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각자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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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대로 말하자면, 류인형에게 있어 과거의 영광이라는 건 단순한 뜬구름 잡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여하간, 제 1차 대침공 발생 당시 류인형은 고작해야 한 살이었으니까.
대침공 이전의 영광 운운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제대로 된 감상이 있을 리도 없다.
덕분에 류인형은 류 씨 일가 내에선 다소 겉도는 입장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나이만 봐도 그렇고.
남매라기보다는 조카들에게 가까운 연령대.
늦둥이 중에서도 늦둥이인 그는 도저히 남매들 사이에서 공유되던 관념에 대해 공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이 정도면 살만한 거 아닌가?'
대침공 이전의 사회를 모르던 그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침공 이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우리들은 더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그의 손윗남매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류 씨 집안은 꽤나 유복한 편이었다.
적어도 몬스터에게 주거지를 잃어 내일 당장 먹을 끼니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 시점에서 충분히 괜찮은 편이라는 사실은 류인형 또한 인식하고 있었다.
집안이 무너진 건 안타깝지만, 애초에 집안은커녕 목숨마저 잃은 기업들 또한 여럿 있지 않았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어느 정도 가산을 보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들 집안은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류인형 또한 그런 말을 면전에서 내뱉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여하간, 대침공 이전 시절을 모르는 자신과 달리 가족들은 갑자기 길가에 나앉은 판국이다.
그야 적응하기 힘들 수밖에 없겠지.
사람 심리라는 게 다 그렇다.
애시당초 주변 사람들보단 처지가 나은 편이니 불평하지 말라고 해도 곤란할 뿐이겠지.
무엇보다, 그는 류 씨 일가에서 유일한 헌터였다.
차라리 할아버지에 가까운 연배인 부친이나 형제들 또한 헌터로 각성하지 못했던 탓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느끼고 있는 여유는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헌터라는 자신감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집안이 망해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오히려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 대침공 이후의 시대를 한층 더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뭐, 그런 점도 어디까지나 성인이 되기 이전 이야기.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언제나 참으로 훌륭한 오빠였고 형님이었다고 칭찬하던 가문의 후계자.
다시 말해, 큰형님이 서큐버스를 난민 캠프의 우두머리로만들고자 봉기한 끝에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 이야기였지만.
대침공 발생 당시 헤어졌다는 큰형님의 우스꽝스러운 죽음에, 류인형은 도저히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요컨대 몽마랑 질펀하게 빠구리 뜨다 맛이 가서 뒈져버렸다는 소리 아닌가.
적어도 다른 가족들처럼 안타까운 이별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형제들은 그런 류인형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았다.
필시 큰형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고 지레짐작했던 탓이다.
물론 류인형으로서는 미묘한 감상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야 평범한 사람이 몽마의 유혹을 저항하는 건 극히 힘들겠지.
하물며 본래는 부족함 없이 살고 있던 류 씨 일가의 장자가 한 순간에 사회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셈이다.
저런 상황이라면 비단 큰형님이 아니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역시 당사자로서는 미묘한 감상을 느낄 수밖에.
적어도 다른 가족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몬스터들을 유인했다는 장남의 최후라기엔 너무나도 비참했다.
류인형이 류 씨 일가에 가지고 있던 환상이 모조리 박살날 정도로.
그 이후, 류인형은 류 씨 일가의 집착에 대해 별다른 평을 남기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와서 자신이 무어라 말을 한들 들을 양반들도 아니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길도 요원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망 없는 이야기라면, 적어도 원하는 만큼 한탄할 수 있게 해 주자.
류인형의 태도를 설명하자면 딱 그 정도였다.
그런 태도는 류지희와 관련된 일에서도 빛을 발했다.
류지희.
실제로는 터울 있는 여동생에 가까운 조카.
동시에, 방금 전까지 이야기했던 큰형님의 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존재는 류 씨 일가 사람들에게 있어선 숫제 호수에 던진 돌이나 다름없었다.
집안 사람들에게 있어, 형님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부친에게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
형제자매들에게는 뛰어난 맏형.
말하자면, 류지희의 아버지는 과거 류 씨 집안이 잃어버린 영광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비록 류인형이 보기엔 몽마에게 빠져 정신이 나간 형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덕분에 류 씨 일가는 류지희에게 적극적으로 접촉하려 했다.
문제는 류 씨 일가가 몬스터를 매우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
그들이 그토록 노래하는 옛 영광.
대침공 이전의 영화를 무너뜨린 건 제 1차 대침공으로 대표되는 몬스터들의 습격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몬스터를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면, 바로 류지희의 모친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몬스터를 유인하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었던 류 씨 일가의 장자.
그런 그를 거둔 건 당시 난민 캠프를 이끌고 있던 남상원과 후일 그와 아이를 낳을 몽마였다.
그런 상황에 처한 만큼, 사내가 몽마에게 흠뻑 빠진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몬스터를 싫어하고 류 씨 일가의 장남을 추종하던 가족들은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듯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취한 태도는 한없이 어중간했다.
맏형이 남긴 아이를 데려와 키우자.
허나, 몬스터는 싫다.
하물며 맏형이 몬스터와 함께 뒹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덕분에 그들은 맏형이 낳은 아이 앞에서도 혼혈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몬스터는 싫고, 장남이 몽마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 맏형이 낳은 아이도 인간처럼 키우자.
바야흐로 인지부조화였다.
설령 몽마의 피가 섞였다 한들 너 또한 우리 류 씨 일가의 가족이라 말해주었다면 눈물 나오는 미담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류 씨 일가가 선택한 건 지희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었다.
혼혈들 사이에서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은 어쩌다가 태어나게 된 건지 고민하고 있던 지희.
그런 아이 앞에서 너는 인간이고 혼혈 따위가 아니라고 해 봐야 반발을 살 뿐이겠지.
하다못해 혼인회 측에서 부모에 대한 설명이라도 해 두었다면 조금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난민 캠프를 박살낸 몽마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희가 번민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류 씨 일가의 설명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몽마의 딸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식으로.
그러나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운 지희의 모친 탓에 당시 혼인회는 지희에게 부모의 정체를 설명하지 않았다.
덕분에, 류 씨 일가와 혼인회는 완전히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이가 혼혈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폭언을 퍼부었으니 당연한 결말이었다.
류 씨 일가는 그 이후로도 혼인회를 탓했다.
만약 혼인회가 지희에게 제대로 설명만 해 두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으리라 비난했다는 뜻이다.
물론 류인형이 생각하기엔 당시까지 지희를 맡아 키우고 있던 혼인회의 정체성을 부정한 시점에서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시작된 만남이니만큼, 류인형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의 거수기이자 스피커.
동시에, 헌터로서 자신의 실력에 벽을 느끼고 있던 류인형은 곧 집안의 제안을 혼인회에 전하는 파발꾼 역할을 맡게 되었다.
덕분에 지희를 설득하기 위한 가정교사 역할 또한 안정적으로 점거할 수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설득에 별다른 열의도 없었고, 성공할 만한 여지도 없다.
심지어 당시 지희의 나이는 중학생.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일 때이니.
류인형이 설득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지희는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동시에 집안과 완전히 절연을 선택했다.
실로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시금 집안으로 귀환한 류인형은 이윽고 자신을 성토하는 남매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무시.
두 번 다시 지희와 만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스스로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런 류인형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부친이 드러누웠다는 점이다.
자신이 그토록 믿고 있던 장자.
자그마치 20년 전에 헤어진 장남의 핏줄이 그들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직면한 부친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류인형은 지희와 그나마 연분이 있는 처지로서 연락을 끊고 잠적한 지희의 행방을 찾아 헤맸다.
적어도 제 할아버지 장례식에 올 거냐고 묻긴 해야지 싶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류인형에게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사이에 낀 처지에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을 뿐.
단지.
"그런 삶이 불만스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불쾌하지 않나? 자신을 전서구처럼 생각하는 남매들이."
"짜증나지 않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을 떠는 조카가."
"실증나지 않나?언제까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부모의 모습이."
"역겹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미 죽고 사라진 장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그런 만남 끝에, 류인형은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두 눈이 확 하고 뜨이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자신이 그런 점을 놓치고 있었다니!
말이 안 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
놀랍게도, 자신에게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즉, 자신이 가족들 전원을 때려죽여도 누구 하나 무어라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세, 만세!
공기가 상쾌했다. 즐거운 기분이 샘솟았다.
무어라 하기 힘든 충족감 끝에, 류인형은 자신의 치밀한 계획에 감탄하고 말았다.
전설 속 명탐정들이 살아와도 도저히 알아맞출 수 없을 어마무시하고 치밀한 전략이었다.
그렇기에.
류인형은 그런 스스로의 이상함을 자각하지조차 못한 채, 흐뭇한 기분으로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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