하는 폭음과 함께, 정필연은 반쯤 무너진 골목길 담벼락에 쳐박히고 말았다.

의식은 간신히 붙잡은 모양이었지만, 그 이상은 힘들겠지.

누가 보아도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허."

갑작스러운 이변에 박우찬은 짧게 탄성을 토하며 고개를 돌렸다.

당황했다거나, 혹은 곤혹을 삼키고 있었다거나 하는 감정은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그건 박우찬이 방금 전 이루어진 기습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방금 전 정필연을 공격한 마력의 흐름에 대략적인 사태를 순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다.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린 끝에 역으로 침착한 듯 보일 뿐이다.

그런 감상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박우찬은 시선을 돌렸다.

[나쁘지 않군.]

거기에는 이예은이 서 있었다.

밤하늘 아래로 화사하게 늘어뜨린 금발.

어둠이 내리깔린 뒷골목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찰랑거린다.

마치 그 근처만 해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화사한 공기가 머무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눈동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지금 박우찬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선 무어라 형언할 서 없는 탁함이 느껴진다.

시선의 맑디 맑은 하늘색.

거기에 먹구름이 끼었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실제로도 그러했다.

방금 전, 정필연을 공격한 건 틀림없이 예은이의 능력이었다.

다만, 그 염력을 구성하고 있는 불길한 마력은 지나칠 정도로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여하간, 방금 전까지 싸우던 상대였으니까.

"지긋지긋한 놈이로군."

[거 참, 섭섭하신 말씀이오이다.]

그리고.

조용히 뇌까리는 박우찬의 말에, 이예은의 몸을 점거한 불만의 마신은 그렇게 화답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불만의 마신 또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방금 전, 박우찬과 정필연이 마신의 기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듯이.

불만의 마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단 일격에 자신의 마력은 물론이요, 성좌로서 몸소 하사한 은총까지 베어버릴 줄이야!

시그니처라고 했던가?

사냥꾼들이 보유하고 있는 절초.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저토록 강력한 기술일 줄은 몰랐다.

때문에.

불만의 마신 또한 대책을 급조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예상 밖의 상황이었으니까.

요컨대, 박우찬과 정필연 두 사제는 너무 훌륭한 결과를 내버린 셈이었다.

바야흐로 불만의 마신이 예정에도 없던 계획을 꺼내들어야 했을 만큼.

……상황을 파악한 박우찬의 두뇌가 방금 전 불만의 마신이 취했던 행동을 천천히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박우찬의 시그니처, 예쁘게 베기에 당해 모든 연결이 끊기고 만 불만의 마신.

그렇지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불만의 마신에겐 요 최근 손에 넣었던 그릇이 하나 남아 있었다.

두말할필요도 없겠지만, 이예은이다.

물론 이예은을 그릇으로 삼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여하간, 처음으로 정신에 간섭한 뒤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딱히 계시를 내린 적도 없다.

무엇보다, 아직 정신을 온전히 장악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불만의 마신에게 남은 패는 이예은 뿐이었다.

때문에, 이번에는 불만의 마신도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즉, 단순한 힘싸움.

마신의 권능을 아낌없이 동원해, 이예은의 정신을 억지로 장악한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눈 앞에 있었다.

멍하게 풀린 눈.

마력 너머로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마신의 존재감.

바야흐로 순식간이었다.

고작해야 그 잠깐 사이, 불만의 마신은 이예은의 정신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뭐,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악의의 마신에 비하면, 불만의 마신이 가진 힘은개인이 아닌 다수의 장악에 특화되어 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악의의 마신과 비교했을 때 이야기.

실제로는 다르다.

여하간, 당장 얼마 전에도 직접 본 적 있지 않았던가.

이예은보다 더 상위의 헌터인 류인형조차 불만의 마신이 부린 술수엔 속절없이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마신의 권능에 저항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증명하듯, 불만의 마신은 실로 경박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참으로 낯선 모습이었다.

비록 요 최근 당황할 만한 일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박우찬이 알고 있는 이예은은 저런 표정 따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명한 짓이라고는 말 못하겠는데."

[으음? 꽤나 담담하게 말씀하시지 않소.]

껄껄 하는 웃음과 함께, 이예은의 몸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마신.

그야 그럴 법도 하겠지.

실제로, 지금 이 상황은 난관이다.

정필연은 쓰러졌다.

마신은 복귀했다.

지금은 제압한 헌터들 또한, 마신이 다시금 손을 쓰면 일어서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무엇보다도, 문제는 지금 마신이 사용하고 있는 몸이 예은이의 것이라는 점이다.

상대하거나 부상을 입히기도 까다롭다.

그렇지 않고도 놈을 제압할 수 있는 시그니처, 예쁘게 베기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대가 마신 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번 쓴 것만으로도 꽤나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으니까.

지끈지끈한 머리를 누르며, 박우찬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세.

꽤나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마신이 그렇게 되물을 만한 여유가, 박우찬에게는 있었다.

여하간.

"너는 바보냐?"

[흠?]

방금 전.

시그니처를 사용했을 때, 박우찬은 분명히 이 주변에 널려 있던 마신의 권속과 마신 사이의 연결을 베었다.

그리고 그 결과, 마신과 헌터들 사이의 연결은 물론이요 마신이 반 년 동안 긁어모은 마력 또한 남김없이 증발하고 말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신의 간섭이 사라져 평범한 감정으로 되돌아갔다고 해야 할까.

뭐, 어느 쪽이든.

그런데도 눈 앞의 마신은 저토록 멀쩡하게 다시금 예은이를 장악해 이 자리까지 왔다.

허면, 지금 예은이를 제압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는 마력은?

마신 본인의 마력까지 긁어모아 사용한 것이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때문에.

박우찬은 지금 이 상황이 곤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필연이가 치명상을 입었다거나, 혹은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면 또 모를까.

오히려 동정할 따름이었다.

"조심해라."

만약 정말로 여기에 온 것이 불만의 마신 본인의 마력을 사용한 행동이었다면.

바로 직전처럼, 안전하게 발을 뺄 수 있는 타이밍은 이미 지났다.

모르긴 몰라도, 남은 마력 전부 불타 없어질 각오를 하는 게 좋겠지.

딱히 그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쿠르르르릉!!

다음 순간.

도시에 발을 들인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도시 뒷골목.

마신의 마력이 폐건물 하나를 날려버릴 때에도 누구 하나 반응하지 않도록 억누를 수 있었던 점에 비하면 참으로 천양지차인 반응이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로아스터 교의 일곱 마신.

그 이름조차, 저 벼락에 비하면 빛이 바라고 만다.

허겁지겁 달려온 탓에 제대로 예은이의 머릿속을 뒤적일 여유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마신이기에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박우찬이 신경을 쓸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박우찬의 말을 듣고 불길함을 느껴, 대비해…….

[크, 하아아악?!]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우렛소리가 하늘을 찢어갈랐을 때, 놈은 이미 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

고작해야 도시 하나 따위, 놈에게 있어선 전부 돌아보는 데에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아니, 뭐야 이 상황."

밤하늘 너머.

작렬하는 천둥번개와 함께,뇌신이 강림했다.

단순히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마신의 마력 절반 이상을 불살라버리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말 그대로 덤에 지나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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