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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209화 (209/371)

〈 209화 〉 가정 방문

* * *

방침이 정해진 시점에서 달리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지희에게 연락을 넣었다.

물론 지희는 갑작스레 표변한 내 태도에 당황을 금치 못했지만.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요구에 맞추어 류인형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하길 30분.

이윽고 방 한구석에 쳐박아두었던 쪽지로부터 전화번호를 건져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류인형과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명분은 가정 방문.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적 상담이었다.

작년 1학기 중간고사 당시, 시험을 통째로 빼먹은 지희.

그 성적을 벌충할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단순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여태까지 중간고사 문제로 가정 방문 한 번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지희의 보호자가 남상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희가 자리를 비웠던 건 어디까지나 혼인회와 아카데미 사이의 정면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

헌데, 혼인회를 이끌고 직접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남상원에게 중간고사 성적 운운하는 이유로 상담 일정을 잡는다고?

책임 소지를 묻는 일밖에 안 되겠지.

덕분에 우리들은 여태까지 지희의 성적 문제로 상담을 나눈 적이 없었다.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류인형에게 지희의 성적 상담이라는 명분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 또한 바로 그 덕분이고.

허나, 류인형으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도 없으리라.

'이 쪽 사정을 모르니까.'

예를 들어, 내가 작년 지희의 성적 문제로 상담이 필요하다 전하면 보통은 어떻게 생각할까?

적어도 방금 전 내가 생각한 이 쪽 사정을 짐작하긴 힘들겠지.

설령 지희와 혼인회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는 류인형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뭐? 혼인회가 아카데미를 무력으로 전복할 생각이었다고?

지희는 그걸 막으려고 시험에서 빠졌고?

그래서 당사자인 남상원한테 지희의 성적 문제로 상담하긴 힘들다니.

제정신인가?

당장 그런 말이 먼저 나올 게 뻔하다.

즉, 류인형이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자그마치 1년 전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야?

혹시 남상원이 지희의 성적 관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걸까?

미친 거인 자식, 도움이 안 되는군.

하긴, 거인이라는 놈들이 다 그렇지.

빡대가리 같으니라고…….

모르긴 몰라도, 딱 그 정도이리라.

어쩌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행동에서 모종의 의미를 찾으려 들지도 모르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성적 상담은 보통 학생의 부모와 나누기 마련이니까.

혹시 박우찬의 이런 행동은 지희의 보호자로서 혼인회가 아닌 류 씨 일가를 인정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식의 망상이라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런 식으로 착각하도록 유도한 건 나지만, 당연히 내게 그 이상의 의도는 없다.

것보다, 오늘 내로 이번 사건을 대충 마무리하러 온 거니까.

이후의 일이나 세세한 정치 공작 따위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어서 올라오시죠."

그렇게.

나와 지희는 류인형의 자택에 도착했다.

류 씨 일가의 저택과 달리, 본인이 번 돈으로 마련했다는 집.

전체적으로 간소한 모양새긴 했지만 좁지는 않고, 그 이상으로…….

'철저하군.'

마력으로 이루어진 결계는 물론, 온갖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야 저택이 아니라 오히려 요새다.

"설마 그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 놀라셨겠네요."

"아뇨. 단지, 기쁘군요. 지희가 제 번호를 남겨두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는 류인형의 모습으로부터, 지희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류인형이 보기엔 그의 번호를 남기고 있었다는 데에 따른 부끄러움처럼 보일 테지만, 실상은 정 반대였다.

중학교 졸업 당시, 시원하게 번호를 날려버린 탓에 오래 전 집 한구석에 쳐박아두었던 쪽지까지 뒤적였다던가.

지희가 저 쪽 사람들을 좋아하진 않는다지만,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고.

그야 멋쩍을 만도 했다.

"으으."

그런 시선에 못 이기겠다는 듯, 지희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숫제 지긋지긋하다는 투였지만, 그에 비해 귓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뭐, 이번엔 연기였지만.

여타 몽마들이 표정을 연기할 때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얼굴 근육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류인형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거의 몽마 수준에 가까운 지희의 연기 능력이야 둘째치고, 이런 점도 못 알아보는 류인형의 실력에 나로서는 의문이 생길 지경이었다.

아니, 이번엔 그런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게 아니었지만.

슬쩍 신호를 보내자, 지희가 삐진 듯 비죽 입가를 내민다.

"아, 몰라. 마실 거 있어?"

"적당히 마실 거 있으니 가져오렴."

"지희야, 선생님은 콜라."

그렇게 자연스레 지희를 주방으로 보내자, 그 자리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얼마 전 만났을 때와 같이, 온화한 표정을 짓는 류인형.

그런 그의 얼굴을 살피며, 나는 슬쩍 눈썹을 튕겼다.

당장 근처에서 느껴지는 몬스터의 기미 따위는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번 만남은 그걸 떠보기 위해 찾아온 거였으니까.

"그래서, 지희의 성적 문제로 하실 이야기가 있으시다구요?"

"네.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지희가 작년 1학기 중간고사를 통째로 빼먹었거든요."

"저런."

안타깝다는 듯 류인형이 턱끝을 쓰다듬는다.

수염 하나 없는 모습으로 저러고 있으니 다소 우스꽝스러운 기분도 들었다.

"선생님도 꽤나 곤란하셨겠군요."

"뭐, 조금 복잡한 상황이긴 했습니다."

"먼저 지희의 보호자로서 사과드리고 싶군요."

보호자, 라.

역시 류인형의 마음 속에선 대충 제 나름의 그림이 잡힌 모양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지희가 주방에서 돌아오는 데에는 대충 3분.

시간이 부족하다 싶으면 화장실에 들리는 척이라도 하겠지만, 아무리 길어도 10분 이상은 벌 수 없다.

즉, 지희 없이 이 친구와 대면할 수 있는 건 앞으로 10분 내외라는 뜻인데…….

조금 세게 갈까.

내심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시금 입을 연다.

"보호자, 라."

"네. 저 또한 아카데미의 교사인 몸이지만, 지금은 보호자로서 사과드려야 할 입장이니까요."

"류 씨 일가의 막내로서, 가 아니라 말입니까?"

그 말에 류인형은 잠깐 멈칫했다.

무언가 반응이 있다기엔 다소 미묘한 수준이었다.

결국 나로서도 한 걸음 더 세게 찌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유감스럽긴 하겠군요."

"네? 무슨 소리이십니까?"

"중학교 시절 지희를 가르친 건 선생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러니 아쉬울 법도 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몇 개의 손가락을 펼쳤다.

"지희를 설득하는 데엔 실패했다. 오히려 지희는 집안과 연을 끊겠다고 나섰다."

"……으음."

"거기에 정작 졸업 직후 치른 시험에서는 시험 자체를 보이콧."

류인형으로서는 꽤나 힘들 상황이다.

적어도 자신이 지희를 잘 가르쳤다던가, 혼혈이 아닌 헌터로 위장할 만한 능력은 충분히 길러줬다던가.

그런 식으로 주장할 수 없을 테니까.

특히 혼혈인 지희가 어디 가서 류 씨 일가 사람이라는 게 밝혀지면 온갖 경기를 부릴 집안 사람들 입장을 생각하면 더욱 더.

"아니, 어쩌면 은혜를 팔 수도 있었겠습니다?"

"네?"

"선생님이 지희를 떠나자 곧바로 지희가 일탈을 시작했으니까요."

즉, 지희를 가르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

집안 사람들에게 그리 어필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적어도 지희를 데리고 유산 싸움에 참가할 생각이라면, 무엇보다 강력한 명분이 되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슬쩍 류인형의 언동을 살핀다.

방금 전, 내가 내민 추측은 나 스스로도 나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추측이다.

것보다, 당장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겠지.

그렇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 미진한 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B+랭크 헌터라는 평을 듣고 있는 류인형이 몰락한 집안의 유산 따위에 탐을 낼까 하는 점 등.

때문에, 나는 류인형이 남매들 중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지희와 접촉하려 든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으레 있는 기업 내 지분 다툼처럼, 류인형이 누군가를 밀기로 했다는 식이다.

물론 진즉에 몰락한 류 씨 일가가 지분 다툼을 벌인다 해도 우스울 뿐이긴 했지만…….

"다, 당황스럽군요."

정작 류인형의 반응은 영 미묘했다.

확실히 본인의 말대로였다.

당황한 듯한 반응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반응은 자신의 속내를 들켰다기보단…….

'진짜로 당황했군.'

마치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소재가 나와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정말로.

젠장, 잘못 찍었나?!

만약 그렇다면 쪽도 이런 개쪽이 없다.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주절거리긴 했지만, 방금 전 내가 한 말은 평범하게 무례한 발언 뿐이니까.

단지.

그런 점을 감안해도, 류인형의 반응은 다소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마치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화두가 나왔다는 듯 당황한 모습.

확실히 저 모습만 보면 내가 실수한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말이 되나?'

아니, 자기가 한 행동이 있는데 지금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만약 다른 목적이 있다 해도, 지금 내 추궁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의문이다.

당장 나부터가 10분도 안 걸려서 생각한 거니까.

그런데도 여기에 대답 하나 못 하는 모습.

솔직히 말하자면, 여유롭게 자신의 목적을 밝히고 내 오판을 정정하며 협력을 요구하는 모습은 생각했어도 이런 모습은 생각하지 못했다.

뭐지?

나도 모르게 그리 생각할 정도로.

"으음, 어째 지희가 늦는군요. 조금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당황한 기색 역력한 채, 그리 말하며 엉덩이를 떼고 일어서는 류인형.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자리를 뜨긴 했지만, 정말로 지희를 찾으러 갔을 리는 없겠지.

실제로도 그러했다.

찰칵 소리와 함께 류인형이 거실을 떠나길 잠시.

방금 전까지 음료수를 준비하는 척 자리를 비우고 있던 지희가 뒤늦게 따라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땠어요? 화장실 가는 것 같던데."

"글쎄, 모르겠다."

짐짓 양손을 드는 제스처를 취한다.

확실히,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준비한 플랜 A.

류인형이 집안의 가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가설은 아무래도 실패했던 모양이다.

"역시 그렇죠?"

흐흥, 자신만만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지희.

그 모습이 보기 괘씸해 자신도 모르게 골려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억누르고 반문한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냐?"

까놓고 말해, 내 플랜이 실패한 시점에서 남은 수단은 얼추 두어 개.

개중에서도 '일단 다 때려부수고 생각한다'는 플랜 C보다 우선할 수 있는 건 바로 지희가 제출한 플랜 B다.

즉.

"뭘 그렇게 걱정하고 그러세요?"

지희가 몽마로서의 능력을 사용해 류인형의 속셈을 캐낸다는 계획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로서는 영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류 씨 일가를 뒤집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지희는 처음부터 류인형이 집안의 돈에 눈독을 들이진 않을 거라 추측했고, 때문에 이런 두 번째 계획을 제출했다.

어느 정도 헌터로서 수익을 올린 지희는 알고 있었다.

류인형이 헌터로서 이름을 올린 건 족히 10년 전 이야기.

그야 돈이 있으면 일단 쓸 데가 없지는 않겠지만, 굳이 집안에 남은 돈을 탐낼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 이 상황은 내게는 예상 외였지만 지희에게는 어디까지나 예상 그대로였던 셈이다.

단지.

"선생님도 이런 일 있을 때마다 매번 직접 몸으로 뛰시면서."

"아니, 나랑 네가 같냐?"

"왜요? 뭐가 다른데요?"

마치 놀리듯 그렇게 말하는 지희.

아니,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키 180cm 넘는 떡대랑 여고생이면 그야 보통 후자를 걱정하지……."

"뭐, 저라도 선생님이랑 미소녀 여고생이 있으면 후자를 걱정하겠지만요."

"그래. 그러니 보통 여고생보다도 더 걱정된다."

"엇."

역으로 말문이 막힌 듯, 이번에는 진짜로 귀를 붉히는 지희.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최면이나 암시 따위로 류인형의 속내를 알아내겠다는 정도라면 나도 말은 하지 않겠지.

그렇지만, 상대는 B+랭크 헌터.

미래야 어쨌든, 지금은 지희보다 강한 상대다.

때문에 지희의 방책이라는 녀석도 자연스레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으니.

"조심해라."

"넹."

나로서도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지희는 태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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