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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207화 (207/371)

〈 207화 〉 각자의 사정

* * *

"끄응."

그 뒤.

평소운 박사가 머무르는 세이프하우스를 등지고 귀환한 뒤로도 변변한 소득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류인형을 알고 있을 예은이나 정필연, 심지어 남상원의 조언까지 구했거늘.

덕분에 류인형이 어떤 양반인지 속속들이 알 수 있었던 걸 성과로 삼아야 할까.

류인형.

나이는 25세로, 제 1차 대침공이 발발하기 딱 1년 전에 태어났다.

덕분에 대침공 당시 능력을 각성했고, 이후 있었던 제 2차 대침공 당시에도 어찌저찌 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듯하다.

류 씨 일가의 세력이 기운 이후에는 이러한 능력을 살려 헌터로서 활약하기도 했고.

헌터 협회에서 부가한 랭크는 B+.

어지간한 B랭크 몬스터들이라면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고, 기본기를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A랭크에 준한다는 평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류인형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의 평가 또한 대체로 비슷했으니까.

특출난 점은 없지만, 알기 쉽다.

이러한 장점을 활용해 류인형은 수많은 학생들을 동시에 가르쳤다고 한다.

언뜻 보자면 나랑 비슷한 스타일이다.

실상은 정 반대겠지만.

나는 학생들의 기본기를 중시한다.

류인형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술을 가르친다.

학생들의 전반적인 능력 향상을 중시하는 나.

그렇게 어렵지 않은 테크닉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류인형.

어느 쪽이 더 우수한 방법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었다.

아니, 당사자인 나는 그야 내 방법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기분이긴 한데.

굳이 따지자면 류인형의 방법은 사냥꾼이 아니라 군인을 만드는 데에 적합한 방식이 아닐까.

다수의 무경험자를 싸울 수 있는 인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방법이다.

뭐, 어느 쪽이든 류인형으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일 테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류인형에게 있어 가정교사 노릇은 단순한 수단.

지희와 접촉하기 위한 창구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남상원은 그렇게 판단한 모양이다.

일찍이 혼인회와 거의 결딴이 난 류 씨 일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상원을 비롯한 혼인회는 류인형을 필두로 한 류 씨 집안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대다수 혼인회 인원들은 지희가 일반적인 헌터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헌터로서의 기술을 알려주겠다며 접근한 류인형을 쫓아내진 못했다.

물론 류 씨 일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그러나.

"난생 처음 보는 헌터에게 지희를 맡길 생각이십니까?"

류인형의 그 말은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지희는 혼혈이다.

그리고 혼혈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는 농담으로도 좋은 편이 아니다.

만에 하나 류인형 대신 부른 헌터가 지희의 정체를 눈치채기라도 하면?

하물며 그 헌터가 지희의 정체에 대해 함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그 헌터를 중심으로 지희의 정체가 유포될 확률이 높겠지.

허면, 앞으로 있을 지희의 인생도 내리막길에 접어들 수밖에 없다.

남상원으로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류인형은 지희의 가정교사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비록 류 씨 일가 사람이라고는 하나, 그런 만큼 더더욱 지희의 정체가 드러날 만한 상황에 대해선 주의를 기울일 테니까.

무엇보다, 당사자의 태도 또한 나쁘지 않았고.

류 씨 일가 중에서도 막내인 류인형에게는 사실 별다른 발언권도 없었다.

연배로 따져도 오히려 지희 또래에 가까웠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덕분에 류인형은 혼인회 사이에서도 그리 평판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류 씨 집안 중에서는 그나마 낫다는 수준이었지만.

게다가 그조차 류인형이 집안의 전서구 역할에만 충실했던 덕분이었으니.

혼인회와 류 씨 일가 사이에 패인 감정의 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당시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던 지희는 스피커 역할에 충실한 류인형조차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 불만이 폭발한 게 바로 중학교 졸업식 당시.

대침공 이전과 달리, 중학교 졸업식은 영 한산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대다수가 냉혹한 현실 앞에 내던져진 탓이다.

실제로 지희 또한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사회의 최전선에 뛰어들었을 테지.

적어도 고등학교에 발을 들이는 일 따위는 없었으리라.

그리고 류 씨 일가 또한 그런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즉,류 씨 일가는 지희의 졸업을 틈타 그녀를 본가로 데려갈 생각이었던 셈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희는 그런 류 씨 집안의 태도에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희가 자신의 정체를 들킬 위험까지 감수하며 헌터 아카데미에 발을 들인 데에는 그런 이유 또한 없진 않겠지.

당시 집안의 주구 역할을 맡던 류인형과 소원해진 계기 또한 거기에 있을 테고.

"흐음."

짧은 콧소리와 함께 상황을 점검한다.

일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류인형의 이번 행동은 유달리 눈에 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언가 이상하다.

며칠 전 나와 마주쳤던 류인형은 적어도 단순한 주구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적극적이었으니까.

허면.

고작해야 이십대 중반,평생을 집안의 거수기 역할로 살았던 막내가 이제 와서 그런 수작을 부리려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막말로 무슨 드라마 속 주인공도 아니고.

여태까지 줄곧 타인의 스피커 노릇이나 하던 막내가 돌연 들고 일어나려면 적어도 몇 가지 계기는 필요한 법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소년이었던 사내가 줄곧 면종복배하고 있었던 건 아닐 테고.

'류인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거기까지 조사하려면 나 또한 다소 신중할 수밖에 없다.

집안 사정.

그렇게 말하면 나로서도 할 말이 없으니까.

즉, 이 이상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이야기.

다른 사람의 가정사에 개입하려면 나도 걸음을 깊게 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부분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가요?"

허나, 정작 하연이는 그런 내 고민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했다.

좁디 좁은 단칸방.

그 안에서 끙끙 앓던 나를 위해 마실 물을 따르는 하연이의 태도란 참으로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틀림없이 곧바로 행동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으음."

"오빠가 이런 일로 망설이는 타입은 아니니까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무슨 일 있으세요?"

"섣불리 끼어들기 힘든 상황이거든."

"어머?"

"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 그래?"

"네. 그런 일로 고민하실 분도 아니시잖아요?"

이거 나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당황한 시선을 향하자, 하연이는 샐쭉 하고 웃음을 지었다.

분홍빛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는 모습이 유달리 눈에 밟혔다.

요 근래 무의식적으로 하연이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던 탓이다.

비록 내가 눈치 없다는 평가를 듣는 건 사실이었지만, 나도 눈 뜬 봉사는 아니다.

서아를 시작으로 예은이나 윤하까지 심상찮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지금.

하연이가 종종 치는 장난이정말로 별다른 마음 하나 없이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점은 나 또한 알 수 있었다.

물론 당혹스러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뜻 모를 호의.

줄곧 몬스터를 사냥할 생각 뿐이었던 내게 그 눈빛 너머로 깃든 감정은 썩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연이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나로서도 시선을 향할 따름이었다.

"그런 일로 고민하실 분은 아니라니, 도대체 내가 평소엔 어떻게 보였길래?"

"적어도 끼어들기 힘든 상황인지 아닌지를 고려하진 않으셨죠."

"윽."

확실히.

아무래도 이번엔 한 방 먹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자, 하연이는 거기에 뒤이어 한 마디 더 첨언했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느냐 하는 점보단 내키는 일인지 아닌지를 고민하셨다고 생각해요."

"도대체 누구야, 그 초탈한 양반은."

투덜거리는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눈웃음을 치는 하연이.

숫제 부루퉁한 동생을 달래는 듯한 시선에다소 멋쩍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킨다, 라.'

묘한 표현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몬스터와 관련된 일에 내가 유달리 적극적이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그렇다면,반대로 다른 일들은 어땠을까?

이런 사정이 있으면 안 된다, 저런 사정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앞뒤 재며 달려들진 않았던 기분이 든다.

오히려 그 날 그 때 내키는 기분으로 행동했던 느낌.

아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만큼 도리어 뒤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던 점도 없잖아 있겠지만.

허면, 지금은 어떠한가?

선생 노릇. 담임 노릇. 선배 노릇. 사냥꾼 노릇.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한 일이었으나, 이래저래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생긴 건 사실이다.

예은이는 훌륭한 사냥꾼이 될 수 있을까?

서아는 언제 이렇게 큰 걸까.

윤하는 이래저래 앞날이 걱정되기도 하고.

티아마트도 조금은 마음에 걸렸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난 다음에야,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과연.

그제서야 조금은 납득이 갔다.

확실히 나는 막되먹은 자식이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단순히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3년 내내 손을 놓고 있었던 적도 있으니 오죽할까.

다만.

그런 나조차 요 최근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형님으로부터 무심한 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허면, 반대로 생각해 보자.

만약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야 좋답시고 엄청나게 날뛰었겠지.

동네방네 사방팔방 자랑했을 거다.

확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름 모를 누군가였다면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 마름을 거절했으리라.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나는 누군가와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 만한 성격이 못 되니까.

다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제대로 된 대답 하나 내놓지 못한 시점에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하연이의 표현에 따르면, 그녀들의 마음을 대충 거절하는 게 영 내키질 않았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내심 나쁘지 않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슬쩍, 하연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온화하게 미소짓고 있는선분홍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 모습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연아."

"네?"

"너는 나한테 할 말 없니?"

"글쎄요, 그렇게 물으시면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하듯 대답을 주저하던 하연이는 곧 마저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아요. 지금은."

"……그래?"

"네. 오빠가 받아들여주시지도 않을 테고. 무엇보다, 제가 납득할 수 없거든요."

"납득이라."

"저는 결국 오빠한테 신세만 지고 있을 뿐이잖아요?"

그러니 말하진 않겠다.

대신, 하연이는 그렇게 말하며 서두를 떼었다.

"그 때까지 옆에 있는 건 괜찮을까요?"

달리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로서도 조심스레 어깨를 좁힐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네."

"그렇죠?"

"추천할 수는 없겠지만."

"괜찮아요. 제가 선택한 길이거든요."

쿡쿡 하고 짤막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하연이.

덕분에 나 또한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방금 전엔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긴 했지만,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지희와 접촉하기 위해 가정교사 노릇을 자처했던 류인형.

그리고 몬스터를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직에 몸을 담은 나.

지희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와 류인형 사이에 그리 큰 차이는 없으리라.

다만.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다르다.

과연 예은이는 훌륭한 사냥꾼이 될 수 있을까.

서아는 또 언제 이렇게 큰 건지.

윤하는 이래저래 앞날이 걱정되기도 하고, 티아마트도 조금은 마음에 걸린다.

하연이도 마찬가지.

허면, 지희는 어떨까.

'하긴.'

시시콜콜하게 견적이나 재고 있는 건 내 성미에도 안 맞지.

그러니.

"어, 지희야?"

수화기 너머.

나는 지희를 향해 연락을 넣었다.

며칠 전과 같은 망설임은 더 이상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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