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흑룡의 굴
* * *
……토굴 가장 깊은 자리에서, 흑룡은 천천히 눈을 떴다.
용은 알고 있었다.
요 최근 둥지를 들쑤시고 다니는 시궁쥐들의 존재를.
동시에, 직감할 수 있었다.
시궁쥐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작금의 이 난리는 절대로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수 없는 문제란 사실을.
물론 침입자들 또한 나름대로 본인들의 행동을 위장하려 들기는 했다.
그렇지만, 지금 둥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용의 허물이라도 줍고자 달려든 시궁쥐들의 소행이라 보기 힘들었다.
근본적으로 다른 의도.
천천히 목을 옥죄는 듯한 살의가 느껴진다.
저 머나먼 백두대간으로부터 지금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남하한 우두머리로서의 직감이었다.
때문에.
피이이이잉!!
하늘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휘하의 용들 중 한 마리가 쓰러진 바로 그 순간.
다른 용들과 달리, 우두머리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릴 따름이었다.
올 게 왔을 뿐.
결국 용이란 그런 생물이다.
뱀으로 태어나 수양을 쌓은 끝에 이무기에서 용이 되었다 한들, 그 강대한 힘은 주변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강대한 용의 결말이란 언제나 변변찮은 법.
사방을 호령한 용조차 언젠간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용의 내단을 노리고.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눈이 벌개진 사냥꾼의 화살 아래에.
그렇기에, 어떤 의미로는 조금 유쾌한 기분도 들었다.
일개 시궁쥐 따위가 용의 거처까지 찾아오다니.
실로 유쾌한 기분이었다.
허면, 어떻게 할까.
시궁쥐들을 쳐서 멸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겠지.
그렇지만, 감히 잠자는 용의 수염을 뽑으려 드는 방자한 사냥꾼들.
이 땅을 관리하려 드는 인간들 또한 쓸어버려야 할 때가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좋아, 그렇게 하자.
용은 결정을 내렸다.
먼저 이번에 방문한 시궁쥐들을 태워 죽인다.
그리고 그 뒤, 감히 변변찮은 실력의 사냥꾼들을 보낸 그 오만.
거기에 답례하기 위해 지상을 불사르리라.
만약 그 끝에 이 몸을 쓰러뜨릴 수 있는 사냥꾼이 나타난다면, 그 또한 일흥.
들끓는 화염을 씹으며, 재앙과 같은 용은 비늘을 세웠다.
*
"지형 실화냐?"
자신도 모르게 신서아는 그리 한탄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그녀들은 마지막으로 우두머리 사냥에 착수했다.
허나, 과연 우두머리라고 해야 할까.
역시 우두머리의 굴은 기습 한 번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헌터들이 드나들 수 있을 법한 장소마다 정확히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뱀과 바위.
뱀의 몸이 아니고서야 차라리 새 길을 뚫는 게 빠를 정도로 지독한 방해물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뭐, 당연한 이야기.
던전은 기본적으로 몬스터의 앞마당.
던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활용해 공략하는 일조차 심부로 가면 갈수록 어려워지는 지금.
일개 던전의 우두머리를 기습 한 번으로 슥삭 하고 처리한다는 건 아무리 그래도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물론 그녀들 또한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서아의 저격 능력을 갖추고도 빈틈 하나 찾기 힘들 줄이야.
"뭐, 어쩔 수 없죠. 그냥 정면으로 뚫고 갑시다."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을까, 그렇지 않으면 정면 돌파를 노릴까.
고민하던 그녀들 사이로 황윤하는 지나가듯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냉정한 판단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전자는 사실 별로 가망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애초에 천리안 능력까지 동원한 끝에 나온 결론이다.
이제 와서 전제를 뒤집을 요소가 완전히 없지는 않겠지만, 사실상 맨 땅에 기도하는 일이나 다름없는 것도 사실.
자잘하게 이어지는 고민을, 황윤하는 일언지하에 베어 끊었다.
참으로 과감한 결론이었다.
왜냐하면 전위에 서서 용의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황윤하 그녀였으니까.
아마도 이러니까 다른 파티에서도 전위에게 사령탑을 맡기는 거겠지…….
다소 불성실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전원이 한 순간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피식, 그 모습에 황윤하 또한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는다.
"아니, 무슨 생각 하는 건진 알겠는데, 나 딱 C랭크 헌터 수준이거든요?"
다소 과감한 자기 비하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황윤하가 C랭크 수준의 전위라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애초에, 박우찬의 훈련 덕분에 어느 정도 기초는 잡혔다.
거기에 아카데미 커리큘럼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온갖 난리까지.
황윤하가 C랭크 헌터 수준이었던 건 당장 이 던전에 들어오기 직전 이야기.
구울은 물론이요 흑룡을 상대로도 거의 며칠 동안 바닥을 굴렀던 황윤하.
그 실력은 거의 다음 단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공된 무장. 몇 번이나 맞상대한 용의 비늘을 모방해 다듬은 방어 능력.
리더로서의 경험 따위를 제쳐두더라도, 이 던전 내에서 가장 많은 성장을 거듭한 건 틀림없이 황윤하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하진 못했다는 점이다.
장비의 성능 등을 고려할 시, 현재 황윤하의 방어 능력은 얼추 B랭크 가까운 수준.
확실히 엄청난 성장 속도였지만, 그조차 부족하다.
여하간 저 멀리서 느껴지는 마력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마력 감지 따위에 둔한 황윤하도 알 수 있다.
마력 감응 능력 이전에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이었으니까.
생물로서의 위압감 자체가 격이 다르다.
황윤하는 그걸 깨달을 수 있었다.
때문에, 지금의 방어 능력을 고려하면 오히려 그녀는 적극적으로 다른 수단을 찾자고 주장해야 할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 사인을 내렸다.
파티 전체의 체력. 우두머리가 그녀들의 움직임을 깨달을 확률.
이를 고려했을 때, 지금 이상의 타이밍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잘 해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나 죽어요."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묻는다면, 거기까진 딱히 모르겠다.
뒤에 있을 박우찬을 믿고 있는 걸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황윤하의 머릿속에는 박우찬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일주일 내내 이어진 생사를 넘어드는 경험 때문이다.
뒤에 누군가가 있다던가, 그러니 괜찮다던가.
그런 걸 의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만약 이 자리에 박우찬이 있었다면, 필시 그렇게 말했을 테지.
리더의 자질.
단순히 전위니까, 성격이 괄괄하니까.
그런 이유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황윤하에게는 사령탑의 자질이 있었다.
뭐, 본인은 극구 사양하겠지만.
스타 헌터, 톱 플레이어의 자질을 가진 이예은과 달리 스스로 가장 먼저 진흙탕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재능.
그릇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황윤하의 발언에선 그런 기풍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작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단 어떻게 해도 우두머리에게 기습을 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황윤하를 비롯한 파티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허면, 가장 먼저 선진을 여는 건 역시 신서아의 저격.
단 일격으로 우두머리의 굴로 향하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몬스터를 꿰뚫어 죽인다.
그 직후, 우두머리의 시선을 유도해 교전.
몬스터에 대한 기습이라기보단 오히려 특공대의 제압 작전에 가까운 구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 경우, 가장 먼저 공격받고 가장 먼저 공격받아야 하는 건 역시 선봉.
다시 말해 황윤하였다.
막말로, 자칫 잘못했다간 단 일격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자리.
할 수 있는 준비란 준비는 전부 다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없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황윤하는 능청스레 그리 말하며 다시 한 번 별다른 상의 하나 없이 선봉에 섰다.
때문에.
"너희들, 내가 이거 쏘면 곧바로 달리는 거야. 알겠지?"
파티원과의 유대나 협력.
그런 단어와는 제 사부마냥 연관이 없던 신서아 또한 그리 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낯선 감각이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그녀는 농담으로도 사교성이 좋은 편은 아니다.
홀로 남은 엄마와 사부 앞에서는 쾌활한 언동을 유지하곤 있지만, 딱 거기까지.
본디 그녀는 자신이 속한 길드에서도 그렇게 남들과 자주 협력하는 편은 아니었다.
물론 정작 그런 면이 역으로 인기를 끌어모은 면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그녀가 눈 앞에서 사람을 갈아버리고 있는 미친 과학자를 보고도 분노를 느낄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신서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친밀함을 품기 힘든 거지, 윤리 의식이 날아간 건 아니니까.
비록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윤리 의식보다 친밀함을 우선했던 그녀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 또한 최소한의 감사는 품는다.
일찍이 그녀가 속해 있던 길드 측에서 그녀의 파티원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했던 것처럼.
그런 만큼, 저런 모습을 보이는 전위를 보면 이 쪽도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생각 정도는 드는 게 사람인 법이다.
끼기기기긱, 하고 현이 전율하며 떨렸다.
신서아가 제 무기로 삼는 거대한 거궁.
개중에서도 대지에 거치하는 것이 필수인, 거의 발리스타에 가까운 주포였다.
활의 아랫쪽을 바닥에 꽂고, 동굴의 천장에 위쪽을 건다.
동시에 활대를 한 쪽 발로 밟으며, 다른 쪽으로 마저 활대를 민다.
양 손을 사용하다 못해 전신을 통해 당기는 화살은 이미 창이라 부르기에 적합한 형태.
말 그대로, 이런 상황이 아니고서야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신서아에게 있어 활은 딱히 애착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그녀가 주된 전법으로 삼는 건 상황 파악과 기습.
말 그대로, 사냥꾼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전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활을 주무기로 삼은 이유는 단 하나.
대검을 사용하는 사부와 합을 맞추어 사냥에 나설 날을 고대했기 때문이다.
설마 본격적인 던전 공략에서 이런 꼬맹이들과 먼저 합을 맞추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전우애라고 해야 할까.
그런 사실을 의외로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때문에.
피이이이잉!!
소리를 찢으며 작렬한 대창이, 동굴을 지키던 뱀의 안구를 꿰뚫어 파괴한다.
뇌리까지 닿았을 데미지.
보나마나 즉사다.
거기까지 확인한 직후, 신서아는 또 다른 활을 꺼내 시위를 매기며 외쳤다.
"달려!!"
동시에, 생각했다.
물론 헌터도 몬스터도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이라도 당하면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설령 A+랭크 헌터라 해도 E랭크 몬스터에게 목숨을 잃을 수 있으며, 조건이 잘 맞아 떨어지면 반대 또한 마찬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A랭크 이상의 헌터나 몬스터가 현대에 있어 최고봉의 무력이라 일컬어지는 이유가 있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하며, 신서아는 내심 그리 바랐다.
저 꼬맹이들의 마음이 꺾이지는 않기를.
그리고.
만약 그 기도를 들었다면, 다른 학생들 또한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있었으리라.
가장 먼저 쿵 하고 용의 사체를 넘어 발을 딛은 황윤하.
여태까지 용의 공격조차 문제 없이 받아냈던 그녀.
쩌어엉!!
"크학……?!"
그런 그녀가, 다음 순간 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날아든 일격에 맞고 동굴 입구에 쳐박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니, 무슨 공격이었던 건지 그녀들도 보지 못했다.
단지.
눈 앞에서 일어서는 거체.
비늘 한 장 한장이 그녀들보다 거대한 거룡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A+랭크 몬스터를 상대하게 된 그녀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생물이 아닌가, 하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