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명분론
* * *
"류 씨인가요? 글쎄, 들어본 적은 없네요."
그리고.
눈 앞의 연구자는 내 얼마 되지 않는 희망을 일언지하에 잘라 부정했다.
실화냐.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최소한의 연관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응? 어째서?"
"아니, 그야……."
그렇지 않은가.
신세계 질서 놈들이 경거망동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건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저번 학기, 놈들은 지희를 회유하기 위해 언론전을 펼쳤다.
아니, 회유라고 해도 목적은 지희를 몽마로 전락시키는 데에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류 씨 일가와 신세계 질서 사이의 연관점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류 씨 집안도 옛날엔 그럭저럭 명가였다고 하니.
신세계 질서 측에서도 손을 뻗을 만한 가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류 씨 집안은 혼혈도 부정하고 있다면서요?"
"끄응."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신세계 질서가 관심을 두었던 건 몽마의 딸인 류지희.
류 씨 집안의 손녀인 류지희가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류 씨 일가만 해도 그렇다.
애초에 류 씨 집안이 지희가 혼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려 드는 건 근본적으로 몬스터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상당한 수의 고랭크 몬스터가 참여하고 있는 신세계 질서를 상대로 협력할 리가 없지.
당연한 일이었다.
허면, 최승준은 어째서 류인형을 내버려두고 있는 걸까?
스스로의 오산을 인정하자 조금 의아한 부분이 생겼다.
물론 눈 앞의 연구자는 그런 의문 또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풀이했다.
"미끼 작전이겠죠."
"미끼라고?"
"네. 말마따나, 얼핏 보면 꽤 먹음직스럽긴 하잖아요?"
일찍이 신세계 질서 측에 몸을 담고 있던 몽마의 여왕.
거기에, 마찬가지로 여왕의 딸을 노리고 있는 류인형.
방금 전 스스로 말했듯이, 슬쩍 훑어보기만 하면 꽤 그럴듯한 조합이다.
필시 최승준 또한 같은 생각이었겠지.
류인형을 미끼로 내민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신세계 질서를 유인할 미끼.
새해를 맞아 다시 한 번 문을 열 아카데미 교직원들 사이에서 류인형이 맡을 역할은 딱 그 정도다.
어차피 따로 속셈을 가지고 교직에 발을 들인 녀석이니, 미끼 역할을 맡겨도 켕길 이유 하나 없고.
애시당초 나와 함께 교직 자리에 두기도 어려운 인선 아닌가.
무엇보다, 작금의 신세계 질서는 쉽게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
놈들의 여력을 빼려면 따로 미끼를 내밀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류인형은 미끼로서 참으로 탁월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여하간, 본디 신세계 질서가 사용하던 정보망…….
다시 말해, 최승준의 사촌들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문영석 박사와 접촉할 당시 알게 된 최승준 그룹 쪽 끄나풀들.
사전에 그 영향력을 발견한 덕분에 삭초제근할 수는 있었지만, 신세계 질서 측은 저들을 참으로 알뜰살뜰하게 써먹었다.
초대형 게이트 발생 직후.
최승준의 이름으로 열었던 파티 당시, 메인 홀에 마신을 난입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수단이 바로 그네들의 이름이었으니까.
놈들로서는 나름 최선의 수를 둔 셈이었지만, 최선의 수를 반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실제로 당시 사용했던 끄나풀들은 물론, 단단히 화가 난 최승준의 손에 기타 협력자들도 발본색원당한 판국이니.
심지어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마신마저 내 손에 목숨을 잃었다.
저 쪽으로서는 기껏 남은 수단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 하나 거두지 못한 상황.
헌데, 그런 녀석들 앞에 나름의 접점도 있는 아카데미 교사 출신 헌터가 나타난다?
모르긴 몰라도, 신세계 질서에 속한 이들 중 최소 몇 명은 접촉을 시도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 뒤로는 실로 간단한 이야기.
무심코 엉덩이를 들썩인 신세계 질서 측 인사들을 일거에 소탕한다.
이 쪽으로서는 따로 공격당할 여지도 줄이고, 저 쪽의 여력도 줄일 수 있는 일석이조의 계책인 셈이다.
하물며, 우리들 모르게 류인형이 신세계 질서 측과 접촉하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마찬가지.
애시당초 최승준으로서는 진즉부터 예상하고 있던 수단이다.
당사자인 류인형이 최승준의 손아귀 안에 있는 한 충분히 대처할 수 있겠지.
최승준 또한 자연스럽게 장기전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하긴, 당장 우리들로서도 신세계 질서를 공격할 만한 수단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뭐, 어느 쪽이든 더 이상 조직 측에서 촉매……."
"자하연."
"……자하연 양 주변인을 노릴 이유는 없을 거에요."
"왜?"
"제가 없으니까요."
퍽 자신만만한 얼굴로, 평소운 박사는 그렇게 말했다.
포로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예의 비밀 연구소 진압 작전 당시, 내게 패배해 붙잡힌 평소운 박사.
나의 적극적인 참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준구와 최승준은 이 여자를 단순 구금하는 데에 그쳤다.
최승준이야 둘째로 쳐도, 이준구까지 그럴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어쨌든.
덕분에 나로서는 평소운 박사가 구금된 세이프하우스의 위치를 들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눈이 뒤집힌 내가 난동이라도 부렸다간 영 곤란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로서도 쉬이 부정할 수 없는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요 최근 사정이 바뀌었다.
사실상 접촉 금지나 다름없던 평소운 박사를 상대로 이렇게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었다.
즉, 평소운 박사가 우리 설득에 넘어왔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당연히 환영할 일이었다.
여하간, 우리 쪽에 협력하기로 약속한 시점에서 평소운 박사의 머리를 따버릴 필요도 없고.
문제는 평소운 박사가 협력을 약속한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었다는 점이었다.
아니, 왜?
나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평소운 박사는 태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물론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저번 교전 이후, 평소운 박사는 나를 자신 이상의 마법사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퍽 달갑잖은 오해였다.
까놓고 말해, 평소운 박사의 마법에 유달리 허점이 많은 건 사실이다.
전선에 서는 부류가 아니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리고 나는 그런 평소운 박사를 상대로도 마법전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당시 내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평소운 박사가 주변에 몬스터를 풀었던 탓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다만, 사정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누가 평소운 박사의 마법을 보고 그 허술함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평소운 박사는 그런 데에 시간을 낭비할 만큼 한가한 인재도 아니거니와,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위인도 아니었다.
천재라는 인종이 다 그렇지만.
그런 평소운 박사에게 있어, 그녀의 마법 대다수를 정면에서 파훼한 나는 거의 유일하게 그 말을 경청할 가치 있는 마법사인 셈이었다.
뭐, 그야 그렇겠지.
평소운 박사의 마법이 허술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걸 단순한 마력 간섭만으로 파훼한다는 건 통상적으로 말도 안 되는 기예다.
상대가 사용한 마법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최적의 수를 두어야 한다는 소리니까.
사용자 이상으로 마법에 해박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한 묘기다.
물론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능력에 의존한 곡예일 따름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지금 때 아닌 마법 첨삭에 협력하고 있었다.
평소운 박사의 협력 조건이 거기에 있었던 탓이다.
다행스럽게도, 마법적인 지식이나 발상력이야 어쨌든 마력의 미세 조정에 있어선 내가 평소운 박사보다 낫다.
아니, 세상에서 나보다 뛰어난 마력 조작 능력자는 없겠지.
요컨대, 때 아닌 대마법사 행세도 어느 정도는 손이 닿았다는 뜻이다.
지금만 해도 그랬고.
평소운 박사가 제출한 마법의 원리를 적당히 첨삭한다.
그러자 평소운 박사는 마치 전율하듯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징그럽게시리.'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 나는 온갖 마법의 원리조차 그 자리에서 해명하는 대마법사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아니, 이 근육으로 마법사는 무리겠지만.
"네가 없으니까, 라."
"네. 저는 천재니까요."
도저히 익숙해지기 힘든 말투로, 평소운 박사는 평소처럼 스스로의 실력을 어필했다.
밑바탕에 깔린 자신감이야 어쨌든, 습격 당시 나를 향해 온갖 욕지거리를 퍼붓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고.
평소운 박사를 포함한 대다수 조직원들에겐 모종의 금제가 존재한다.
조직 내부의 정보를 발설하면 그 즉시 목숨을 앗아가는 저주.
몽마의 여왕조차 거부할 수 없었던 마법적인 계약이다.
허나.
지금 평소운 박사가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선 예의 금제도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류 씨 일가에 관련된 부분은 어디까지나 평소운 박사 개인의 소평일 뿐이니까.
애초에 신세계 질서 녀석들이 노리는 건 어디까지나 하연이의 신병.
부차적으로 하연이를 보호하고 있는 내 목숨 정도다.
신세계 질서 측에서 순수하게 다른 학생들을 노리고 일을 저지른 건 딱 두 번.
첫 번째는 초대형 게이트 발생 당시 예은이를 촉매로 삼아 소환 의식을 벌였을 당시.
두 번째는 피아의 전력 격차를 벌리기 위해 지희를 몽마로 전락시키고자 했을 때.
그리고 어느 쪽이든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 못한 지금.
녀석들은 다시금 하연이를 노리는 쪽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이 바로 평소운 박사의 설명이었다.
꽤나 합당한 추론이었다.
지희를 몽마로 타락시킬 수 있을 만한 수단.
다시 말해, 여왕급 몽마의 마력은 지희가 이미 삼켰다.
예은이를 하연이 대신 촉매로 사용한다는 발상은 어디까지나 평소운 박사 개인의 아이디어.
게다가, 그조차 미완성인 지금.
"그 연구를 완성할 수 있을 만한 인재는 단 한 명, 제 후배인 문영석 박사 뿐입니다."
미안한데, 그 후배가 당신을 팔았는뎁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뭐,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번 사건에 신세계 질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희에게 있어선 실로 다행일 그 사실이, 지금 내게 있어선 마치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그런가.'
신세계 질서의 간섭은 없다.
최승준에게도 계획이 있다.
당장 류인형이 따로 일을 낼 분위기도 아니다.
심지어 대다수 사안은 어디까지나 가족사.
일개 담임교사가 끼어들 수 있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고.
몬스터랑 관련된 일도 아니었으니까.
즉, 내게 남은 이유는 단 하나.
지희가 류인형을 싫어했다는 점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달빛 내리쬐던 밤의 공원 아래에서, 지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던 건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런 이유를 빌미로 발을 들이기도 힘들었다.
"씁."
"왜 그러시나요?"
"아니, 학생들이랑 거리감 잡기가 힘드네."
"응? 거리감?"
"그래. 거리감. 아, 그러고 보니 댁도 교수 아니었나? 비슷한 일 없었어?"
"글쎄요? 학생들 전원한테 F를 먹이니 거리가 멀어진 적은 있었는데."
"F는 또 뭐야. 랭크?"
"학점이죠."
"……아니, 잠깐. 그런 거 말고, 조금 더 개인적인 사연은 없나?"
"저는 독신입니다만."
다소 날카로워진 말투로 답하는 평소운 박사.
심지어 지금은 지혜를 빌릴 수 있는 브레인도 이 모양 이 꼴이니, 나로서도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법으로 유지하고 있는 외모야 어쨌든, 나이 앞자리 수만 해도 내 두 배는 될 양반이 저러고 자빠졌으니.
정작 정말로 필요할 땐 도움이 안 된다고 탄식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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