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 자경단
* * *
요 근래 보기 드문 헌터.
정필연은 언제나 그런 평가를 달고 살았다.
단순한 실력만 보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다.
헌터라는 직업이 어느 정도 상위 계층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버린 시대.
혹은, 그렇지 않고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동반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널리 까발려진 시대.
대다수 헌터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하루살이와 같은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상상 내지 매스컴 속에 등장하는 헌터들의 모습과 다르게.
그런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헌터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소년.
자신에게 이런 힘이 주어진 이유가 있을 거라 이야기하는 정필연의 모습은 확실히 특필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한때는 그런 점에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진 적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혹은, 별다른 이유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냥꾼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적도 있다.
허나,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1년 사이.
담임인 박우찬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각종 경험을 겪은 소년은 한층 더 마음에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보다 넓은 시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줄 알게 되었고, 보다 넓은 마음으로 상황을 볼 줄 알게 된 덕이다.
영웅의 싹.
차세대 헌터.
정필연은 틀림없이 언젠가 소년의 모습을 보고 호들갑을 떨던 헌터들이 내렸던 평가에 어울리는 사냥꾼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도대체 걔네들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정필연의 그런 질문은 정말로 별다른 사심 하나 없는, 단순한 의아함에 지나지 않았다.
휴식 시간이었다.
애초에 자경단이라 해도 눈에 띌 만큼 험악한 일을 벌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가 줄었다고 해야 하겠지.
정필연과 이예은이 자경단 노릇에 나서기도 어언 반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당연히 지금 이 틈을 타 난동을 부리려는 양아치들 사이에서도 둘의 얼굴이 알려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현재 둘의 실력을 수치로 셈하자면 대략 B랭크.
초대형 게이트 발생 당시, 최전선에서 검을 휘둘렀다는 정필연은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예은 또한 던전 등을 통해 훈련에 매진하기는 했지만, 뒤에 박우찬이 있는 훈련과 실전.
둘 중 어느 쪽이 성장에 도움이 되느냐 물으면 그야 후자일 테니까.
……현직 B랭크에 가까운 헌터가 두 명.
여타 불량배들이 으레 그러듯이, 수의 폭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 차이가 아니다.
심지어 그런 불량배들 사이에 가끔씩 섞여 있는 헌터들 또한 마찬가지.
여하간, 이예은조차 내심 질투심을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지금 정필연의 실력이다.
고작해야 불량배들을 상대로 붙어먹는 초짜 헌터들을 상대로 밀릴 리도 없었다.
물론 이 둘이 상대와 자신의 실력 차이를 파악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에서 배운 교육 덕분.
당연히 불량배들로서는 그만한 실력 차이를 간파할 수 있을 만한 식견이 없었다.
덕분에 둘로서는 꽤나 편하게 일을 치를 수 있었다.
적당히 거리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불량배들을 때려눕히면 그만이었으니까.
구태여 찾으러 갈 필요도 없다.
그렇게.
난민촌 근처를 순찰하며 불량배들을 두들겨 패길 어언 한 달.
이제 불량배들은 둘의 얼굴만 봐도 멋대로 줄행랑을 치길 일쑤였다.
그 덕에 이렇게 여유도 낼 수 있는 거겠지만.
가볍게 순찰 한 번.
소소한 분쟁을 해결하고, 파수를 서길 대략 한 시간.
다른 자경단이 나타나 모습을 드러낸 덕에 어느 정도 쉴 시간을 확보한 그들은, 그런 시덥잖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근처 공터.
농담으로도 편안한 장소라 말하기엔 힘들 정도로 휑한 장소였지만, 적어도 먼저 덤벼드는 불량배 따위는 없었다.
"응?"
"아니, 걔네들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정필연이 손에 꼽는 이름들은 이예은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하간, 같은 동아리 애들 뿐이었으니까.
류지희. 황윤하.
거기에 신서아 교생까지.
정필연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이야 자세한 사정은 모르더라도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글쎄……."
물론 이예은으로서도 쉬이 말할 수는 없는 주제였다.
당장 본인부터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자세한 사정까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확신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겠지.
적어도 다른 사람의 연애사를 한낯 이야깃거리로 삼을 만큼 이예은은 뻔뻔스럽지 못했다.
그런 태도에 정필연은 능청스레 어깨를 좁혔다.
말했다시피, 정필연은 바보가 아니었다.
적어도 눈 앞의 이 계집애가 방금 전 언급된 녀석들이랑 몰려다니곤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겨울 방학 당시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평소와 달리, 대략 한 달간 자경단 자리를 비운 이예은.
그 때 이예은은 방금 전 언급한 계집애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고 말했었다.
정작 여행에 다녀온 것 치고는 꽤나 험악한 몰골로 돌아오긴 했지만.
때문에.
방학 도중에도 그렇게 같이 몰려다니던 녀석들.
헌데,이제 와서 왜 저토록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는지 짐작 하나 가지 않는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보나 마나 당사자 없는 자리에서 쑥덕거리긴 조금 그런 일이라는 거겠지.
이예은은 그런 점에선 철저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 연배에 있어 그럴 만한 일은 연애 사업 뿐이다.
정필연은 그렇게 확신했다.
"뭐, 너는 괜찮고?"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예은에게 물은 말은 정말로 단순한 안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여하간, 그가 알고 있는 이예은은 연애 사업 쪽에 있어선 꽤나 둔한 편이었으니까.
'응?'
때문에.
뭐가?
갑자기 왜?
기분 나빠.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던 정필연은, 뒤이은 침묵에 조금 의아한 기분을 품었다.
'어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예은이 생각에 잠긴 건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사실 이예은도 연애 사업에 빠져 있었다거나, 혹은 내색하지 않았을 뿐 나름 본인도 그런 사정이 있었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의문.
자신과 상대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상대란 방금 전 화두에 오른 셋을 모조리 차버린 끝에 이런 분위기를 만든 담임.
다시 말해 박우찬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예은은 박우찬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도통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황윤하의 파격적인 폭탄 발언 덕분에 어느 정도 감정을 자각하기는 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초대형 게이트 발생 당시 자신도 모르게 선택한 '의료 행위'는 지금 생각하기만 해도 확확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술로 향할 뻔한 손끝을 간신히 멈추며 이예은은 그리 생각했다.
다만.
어떤 의미로는 정필연의 걱정이 맞아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이예은은 딱 거기에서 멈춰 있었다.
다소 둥실둥실하다고 표현해야 할까.
입을 맞췄을 뿐.
그조차 어디까지나 의료 행위의 일환이었을 뿐.
그렇게 말하면 딱 거기까지다.
그렇지만.
거기서 만족해버렸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자신은 담임인 박우찬을 좋아한다.
입을 맞춘 적도 있다.
그 이상.
그래서 그 감정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 건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예은은 그런 점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장래 희망이 없는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이.
때문에, 이예은은 조금 놀랐다.
방학이 끝난 뒤.
자신과 같은 입장이라 생각했던 지희나 윤하가 달리 행동에 나섰다는 사실에.
그리고 추정컨대 담임이 둘의 고백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말하자면, 이예은에겐 딱히 고백을 생각할 만한 여유나 상상력이 없었다.
지금 관계로도 나쁘지 않잖아?
어느 정도 만족했다고 해야 할까.
내심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박우찬이 다른 학생들의 고백을 차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이예은은 어느 정도 안심하기도 했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자신도 함께 도매금으로 차이진 않았다는 사실에 다소 마음을 놓은 게 사실이다.
다만.
동시에, 생각하고 만다.
은연중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안심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애들은 담임에게 마음을 고백했고, 그대로 차였다.
허면?
만에 하나 자신이 고백했다면?
자신은 다른 친구들과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자신은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입장일까?
만약 어느 누군가가 담임의 마음을 손에 넣는다면.
그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신일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한 다른 친구들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마음이 답답해졌던 탓이다.
말 그대로 연애 초짜.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헌터가 되기 위해 달려온 부작용이 거기에 있었다.
'얘는 도대체 뭐지?'
때문에, 이예은은 자신도 모르게 정필연을 흘겨보고 있었다.
비슷한 처지인 건 서로 마찬가지일 텐데, 어느덧 약삭빠르게 여자친구를 사귄 정필연이 유독 괘씸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물론 이런 말을 직접 입으로 내는 건 부끄러우니 절대 할 수 없겠지만.
결국 이예은으로서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묘한 불만.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미지를 앞두었을 때의 불안감과 함께.
"흐음."
……만약.
만에 하나, 어느 누군가가 이예은이라는 개인의 마음에 관심을 가졌다면.
필시 그런 부분 때문이었으리라.
쓸데없는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둘을 향해, 골목 그림자 너머에서 검은 마력이 꿈틀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