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195화 (195/371)

〈 195화 〉 신년

* * *

신년에는 눈이 내렸다.

공교롭게도, 로맨틱한 상황은 아니었다.

도심지에 발생한 초대형 게이트.

미증유의 재난에 직면한 신도심은 아직도 당시의 상흔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니까.

거리에는 시위가 한창이고, 정치가들은 올해 겨울동안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얼어죽을까 두려워하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은 강원도에서 돌아와 신도시에 발을 딛었다.

다행스럽게도, 자리를 비운 사이 신세계 질서가 따로 난리를 피우진 않았던 모양이다.

예상하긴 했지만 내심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여하간, 신세계 질서는 점조직이니까.

신세계 질서의 세력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허면, 신세계 질서가 그토록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신세계 질서의 구성원들 때문이다.

정계나 재계를 포함한 각종 업계의 실력자들이 참가하고 있는 조직이니까.

말하자면, 신세계 질서의 힘이란 곧 여타 참가자들이 지닌 권한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건 신세계 질서가 아니다.

신세계 질서에 참여하고 있는 참가자들 측이다.

물론 이런 차이점은 평소엔 별로 두드러지지 않기 마련이다.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니냐 묻는다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작년 내내 신세계 질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니까.

뭐, 단순한 무력 시위 정도는 됐겠지만.

신도심은 반파당했고, 그로 인한 인명 피해도 심각한 상황.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초대형 게이트조차 자유자재로 발생시킬 수 있는 그 영향력은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물며 그 이상으로 강력한 무력.

마왕의 일곱 권속이라는 실질적인 위협에 더해, 평소운 박사를 필두로 한 마력 공학 기술까지.

두려운 세력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신세계 질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사상범.

규격 외 몬스터에게 굴복한 끝에 인류를 등지기로 결정한 배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신세계 질서가 작년 동안 올린 성과는 사실 영 변변찮은 편이었다.

아카데미의 경비 체제를 뛰어넘어 S랭크에 준하는 괴물을 풀어놓았다던가.

학생들에게 납치범을 보내거나, 혼인회 등을 이용해 여론전을 벌였다던가.

나아가서는, 지금까지 확인한 바만 해도 두 개의 협회 지부에 손을 뻗고 있다던가.

이야기만 들으면 참으로 기가 막힐 지경이지만, 딱 거기까지.

정작 그 영향력을 활용해 무엇을 이루었느냐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일 수밖에 없었다.

내민 수는 족족 막혔다.

언론을 내세운 여론전은 실패했다.

단순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작전 또한 마찬가지였고.

우리 사이에 오갔던 치열한 공방들은 둘째치더라도, 단순한 결과만 보면 연이은 실패 뿐.

결국 최중요 목표인 하연이에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처지다.

허면?

십중팔구 이탈을 생각하고 있는 내부 세력 또한 적잖게 있을 테지.

과연 이런 상황이라면 신세계 질서의 지도부 또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지금은 그런 세력들을 어떻게든 잘 다독이거나 숙청하는 식으로 다시 한 번 내부를 단속할 타이밍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속에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할까.

결국 신세계 질서는 점조직이니까.

굳건한 결속이나 신념 따위도 없고.

막말로, 규격 외 등급 몬스터라는 강자 앞에서 꼬리를 내린 박쥐 새끼들이다.

상황이 악화되면 곧바로 손을 씻으려 드는 녀석들 또한 나오기 마련이지.

점조직이라는 특징이 이번엔 단점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막말로, 1년 내내 실패한 조직 연합체 내부에서 소요 한 번 없다?

그게 기적일 테지.

덕분에 나나 최승준 또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못해도 반 년, 어쩌면 올해 내내.

신세계 질서는 내부를 추스르는 데에 시간을 써야 할 거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만약 움직인다 해도 작년처럼 일단 되는대로 불씨를 흩뿌릴 수는 없겠지.

힘을 모으고 크게 몇 방 날리려 드는 게 고작일 터.

그러니 나는 그 기회를 틈타 강원도 지부 합숙을 진행했고, 지금은 여기에 있었다.

대장간.

그리 설명할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대의 대장간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 눈 앞에 있는 가게만 해도 그랬다.

금속이 아닌 어디서 가져온 몬스터 소재를 이리저리 가공하고 있는 모습.

말 그대로, 헌터들의 장비를 만들기 위한 장소다.

제 1차 대침공 당시, 하급 몬스터의 소재를 지분거리던 직인들이 하나둘씩 모여 형성된 공방 거리.

이번에 내가 방문한 이유 또한 바로 그 일환이었다.

신세계 질서 놈들이 위축된 틈을 타 우리 쪽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거기에, 머잖아 아카데미도 다시금 문을 열겠지.

예정된 커리큘럼에 의하면 2학년 이후로 무기술 수업의 비중이 늘어나는 건 거의 확정된 사실.

아카데미 교사로서도 여러모로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에 새로 입학할 1학년들도 동아리 쪽엔 발을 들이게 될 테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카데미 운영에 차질은 없었다.

예의 초대형 게이트 사건으로 얼마나 되는 재학생들이 무력감에 자퇴를 선택했을까.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입학생 쪽은 역으로 크게증가했다는 점이다.

작년에 비하면 거의 세 배 가량.

이제서야 간신히 학교라고 자칭할 수 있는 수준이다.

헌터가 되기로 결심한 끝에 마음이 꺾인 재학생들.

반대로,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해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기로 결정한 입학생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뭐, 어쨌든.

덕분에 공방 거리는 대침공 이전에 비하면 한창 떠들썩했다.

예상보다 큰 폭으로 증가한 입학생 숫자 때문에 새로 발주를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아카데미 교복은 단순한 보급품이라 말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훌륭한 물건이었으니까.

현직 헌터 기준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성능의 방어구.

다른 교복처럼 무작정 찍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당연히 그런 만큼 공방 측의 일정에 맞추어 계약을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던가.

어쨌든, 대침공이 종료된 이후 지나칠 정도로 침체된 과거에 비하면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이 보였다.

대침공 당시에 비하면 부족하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나름 먹고 살 정도는 되지 않을까.

당장 나만 해도 아카데미 교사라는 직함이 없었다면 방문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고.

최승준이 던진 요구에 맞추어 모든 대장간이 화로에 불을 켜고 있는 풍경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물론 내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지만.

그야 나랑 최승준을 비교하자면 공방 거리와 연이 있는 건 내 쪽이겠지.

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무리 그래도 내게 기업 이름으로 넣은 대규모 발주 따위를 처리할 능력은 없었다.

최승준 쪽은 다소 아쉬운 기색이긴 했지만, 이 쪽은 녀석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지.

것보다 거절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

나한테 그런 걸 배우게 해서 어쩔 생각이야, 이 자식.

뭐, 어쨌든.

내가 이 공방 거리를 방문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양산형 공산품이 아닌 진짜배기 장비, 오더 메이드를 발주하기 위해서.

그리고 개인 장비를 발주하는 수업 따위에 앞서 미리 추천할 장인들을 살펴두기 위해서였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 당분간은 우리 꼬마들 외에 이용할 사람도 마땅치 않겠지만.

여하간, 저번 던전 공략 덕택에 우리 동아리 쪽 학생들의 실력은 바야흐로 일취월장.

조금만 더 가다듬으면 아카데미 측에서 졸업생들에게 요구하는 조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리라.

뭐, 그만한 난리를 겪고도 겨울 내내 던전에 처박혀 있었으니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장인들 쪽에 있었다.

까놓고 말해, 군에 속한 일부를 제외하면 대다수 직인들은 농담으로도 고객 친화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탓이다.

어쩔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제 1차 대침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헌터 협회조차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에 지나지 않는 지금.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형성된 장인 거리에 최첨단 서비스를 요구해도 곤란할 테니까.

그야 최승준처럼 현찰 박치기라도 시도하면 일단 손이 빈 장인들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힘들겠지.'

다름이 아니라 가격이 문제다.

막말로, 장인들이 없으면 장비를 구할 수 없는 헌터와 땜장이 노릇으로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는 대장장이.

둘 중 어느 쪽이 급하냐 묻는다면 그야 헌터들 쪽일 테니까.

때문에, 스스로 발품을 파는 장인들은 대개 일확천금을 노리고 업계에 투신한 신입들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즉, 실력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대로 그런 만큼 진짜배기 실력자들을 움직이는 데에 드는 돈은 일개 헌터가 감당할 수 있는 액수도 못 된다.

애초에 움직인다는 확신도 없으니까.

한 번 고랭크 헌터의 장비에 손을 대면 평생 놀고먹기 충분한 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다.

저렇게 편벽한 양반들에게 시장 경제의 원리도 먹히지 않으니, 당연히 자기 포장이나 광고 따위엔 관심도 없고.

결과적으로, 장인 거리가 형성되길 어언 20년.

직인들의 공방은 어느덧 기연이 판치는 장소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소개를 듣고 방문한 헌터.

건너건너 소문을 듣고 허름한 공방의 문을 두드린 초보자.

혹은, 어쩌다 보니 장인의 마음에 든 신참.

그런 부류가 아니고서야 접촉하기조차 어려운 게 이런 진짜배기 장인들이었다.

뭐, 기연이라 하면 듣기야 좋지만 결국 인맥 사회가 되었다는 뜻인데…….

덕분에 나 또한 지금은 이렇게 발품을 팔고 있는 처지였다.

여하간, 그 양반한테 대리인 따위를 보냈다간 건방지다며 모든 거래를 끊어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이고.

아쉬운 입장인 나로서는 이렇게 손수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금 찾고 있는 양반은 학생들에게 흔쾌히 소개해도 좋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당장 내 장비도 그 양반 손에서 나온 거고.

그만한 실력자인 만큼, 단순한 장비를 만들어도 그 품질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실력에 비해 과분한 장비를 선뜻 내놓진 않는 양반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장비에 휘둘릴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양반을 수소문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지금은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세계 질서가 조직을 정리할 때까지 최소 반 년, 어쩌면 1년 이상.

길다면 긴 시간이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우리 꼬맹이들이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장인을 색출하고 서로 상부상조하며 함께 성장한다…….

그런 시나리오를 그리기엔 지나칠 정도로 촉박한 기간이었다.

무엇보다, 장비의 종류도 문제고.

무기는 둘째치더라도, 윤하나 서아는 일단 장갑이 두터운 방어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해, 어느 정도 근접전도 소화할 필요가 있는 하연이.

나아가서는 고속 격투 중심인지희는 가죽 내지 특수 소재 방어구가 좋을 테고.

반대로, 예은이는 금속 장비를 사용하기 힘들 테지.

순도 높은 금속이 마력의 흐름을 무산시킨다는 건 동서고금 보편적인 이야기니까.

전신에 능력을 두르는 예은이의 전법과 금속 장비는 상성이 나빠도 너무 나쁘다.

티아마트? 그 쪽은 아무래도 좋아.

비교적 진지하게 답하자면 애초에 갑옷 따위를 맞출 필요도 없을 테고.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신들의 옷은 곧 권능의 구현.

섣불리 갑옷 따위를 맞춰도 스스로의 전력을 깎아먹을 뿐이겠지.

그렇게 다섯.

티아마트를 제외해도 대다수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장인들 중에서 무기는 물론이요 방어구의 소재를 가리지 않는 실력파 장인은 그 형님 한 사람 뿐이었다.

"슬슬 가자, 지희야."

"네!"

그리고.

난생 처음 보는 장인 거리의 풍경에 넋이 나간 지희를 향해 나는 그리 말했다.

짐짓 쾌활한 어조로 답하는 지희.

나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잠시, 우리들은 곧 장인 거리의중심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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