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겨울 거리
* * *
장인 거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최승준에게 보고도 할 겸,박우찬과 류지희는 아카데미를 들리는 김에 일전 발주한 무기를 수주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때문에.
저 멀리 장인 거리의 간판이 보일 때 즈음, 박우찬이 그런 말을 꺼낸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여하간, 헌터의 무기는 비싸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자신이 처음으로 발주한 장비는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사람 몫의 헌터로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계기나 다름없으니까.
때문에.
박우찬이 류지희에게 그리 물은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마지막 금선이다.
만약 지희가 헌터가 되는 일을 단순한 부담으로 여기고 있다면.
물러설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스스로 헌터가 되고자 선택했다.
하지만.
지희에게 있어 아카데미 입학은 단순한 위장용.
나아가서는, 지희에게 어떻게든 혼혈이 아닌 다른 길을 알아봐주고 싶었던 남상원의 고집이 빚은 결과다.
그러므로.
신세계 질서가 노리고 있다 한들, 최소한 지희에게는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물론 류지희는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재밌냐고 물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지희가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은 건 바로 박우찬의 심상찮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재밌어요. 솔직히 재밌진 않아요.
어느 쪽이든, 섣불리 답하기 힘든 무거움이 지금 박우찬의 모습에선 느껴졌다.
덕분에 류지희는 조용히 스스로의 내면에 자문할 기회를 얻었다.
헌터라는 직업에 대해서.
다소 낯선 기분이 들었다.
말마따나, 류지희에게 있어서 헌터라는 직업은 어디까지나 면피용.
단순한 위장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게 혼인회 습격 사건으로 인해 들통나고 말았다.
동시에, 그 때까지만 해도 혼인회를 후원하던 신세계 질서를 적으로 돌리게 되었고.
때문에 류지희는 스스로 실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어디까지나 주변인에 지나지 않았던 윤하조차 건드린 게 바로 신세계 질서다.
배신자를 가만히 좌시하고 있을 리도 없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물론 지희의 예상과는 다르게 납치 따위의 수단이 아닌 여론을 동원한 언론전을 벌이긴 했지만.
그거야 어쨌든, 나중에는 일이 또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법이었다.
당장 이번 일만 해도 그랬고.
즉, 그녀에게 있어 헌터라는 직업은 단순한 수단이었다.
남상원으로서는 그녀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배한 수단.
동시에, 그녀로서는 이런 상황에 처한 이상 힘을 키울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헌터가 되기로 했다.
거기에 별다른 각오나 마음가짐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필요해서취한 행동일 뿐.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박우찬의 질문은 참으로 절묘했다.
어느 정도 재미는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향상될 때마다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고, 벽에 막히면 분하기도 했다.
벽을 넘을 방법을 찾아 궁리하는 일도 그럭저럭 재밌었고, 사고의 결과가 결실을 맺으면 내심 쾌재를 지르기도 했다.
다만, 지금 박우찬이 묻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닐 터였다.
헌터.
몬스터를 죽이는 일에 마음을 붙일 수 있었느냐 묻는다면…….
"갑자기 그건 왜요?"
"마음 못 붙였구나."
적당히 화두를 돌리려 했지만, 박우찬은 그리 말하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 말에 잠깐 어깨를 움츠린 지희는 곧 떨떠름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못 붙였다니.
그야 굳이 따지자면 그렇긴 하겠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런 걸 묻는 박우찬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질문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비유하자면 지금 네 직장이 마음에 드냐고 묻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지만, 애시당초 본인의 일에 100%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류지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헌터란 결국 험악한 직업이다.
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괴물과 싸우는 일이다.
그런 일을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할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안 내키면 그만둬도 돼."
때문에.
박우찬의 그 말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직장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된다.
누구나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반대로 진심으로 말하기는 힘든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
다른 사람의 삶.
타인의 인생을 말 한 마디로 좌지우지한다는 책임감은 그렇게 가벼운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류지희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몽마의 딸이기 때문일까?
당장 눈 앞에 있는 박우찬이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사실을.
마치 지나가듯 한 번 던져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박우찬은 본래부터 그랬다.
본인이 고작해야 즐겁다는 이유로 업계에 투신한, 얼마 되지 않는 헌터이기 때문일까.
다른 사냥꾼들이 침을 흘리며 탐내던 이예은의 재능을 눈 앞에 두고서도.
만에 하나 황윤하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말리진 않겠다 말했던 과거의 그 때도.
혹은, 애시당초 아카데미에 들어올 예정 하나 없이 자하연을 떠맡기로 했을 때도.
박우찬은 단 한 번도 필요하니까, 그 능력이 아까우니까 헌터가 되라고 권고하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무책임한 교사다.
어쩌면 단순히 힘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방만한 발언일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가 아카데미를 그만두겠다고 해도, 신세계 질서를 상대로 지켜줄 수는 있다고.
그런 내심의 여유가 반영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쉬이 하지 않을 그런 말까지 입에 올리면서 그 의사를 묻는 박우찬.
덕분에, 그녀들은 박우찬이 자신들을 진심으로 걱정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 누구보다 깊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류지희는 가족이라는 단어에 열이 오르는 성격이다.
어쩌면 그 때문일까?
혼인회 습격이나 그 뒤에 있었던 일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놈들과 본격적으로 얽힌 이래 줄곧, 신세계 질서는 그녀의 가족들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본격적인 피해자가 나온 지금.
박우찬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이번 일로 끝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일에 계속해서 직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설마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 있을 리는 없기에 구태여 그리 묻지는 않았지만, 박우찬은 필시 그리 묻고 싶은 거겠지.
때문에.
"아뇨. 괜찮은데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듯, 류지희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좁혔다.
마찬가지로, 박우찬 또한 미간을 좁혔다.
단순한 어린 시절의 치기라 생각할까.
그렇지 않으면 무어라 생각할까.
대책 없는 낙관론.
여태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무책임함.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 그럴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지희는 여태까지 아카데미를 퇴학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퇴학해야 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한 적은 여러 번 있다.
예를 들어, 혼인회와 충돌하는 일을 막기 위해 정체를 드러냈을 때.
혹은, 자신의 정체가 만천하에 까발려졌을 때.
그렇지만.
적어도 자의로 아카데미를 떠나자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는 남상원의 말이 귀에 박혔던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친구들과의 우정 때문이라는, 낯부끄러운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지.
허나, 류지희는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그런 이유들 중에서도 가장 새롭고 열에 들뜬 감정이, 최근 자신 안에서 샘솟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은 없지만, 정말로 괜찮겠니?"
"네."
"거 참, 대답 한 번 확실하네."
"그야, 선생님이 계시잖아요?"
그 말에 박우찬은 곧바로 대답하진 않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리도 없건만.
선생님이 있으니까.
당신이 있으니까 떠나긴 싫다.
그 말을 과연 박우찬이 어떻게 이해했을까.
한 걸음 더 내딛어야 할까.
언젠가, 비슷한 거리에서 돌아오던 와중 끝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입에 걸면서.
류지희는 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감쌌다.
동시에 생각했다.
아직 겨울이라 다행이라고.
추우니까. 차가우니까.
그러니 지금 이렇게 달아오른 얼굴 또한, 추워서 그런 것이라고 속일 수 있으리라…….
"그러냐?"
"네."
"거절한다면?"
"네?"
어쩌면 그 때문일까.
머리칼 너머에서 담담하게 들린 박우찬의 말에, 류지희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진 알겠지만 말이야."
툭, 하고 박우찬의 발끝이 조약돌을 걷어찼다.
그 얼굴엔 얄미울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요 최근, 이런 일에 직면할 기회가 많았던 탓일까.
아니면 몇 번이나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한 성과가 나오고 있는 덕택일까.
박우찬은 담담하게 그리 말했다.
"거절할 거다, 나는."
네 마음.
그리고 남은 전원의 마음도.
박우찬은 언젠가 스스로가 내렸던 결론을 번복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그렇게 확답했다.
……아니.
비단 류지희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신서아. 황윤하.
어쩌면 이후 차도가 생긴다면 이예은까지.
이미 정해놓은 대답을 담담하게 풀어놓는 박우찬의 태도는 참으로 담담했고, 그만큼 매정하기도 했다.
겨울 끝자락, 어느 날의 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