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명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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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대침공 전까지만 해도 류 씨는 그럭저럭 이름 높은 집안이었지."
내 예상과는 달리, 최승준은 무엇 하나 숨기는 기색 없이 자세한 사정을 토로했다.
녀석의 말에 의하면, 대침공 전까지만 해도 류 씨 집안은 정계나 재계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던 양반들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문어발이었다는 뜻이다.
처음 기업을 일으킨 양반의 뒤를 이어 건설사에도 뛰어들고 요식업계에도 뛰어드는 게 이 나라 전통이라지만…….
개중에서도 류 씨는 정계에 진출하려 한 쪽이었다는 뜻이다.
덕분에 순수한 재벌로서의 역량과는 별개로 발이 넓은 건 대한민국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편이었다던가.
뭐, 그런 류씨조차 무지성 게이트 발생 앞에 무릎 꿇은 건 마찬가지.
정재계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류 씨 일가도, 현실에서 막대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몬스터의 힘 앞에선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일가는 쪼개졌고, 산하 그룹은 완전히 도산한 상황.
대한민국 기업 문화가 결국 혈연으로 연결되는 게 대부분이라 해도, 이상하리만치 핏줄에 집착하는 모습엔 그런 사정이 있겠지.
몬스터나 혼혈에 대한 거부감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회고주의.
대침공 당시 잃어버린 영광을 좇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며칠 전 내 앞에 나타난 류인형의 행동은 무언가 수상쩍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 내 의문에 대해, 최승준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후계 구도 때문이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침공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산하의 모든 기업이 일시에 폭삭 주저앉은 건 아니었으리라.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재벌 운운할 수준이 아닐 뿐 어느 정도 부유하게 살 재산 정도야 남았을 테고.
류인형 그 친구의 태도나 옷차림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있어, 앞날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권리엔 사람의 생명이 오갈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저 쪽 늙은이가 오늘내일한다는 소식이야 들었지."
즉, 류인형이 이제 와서 지희와 접촉하려 드는 이유는 단 하나.
지희의 후견인이라는 자리를 굳히기 위해서다.
듣자 하니 저 쪽 영감님도 지희를 꽤나 아꼈던 모양이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희네 부친을 아꼈던 거겠지만.
"아니, 그런 걸 알면서도 교사 자리에 그 양반을 앉혔다고?"
"실력은 있으니까."
내 반문에 대해 최승준은 그저 담담한 태도로 그렇게 고할 뿐이었다.
확실히 실력이야 있겠지.
얼마 전, 류인형은 내게 그리 말했다.
자신이 지희를 가르칠 당시에 비하면 퍽 온순한 모습이라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혼인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겪은 나로서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왜냐하면 류인형은 중학생 시절 지희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헌터 업계에는 아직 제대로 된 교습법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헌터 교육학 따위를 정립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가열찬 시대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카데미가 문을 열기 전까지 헌터들 사이에 전수되던 지식은 단순한 주먹구구식.
게다가 그조차도 인맥이나 혈연 등을 통해 공유되는 게 고작이었으니.
다시 말해, 헌터 지망생들의 가정교사 따위 자연스레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얼굴일 수밖에 없었다.
류인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 친구, 지희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이름이다 싶었는데.'
예은이가 아직 이준구 특유의 전법을 고수하고 있던 당시.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에 딴지를 걸었다가 해고당한 헌터들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확실히 유능한 인재다.
비록 예은이의 지랄맞은 고집 때문에 짤리긴 했지만, 그 지적에 틀린 점은 없었고.
적어도 교사로서의 실력은 이미 증명된 셈이나 다름없다.
거기에, 중학교 시절부터 지희와 예은이를 포함한 학생들 사이에 실력 나누기가 성행했다는 점.
나아가서는 그런 '중학교 시절 성적표'를 대다수 학생들이 숙지하고 있던 시점에서 짐작할 수 있는 시점이다.
필시 상당한 수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겠지.
예를 들면 정필연이라던가.
하물며, 몽마 혼혈인 지희가 마치 그림자 조작 능력을 가진 헌터처럼 위장할 수 있었던 건 십중팔구 류인형의 교육 덕분일 테고.
뻔한 이야기다.
지금 류 씨 집안 사람들이 보이는 작태로 볼 때, 지희의 가정교사로 다른 헌터가 붙는 일 따위는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지희가 혼혈이라는 사실도, 지희의 부친이 몽마와 뒹굴었다는 사실도 모조리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니.
당연히 다른 헌터가 지희의 정체를 눈치챌 여지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겠지.
어쩌면 류인형이 때 아닌 가정교사 노릇에 매진하던 이유 또한 바로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뭐, 어느 쪽이든.
그런 만큼 나 또한 납득할 수는 있었다.
아카데미에 이득이 되니까.
다른 수가 없으니까.
만약 내 눈 앞에 있는 이 녀석이 최승준만 아니었다면.
"뭐지?"
나를 향해 뻔뻔하게 반문하는 최승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어깨를 좁혔다.
다른 건 몰라도, 녀석이 류인형과 같은 부류를 교직에 앉힐 리 없다는 확신이 선 탓이었다.
아니, 실력이야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성실하게 교사 노릇이나 할 타입이 아니잖아, 이 자식.'
당장 류인형의 행적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지희가 중학생이었을 당시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류인형.
그런 양반이 이제 와서 내게 가르침을 받는 지희의 모습을 가만히 좌시하고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십중팔구 무언가 술책을 부리려 들겠지.
나조차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예를 들어, 지희를 자퇴시키려 든다던가.
헌터로서의 실력이야 어쨌든, 지희는 아직 학생이다.
혈연을 앞세워 윽박지르면 과연 지희가 견딜 수 있을까?
글쎄, 적어도 나는 회의적이다.
하물며 류인형 그 친구도 헌터인 이상,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헌데, 이런 녀석을 교직에 앉혀두겠다니.
제정신이냐?
나로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최승준의 모습을 보면 류 씨 일가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몰랐던 기색도 아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별다른 말 한 마디 없다는 건 무언가 이상했다.
까놓고 말해, 정말로 그 실력이 탐났다 한들 마찬가지.
내가 녀석을 방문한 시점에서 따로 첨언이 있었어야 할 테니까.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나랑 류인형을 비교하면 그래도 내 손을 드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물론 교직 경험만 따지자면 저 쪽이 우수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도 서아를 키워냈다는 실적이 있다.
즉, 이제 와서 내게 사사건건 부딪힐 류인형을 교사진에 넣을 메리트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하다못해 인맥만 따져도 마찬가지일 테고.
막말로, 나와 류인형 중 최승준과 친한 건 과연 어느 쪽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준은 끝까지 류인형을 자르겠다는 말만큼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즉, 녀석도 무언가 따로 노리고 있다는 뜻인데…….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정확히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진 나로서도 짐작이 가질 않으니 원.
어차피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정치적인 사안 대다수를 최승준에게 떠넘긴 탓이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직접 설명을 요구하면 최승준 또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 수밖에 없겠지.
문제는 내게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단순한 명분론 따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내가 그런 사연에 관심을 가질 까닭이 있을까?
물론 내가 학기 내내 여러 문제에 발을 들이고 다녔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 대다수는 내가 끼어들 만한 계기가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기라고 해야 할까.
학생이니까. 담임이니까.
저런 판에 박힌 이유가 아니라, 끼어들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는 편이 정확하겠지.
예를 들어, 하연이는 몬스터와 관련된 사안이었으니까.
예은이는 이준구 놈의 여동생이었고.
윤하는 처음부터 내 수업에 불만을 가졌었고, 거기에 어느 정도 도와줄 여유도 있었다.
서아야 애초부터 내 제자고, 길드가 진행하던 사업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내키진 않지만, 티아마트 쪽도 마찬가지다.
허면?
지희 쪽은 어떨까.
혼인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은 나 또한 아카데미의 교사로서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몽마의 여왕 쪽도 그렇고.
어딜 어떻게 봐도 신세계 질서 측의 수작이었으니.
거기에 지희를 몽마로 만들고자 하는 저의 또한 깔려 있었고.
어느 쪽이든, 나 또한 적극적으로 움직일 마음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어떻지?
'내가 나설 만한 여지가 있나?'
극단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류인형이 한 행동이라고는 내게 인사를 했다는 점이 전부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속셈이야 나로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딱 그 정도.
지희가 싫어한다. 지희의 기분이 나쁜 듯 보였다…….
그런 이유로 최승준에게 류인형을 자르라고 선포한다?
앞으로 3년.
아니, 남은 2년 내내 우리 꼬마들의 마음에 들지 못한 교사가 나올 때마다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가면 단순한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즉, 나로서도 쾌히 나설 만한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간질이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만약 평소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며 움직일 준비를 했을 테지.
일단 이 쪽을 툭툭 건드리는 게 빡치기도 했고.
무심결에 나온 대답은 이토록 솔직했고, 실로 박우찬다웠다.
여하간, 박우찬이라는 사냥꾼은 자신의 적을 상대할 때 시시콜콜한 이유 따위를 따지는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일전 형님에게 들었던 말 탓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심 거리를 두자고 결론을 내린 덕분일까.
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주접을 떨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애미."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원.
천하의 박우찬이 고작해야 스무 살도 안 된 계집애들한테 벌벌 떨고 있는 노릇이라니.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만 해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때문에.
생각만 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사실에 구태여 매달리는 대신, 나는 당장 눈 앞의 건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최승준과의 대화 직후.
나는 그대로 세이프하우스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신세계 질서 녀석들과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우리들은 이런 세이프하우스를 몇 개 정도 마련했다.
놈들 측에서 나포한 인질이나 투항자를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신세계 질서 특유의 초법적인 영향력을 두려워하며 보호를 요청한 누군가.
혹은, 감옥에 쳐넣을 수도 없어 일단 구금해두기로 한 신세계 질서 측 포로들.
개중에서도, 이번에 내가 찾은 건 바로 후자 쪽이었다.
그래.
최승준 또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류 씨 집안은 과거 끗발 좀 날리던 양반들이라고.
즉, 나는 녀석들 또한 어쩌면 신세계 질서의 끄나풀이 아닐까 하는 의혹으로 여기를 방문한 셈이었다.
……물론 알고는 있다.
내가 보기에도 우습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으니까.
최소한 반 년.
신세계 질서 측도 경거망동할 수 없으리라고 예상한 건 바로 나였으니까.
애시당초 류인형이 신세계 질서 쪽 끄나풀이었다면?
무언가 의도가 있다고 할지언정, 최승준이 녀석을 교직에 앉혀두고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요 최근, 거의 10년 가까이 단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을 정도로 부쩍 가까이 거리를 좁히는 계집애들.
그리고 그런 계집애들을 상대로 적당한 거리감을 잡기 위해선 내게도 그런 명분 하나 정도는 필요했다.
섣불리 거리를 좁힐 수도, 그렇다고 무작정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으니.
차라리 류 씨 집안이 나쁜 놈들이라면 속이라도 편하겠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나는 별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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