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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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태풍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류인형 이후, 우리 둘 사이에서는 다소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한 건지, 인사를 나눈 뒤 그대로 돌아간 류인형.
그렇지만 나도 지희도 류인형이 앞으로 스스로의 말마따나 일개 교사이자 직장 후배로서 만족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상 추측하기 위해서는 역시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덕분에 지금 우리들은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밤은 짐승들의 시간이다.
대침공이 시작된 이후, 가로등의 불빛으로도 쫓아낼 수 없는 짐승들과 직면하게 된 사람들은 줄곧 밤을 피했다.
대침공이 종식되길 어언 4년.
그런 조치도 슬슬 효력을 잃고 있었건만, 이 신도심의 공원은 여전히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저번에 발생한 초대형 게이트 탓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나는 지희가 입을 열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희 집안도 예전엔 조금 날렸던 모양이에요."
다소 경박한 어조로 시작된 토로는, 그러나 실제로는 가볍게 말하기 힘든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특히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예전이라."
"네. 지금은 망했지만."
뭐, 흔한 일이다.
돈이 많으면 무얼 하겠나.
대침공 당시 우후죽순 발생한 비 인가 헌터들을 호위 따위로 고용한다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대기업 회장 칠순 잔치에 게이트 하나 열리면 그대로 떼몰살이니까.
그런 식으로 몰락한 기업만 해도 실제로 몇 개나 됐고.
핏줄을 따라 계승되는 대한민국 재벌 문화의 단점이었다.
지희네 집안 또한 마찬가지였겠지.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
거기에 휘말려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그러던 와중, 남상원이 운영하던 캠프에 몸을 담게 된 류 씨 집안 장남.
어쩌다 보니 눈이 맞아 낳게 된 아이.
하지만 하필이면 그 상대는 정체를 숨기고 잠입한 몽마였다…….
뭐, 그런 이야기인가.
당연히 저 쪽으로서는 부정하고 싶을 이야기다.
틀림없이 멋대로 자식을 유혹한 몽마가 나쁜 거다 비슷한 소리도 나왔겠지.
아니, 그건 나도 공감하는 이야기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진즉 망한 주제에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그 뒤,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된 이후.
여타 대침공에 휩쓸린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네들 또한 가족의 행방을 찾았다.
물론 캠프 내의 항쟁 당시 죽음을 맞이한 아비 쪽을 찾긴 힘들었겠지.
허나, 간신히 손끝에 닿았던 게 바로 지희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저들이 지희에게 애착을 가지는 이유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즉, 상황이 그들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흘러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공교롭게도 지희의 부친 쪽은 피해자가 아니었으리라.
몽마에게 가장 깊게 홀려, 몽마와 아이를 낳은 아들.
이 정도만 해도 작금의 시대상 속에선 무어라 비판받기 충분한 소재다.
그런데, 몽마의 추종자들에 의한 난동이 있었다?
심지어 그 때문에 남상원이 이끌던 캠프 또한 반파, 해체 직전까지 갔다…….
설마 그런 작업 속에서 몽마와 아이를 낳은 사내가 따로 빠져 있었을 리는 없겠지.
남상원도, 혼인회 측도 누구 하나 굳이 나서서 문제로 삼지는 않았으리라.
일개 민간인이 몽마의 유혹을 거부하기 힘든 건 당연한 이야기니까.
지희의 눈치도 있었을 테고.
그렇지만, 예의 양반이 캠프 내의 폭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리라고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저 쪽으로서는 부정하고 싶은 이야기일 테지.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니 역으로 뻔뻔하게 나온 걸까?
나름대로 민간인이라는 입장을 배려해 별다른 말 하지 않았던 혼인회도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그런 뻔뻔한 태도에 지희도 질린 거고.
"애초에, 혼혈이 더럽니 불결하니 한 건 자기들이면서."
그렇지만, 지희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조차 아니었던 모양이다.
요컨대, 대충 사건이 정리된 이후.
저 쪽 집안은 지희를 찾았다.
그리고 당시 지희는 남상원 쪽 캠프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당연히 저 쪽으로서는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겠지.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혼혈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좋지 않으니까.
어느 정도 무관심에 가까운 지금이 차라리 낫다 싶을 정도고, 남상원은 그조차 미래가 없다 판단했을 정도니.
대침공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쉬이 예상할 수 있다.
때문에, 저들로서는 온갖 호들갑을 떨었으리라.
혼혈들은 나쁘다. 혼혈들은 불결하다. 몬스터와 몸을 섞은 결과물이자 잔여물, 찌꺼기와 같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가 지희의 귀에 흘러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뭐, 이해할 수는 있다.
저들로서는 그야말로 상상도 못한 처사일 테니까.
문제는, 정작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지희 또한 혼혈이었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있어선 양부나 다름없던 남상원을 욕해도 거부감이 생길 텐데, 혼혈인 당사자 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야 거리감을 두고 싶어질 법도 하다.
아니, 저들로서는 제 가족이 몽마와 뒹굴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사정이 있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그런 말을 들은 당시 지희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나.
가족이니 뭐니 해도, 결국 속으로는 저런 생각 뿐.
십중팔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겠지.
당연히 거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고.
"아, 진짜. 중학교 이후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저들은 다시 한 번 지희를 찾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이 타이밍에.
방금 전부터 은근슬쩍 흘러나오는 탄식을 듣고 있자면 아무래도 그런 느낌인 모양이다.
나로서도 여러모로 생각할 바 있는 이야기였다.
뭐, 어떤 식으로 꼬인 관계인지는 잘 알겠다.
저 쪽으로서는 자신들의 허물을 부정하고자 잡아챈 게 역효과가 났고, 그래서 지희와 혼인회 측에서는 거리를 두기로 했다.
실제로 담임인 내가 보기에도 지희는 별다른 문제 하나 없이 잘 살고 있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저렇게 접촉하려 한다…….
그것도, 혼혈 운운하는 이야기조차 수치스럽게 생각했다는 과거와 달리 바깥 사람인 내 권위를 동원해서라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거기에도 모종의 계기가 있겠지.
지금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크게 몇 가지였다.
하나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지희의 인척 관계를 확실히 알아두는 것.
귀찮다고 미뤄둔 외상이 닥친 셈이었으니, 나로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저들이 암암리에 내비친 요구 쪽이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결국 저들은 지희의 친지다.
법이 어떻고 판례가 어떻고, 법정에서 저들과 혼인회 중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족이라는 신분을 앞세워 내게 공식적으로 지희의 전화번호나 현재 주소지 등을 물으면?
나로서도 대답을 피하긴 힘들다.
허면, 문제가 되는 점은 역시 거기다.
저들의 요청을 내가 거부할 만한 이유나 당위성이 있는가?
하다못해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라도 좋겠지.
그리고 그렇게 물으면, 나로서는 당장 그런 대답이 먼저 떠올랐다.
'아무래도 좋아…….'
내가 무심한 편이라는 누명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몽마의 여왕 쪽이라면 확실히 뭐가 바뀌기라도 하지.
진짜배기 몽마가 되면 토벌할 수밖에 없다.
토벌할 수 있으니 기쁘다.
그래도 제자인데 조금은 마음이 아플지도 모른다.
것보다 토벌하는 기쁨은 둘째치더라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땐 몬스터가 한 마리 늘어나는 거니까 역시 기분 나쁘다.
뭐 이런 식으로.
다만, 이번 문제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야 지희를 사람으로 키운다는 게 완전한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뜻이라면 나도 적극 협력했겠지.
하지만 아니잖은가.
어차피 사람답게 살든 키우든 혼혈 냄새는 빠지지도 않는다.
그럼 뭐 어때.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지희는 지금도 그럭저럭 몽마 냄새 나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
몽마 냄새를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도 말이지.
뭐, 어느 정도 힘 좀 쓰던 집안이라는 것 같으니 저 쪽에 합류하길 추천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지희 본인이 내키지도 않는 듯하고.
하물며 힘 좀 쓰던 것도 옛날 이야기라고 하니.
나로서는 손을 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번 일이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고?
내가 저 쪽 입장이더라도 이미 한 번 갈라선 혼인회나 지희 쪽을 노리느니 차라리 나를 노릴 테니까.
평소처럼 귀찮다고 넘기지 말라는 형님의 말을 듣길 고작해야 반나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에 휘말릴 줄은 형님도 몰랐을 테지.
"……아, 기분만 잡쳤다! 돌아가죠, 선생님!"
"그래."
짐짓 쾌활한 어조로 일어서는 지희.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무어라 말하려던 나 또한 곧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다.
그 정도로 지금 지희의 태도는 무어라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팔랑거리듯 흔들리는 은발. 씁쓸한 듯 아쉬운 듯 빛을 발하는 석류색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보며, 나는 무엇을 생각했던가.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어물쩡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던지.
아니면, 묘한 아쉬움을 필두로 여러 감정을 내비치고 있는 지희의 마음에 공감했던 건지.
거기까지는 몰라도, 한 가지 확신할 수는 있었다.
몽마도 결국 생물.
녀석들도 눈이 있으면 그야 예쁘고 잘 생긴 놈들을 좋아하겠지.
하는 김에 태도도 괜찮고 집에 돈도 많은 녀석이라면 금상첨화다.
비록 몽마로서의 본능을 이기지 못해 캠프를 박살내고 도망쳤다는 몽마의 여왕이었지만, 적어도 그 여자가 어째서 지희의 부친을 선택한 건지 나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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