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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182화 (182/371)

〈 182화 〉 겨울방학

* * *

그렇게.

신도심 상공에 발생한 게이트와 그에 부속된 일련의 사건들도 끝이 났다.

그리고 그 결과 내게도 무언가 변화가 생겼느냐 묻는다면…….

사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긴밀한 사정이 있었다.

"당장 대답을 기대하는 건 아니야."

파티의 끝.

새하얗게 질린 달빛 아래에서, 서아는 그렇게 말했다.

"사부한테도 여러모로 생각할 게 있을 테고."

시원한 듯, 섭섭한 듯.

허나, 그 이상으로 마음 편한 듯.

흉중에 쌓은 앙금을 털어낸 양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래도, 내가 사부를 좋아한다는 건 알아줬으면 해서 말한 거니까."

그 날.

나와 서아 사이의 대담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그 즉시 나는 최승준의 다리를 붙잡고 조언을 구했지만…….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최승준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매정한 새끼.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어, 축하한다?"

"축하할 일이냐, 이게?"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야 인생의 무덤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안타까운 일이긴 하다만."

"아니, 갑자기 무슨 인생의 무덤이야. 급발진 조지네."

"우리 나이가 곧 스물 여덟이다. 반대로, 시험 삼아 사귈 나이도 아니잖나."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식 일정이 잡히면 말하도록. 축의금 정도는 내 주지."

"것보다, 왜 아까부터 계속 내가 수락하는 전제야?"

"설마 수락할 생각도 없는데 계속 엉겨붙은 건가?"

나를 바라보는 최승준의 시선에 다시 한 번 환멸이 섞였다.

그렇게 말하면 그렇긴 한데.

하긴, 저 녀석으로서도 거절할 생각이라면 알아서 거절하라고 하고 싶겠지.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또 모를까, 거절할 멘트를 생각해달라 말하긴 조금 그렇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즉, 일단 당사자인 나부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전혀 결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니, 정말로.

여태까지 내게 있어 서아는 어디까지나 첫 번째 제자.

딱 그런 관계라고 선을 그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만.

서아는 내가 마음에 지고 있던 짐을 덜어내고, 그 뒤에 그런 말을 건넸다.

내심 일선을 긋고 있던 나로서는 한 방 먹은 셈이다.

생각한 적도 없던, 오히려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상대로부터의 고백.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정말로 오랜만에 서아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눈에 들어온 탓이다.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이제 어엿한 성인으로서 마주하게 된 서아.

좋아한다며, 사랑한다며 나를 바라보는 눈가에 맴돌던 감정.

어느 쪽이든, 내가 알고 있던 서아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낯설었다고나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곤란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스승 된 입장이라면 누구나 여제자를 이성으로 보지 않으려 노력하곤 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서아의 과감한 행동은 그런 내 노력을 쳐부수기에 충분했던 셈이다.

"요컨대 제자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해서 당황했다는 말을 뭐 그렇게 길게 하는 거지?"

"아니, 너는 섬세함이라는 게 없냐? 조금 순화해서 말해주면 안 돼?"

"징그럽게 무슨. 뭐, 어느 쪽이든 내가 할 말은 하나다."

"뭔데?"

"애초에 네 일이고, 네 제자가 아닌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지."

필시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최승준은 그렇게 말을 마무리했다.

그녀가 누군데, 씹덕 새끼야.

나로서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눌렀을 따름이지만.

"야, 그래도 조금 그런 게 있잖아. 어? 내가 그래도 걔 사부인데, 고백 한 번에 헬렐레하기는 조금 품위가 없지 않냐?"

"일단 지금 이러고 있는 네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품위가 없다만."

"씨발아."

그렇게 되었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자식이다.

뭐, 그렇게 되서.

파티가 끝나고 마침내 나도 마취제를 떼어놓을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때 아닌 고난에 직면하고 있었다.

가볍게 울리는 콧소리.

마찬가지로, 쾌활한 기색을 담아 바닥을 차는 구둣굽.

때 아닌 이중주를 뒤따르며, 나는 다소 지친 기색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쇼핑몰.

어찌저찌 게이트 발생의 피해를 극복하고 다시 한 번 문을 연 백화점.

나와 서아는 그 백화점의 레저 상품 코너를 걷고 있었다.

이유는 물론 하나.

서아가 말했던 겨울 여행 등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공교롭게도, 서아가 바랐던 것처럼 나와 함께하는 단 둘만의 여행 따위는 아니고.

이번 겨울 방학을 맞아 따로 준비한 커리큘럼이다.

여하간, 초대형 게이트가 도심지 한복판에 눈을 뜬 와중이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제 2차 대침공의 종식인지 단순한 우연인지 하는 격렬한 논쟁이 오가고 있는 지금.

신세계 질서의 위협을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그저 맥없이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아니, 사실은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오랜만에 서아와 함께 여행이라도 갈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아무래도 둘만 여행을 훌쩍 떠나는 건 조금 부담이 되었던 탓이다.

딱히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부로서는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고나 할까, 받아들일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때문에, 나로서는 사실 이번 쇼핑도 피하고 싶었다.

것보다, 서아랑 단 둘이서 남는 일 자체가 조금 부담이었다.

물론 그런 건 나 뿐인 듯했다.

저번 고백 이후로 뭐가 달라지긴 달라진 건지, 서아는 정작 그런 내 반응에도 개의치 않았다.

확답 하나 없는 사부의 모습을 보면서도.

도리어 이 쪽이 의식하고 있다는 걸 즐기고 있는 기분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아까부터 뭐해, 사부?"

빙글, 이 쪽을 향해 몸을 돌린 채 내 쪽을 바라보는 서아.

나도 모르게 그 시선을 슬쩍 피하자,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서아는 즐거운 듯 시시덕댔다.

아니, 진짜 왜 그러냐…….

조금 억울한 기분이 샘솟는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거절이나 승낙은커녕 제자한테 고백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실컷 당황하고 있는 나로서는 무어라 할 말도 없었다.

결국 이런 싸움에서는 내가 지고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 사실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낙담하기도 잠시.

"그런데, 괜찮겠냐? 서아야."

나는 슬쩍 주변에 진열된 상품들을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말마따나, 이번 여행은 결국 여행이라기보단 일종의 합숙에 가깝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그렇게 만든 거지만.

사부로서의 위엄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그거야 어쨌든.

본래는 서아와 둘이 쏘다닐 예정이기도 했었으니, 나로서는 그리 물어둘 수밖에 없었다.

"응? 그야 불만족스럽긴 하지. 사부랑 단 둘이 가고 싶었는데."

"하하하. 서아야, 네가 사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구나. 하하하!"

"아니, 사부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부랑 같이 있고 싶은 건데?"

다만.

정작 그렇게 물어도 이렇게 되로 주고 말로 받을 따름이니.

나로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서아가 배시시 웃어보이는 상황의 반복.

바야흐로 고문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보다 너 그렇게 적극적인 캐릭터였던가……?

얼마 전.

몇 년 동안 쌓아두었던 사과를 간신히 내뱉은 서아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적극성이었다.

이래서야 사부로서의 위엄을 세울 수도 없잖아.

그런 생각을 삼키며 슬쩍 용품들을 살피는 척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부터 이죽이고 있는 서아의 황금빛 시선을 도저히 마주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 뭐어. 어쨌든, 여행은 여행이잖니."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에 내가 훈련을 위해 섭외한 장소는 정말로 단순한 훈련장 따위는 아니었으니까.

이는 당장 눈 앞에 있는 레저 용품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스키복. 스노우보드. 혹은 캠핑 용품.

어딜 어떻게 봐도 헌터로서의 훈련에 사용할 만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나로서도 조금은 신경을 쓴 결과다.

만약 서아가 본래부터 내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 여름 방학 때는 참으로 못 할 짓을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나는 서아가 사부 좋으라고 몬스터 잡으러 가자는 뜻인 줄 알았지…….

만약 데이트인 줄 알았다면 즐겁게 몬스터나 도축하러 가진 않았을 거다.

아예 여름방학 내내 도망쳤다면 또 모를까.

뭐, 어쨌든.

이번에는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장소를 선정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훈련이나 설비 따위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고, 하는 김에 겸사겸사 즐길 수도 있는 장소.

즉.

"그래도 우리 사부 재주 한 번 좋아, 어떻게 협회 허락을 구했대?"

"이게 다 인덕이라는 거지."

"정말 아깝다니깐. 만약 못 잡았으면 내가 따로 일정 잡았을 텐데. 그렇지?"

"하하하. 사부가 되어서 제자를 고생시킬 수는 없지 않겠니, 서아야. 하하하!"

이번에 내가 훈련 장소로 선택한 장소는 일전에 서아 또한 함께 들렀던 장소.

다시 말해, 헌터 협회 강원도 지부였다.

지금 이렇게 서아와 함께 쇼핑이라는 이름으로 스키복 따위를 보고 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

이번 겨울방학 일정에 맞추어 훈련을 끝내면 근처 스키장이라도 대절할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서아에게는 영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최대한 많이 부를 수 있는 대로 부르도록 하자.

동아리 애들에 서아, 그리고 내키진 않지만 티아마트까지.

어쨌든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지금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아나 다른 애들과 혼자 남으면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갈지, 나로서는 그게 가장 두려웠다.

아니, 애초에.

'도저히 자랑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지…….'

어쩌면 내가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자의식 과잉이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예의 거룡 퇴치 이후부터 묘한 반응을 보이는 예은이.

그리고 이번에 나를 향해 정면으로 고백한 서아.

혹은 그 외의 기타 등등까지.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의 연속이라 영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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