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강을 먹는 사룡
* * *
마비독의 효과조차 잊고 데굴데굴 구른 탓일까.
내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땐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 없었다.
거의 바닥을 드러낸 마력 쪽이 차라리 여유가 남을 정도였으니.
예은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납치할 때 마취제라도 사용한 걸까.
어기적어기적 바닥을 기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애시당초 능력 쪽은 멀쩡하기도 했고.
물론 예은이가 바보라서 능력을 쓰지 않는 건 아니고, 만약을 위해서다.
방금 전, 구울의 왕을 쓰러뜨린 직후 얼마 되지 않아 상층의 구울들이 몰려든 탓이다.
우두머리가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눈치챈 거겠지.
나로서는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
그런 상황을 정리한 건 이제 막 눈을 뜬 예은이 쪽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재 예은이의 실력으로는 당면한 상황을 타개하긴 힘들다.
그러나.
내가 전달하는 구울에 대한 정보.
차례차례 난입할 수밖에 없는 일자형 복도.
추가로 내 창고를 털어 제공한 투척 무기들.
이 정도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예은이라 해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다.
여하간, 쏟아지는 구울들을 상대로 염력을 사용해 무기를 던지면 되는 일이니까.
역시 이런 부분에선 초능력 계통의 능력이 더 편리한 법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부르르 떨리는 지하 너머.
더 이상 내려오는 구울도 없을 즈음에서야 예은이는 내 옆에 도착했다.
"선생님, 그래서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아니, 말했잖냐. 아무래도 네가 예의 비밀 조직의 소체로 납치당한 모양이라니까."
"그런 설명으로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안타깝지만,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딱 거기까지.
그조차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깝고.
'평소운 박사인가.'
놈들이 하필이면 예은이를 납치한 건 필시 평소운 박사의 연구 때문이겠지.
지금 상황만 봐도 그렇다.
신세계 질서가 게이트를 열 수 있었던 건?
평소운 박사의 기술 덕분이다.
본디 사용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결계를 즉각 사용할 수 있었던 건?
평소운 박사의 기술이 들어간 연구동 덕분이겠지.
심지어 문영석 쪽의 발언에 의하면 소환 의식을 다듬은 것도 평소운 박사라고 하니.
만약 이번에 놈들이 집행한 의식의 정체가 소환 마법의 일종이라면, 놈들이 예은이를 납치한 이유 또한 짐작이 갔다.
예은이의 '제작자'가 평소운 박사이기 때문이다.
제 3차 대침공.
규격 외 등급 몬스터의 소환을 위해, 놈들은 하연이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허나.
만일 평소운 박사가 예의 소환 의식에 사용할 촉매를 대체하고자 연구하고 있었다면?
하연이가 아닌 다른 촉매로도 소환 의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의식을 다듬고 있었다 한다면.
당연히 하연이를 대체할 제 2의 촉매는 예은이가 될 수밖에 없다.
술식 개량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한 데이터.
그런 데이터가 있는 평소운 박사의 제작품 중에서도 최고 걸작.
내가 평소운 박사였어도 예은이를 중심으로 술식을 손봤겠지.
문제는 그런 발상이 가능한 이유 쪽이다.
평소운 박사는 도대체 뭘 보고 예은이로 하연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무슨 근거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손이 닿는 대로 시도했을 뿐인지.
나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물며, 이 주제에 대해선 이준구가 이야기하기로 했고.
막말로 내가 지금 예은이한테 사정을 설명해 봐야 미친 놈 소리나 들으면 다행일 거다.
예은아, 사실 네가 정부 주도 인체 실험 대상자거든?
개중에서도 상당한 성공작이래.
그런데 우리가 상대하던 조직 중에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담당자가 있더라.
네가 생각하기에도 세상 한 번 좁지?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건데, 아마 그 양반이 너를 중심으로 술식을 개량한 모양이야.
응? 무슨 술식이냐고? 아아, 저번에 말했던 제 3차 대침공 운운하는 그거 말이야.
뭐? 그게 사실 누구나 가능한 거였냐고? 아니, 아마 아닐걸?
그럼 왜 그렇게 생각한 거냐고?
사실 별다른 근거는 없어!
이런 젠장.
못 믿는 게 당연하지.
"믿을 수 있어요."
"응?"
"선생님이 말하는 거라면 뭐든."
정작 예은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 참, 퍽이나 그러시겠다.
"어이구, 기특한 것."
"진짠데……."
아직도 1학기 첫 만남 당시를 잊을 수 없었던 나로서는 그렇게 말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엉금엉금 기어 마침내 내 곁까지 다가온 예은이를 향해 창고를 조작했다.
그러자.
"엇?"
"마시렴."
예은이의 손바닥 위로 동일한 디자인의 약병 두 개가 떨어졌다.
흔들리는 땅에 맞추어 조용히 진동하는 유리병.
우두머리 구울이 눈 앞에 있을 당시엔 녀석을 견제하느라 마실 수 없었지만, 최고급 소재를 아낌없이 사용한 해독제였다.
그것도 마비독 해주에 특화된 물건이니, 최소한 어느 정도 효과는 기대할 수 있겠지.
실제로도 그랬다.
어찌저찌 약병을 열어 입에 해독제를 흘려 넣은 이후, 예은이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나아졌기 때문이다.
"남은 한 병은 선생님 좀 먹여줄래?"
그렇게 말하자, 예은이는 완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
의아한 소리를 내기도 잠시.
내 말이 무색하게도, 예은이는 두 번째 병까지 자신이 들이켰다.
도대체 뭐지? 자기 과시?
나도 모르게 얼이 빠진 다음 순간.
텁.
예은이의 양 손이 내 뺨을 붙잡았다.
"……응?"
그리고!!
예은이가 여고생과 담임 교사 사이에선 절대로 있어선 안 될 행동을 시작했다!!
"아니, 뭔 씹?!"
물론 내 미력한 발악이 효과를 보는 일은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예은이의 얼굴, 이라는 서술을 덧붙이기엔 지나칠 정도로 빨랐다.
아무래도 기습 키스 당시 상대의 모습을 하나하나 묘사하는 연애 소설은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실제 기습 키스는 달랐다.
상대의 얼굴이나 눈동자, 혹은 머리카락을 확인할 만한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새하얀 피부!! 갸름한 턱선!! 하늘색 눈동자!! 찬란한 금발!!
완전 군장 확인 완료!! 출발!!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 진짜로.
'이건 또 무슨 씨발──.'
차마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욕설이 목구멍 안에서 맴돈다.
박우찬, 27세.
설마 마취독 때문에 여고생한테 입술을 뺏길 줄이야.
내가 손만 움직였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 탄식 비스므리한 생각을 주워섬기고 있자니, 문득 이상한 감각이 찾아왔다.
움찔, 손가락 끝으로부터 확산되는 촉각.
그제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나한테도 해독제를 먹여달라는 말에, 예은이는 제 입으로 머금은 해독제를 내게 전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1분.
땅울림마저 아득하게 느껴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예은이는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푸하."
거기에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 쪽을 돌아보기까지.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곤란할 지경이었다.
"저, 저기. 예은아?"
"네?"
"방금 그 행동은 무슨 짓일까?"
젠장.
볼품없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가 솔직히 쪽팔렸다.
그렇지만, 예은이는 그런 내 추궁 아닌 추궁에도 고개를 갸웃일 뿐이었다.
"먹여달라고 하셨잖아요?"
"물론 그렇게 말하긴 했지. 했는데, 정말 그런 방법밖에 없었니?"
"저는 다른 방법을 모르는데요……."
그렇게 말하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어렴풋이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던 기분이 든다.
누워있는 사람에게 마실 걸 흘려보내면 안 된다고.
무언가 위험하다고 했던가, 어땠던가.
으, 응?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방금 건 단순한 의료 행위일 뿐인가……?
칭찬, 칭찬해야 하나?
"이상한 점은 없으시죠?"
"어? 그, 그렇지. 응, 괜찮아. 응."
너무나도 태연하게 그리 반문하는 예은이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박력 비슷한 게 있었다.
실제로, 효과 또한 탁월했다.
온 몸에 피가 도는 감각.
하위종의 독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지만, 상위종의 독에도 효과가 있을진 반신반의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흡혈귀나 늑대인간 등과는 달리 구울의 흡혈에 감염 능력은 없고.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겠지.
만약 내가 몬스터가 되었다면 그대로 자살했을 테고.
처음엔 욕하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흡혈귀나 늑대인간보단 구울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지금 이 분위기 쪽이겠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나는 창고 안에서 최고급 포션을 하나 꺼내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우두머리 구울을 쓰러뜨린 직후, 용맥을 탈환하며 회복한 마력이 남김없이 소비된다.
그만큼 심각한 부상이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눈 앞에서 몬스터가 사라진 탓에 이 쪽의 능력이 확 꺾인 탓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허겁지겁 회복을 우선한 이유는…….
와락.
멀뚱멀뚱 근처에 앉아 있던 예은이를 품 안에 안았다.
"어, 엇?! 서, 선생님?!"
"예은아, 가만히 있자."
"아, 안 돼요! 선생님, 이런 분 아니시잖아요……."
씨발, 이래서 싫었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물론 지금 예은이 입장에서 보자면 교사라는 양반이 드디어 돌아버렸나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야, 방금 전 네가 나한테 한 행동 쪽이 더 그렇거든?!"
"네, 네? 뭐가…….……자, 잠깐! 방금 건 단순한 의료 행위였어요!"
"웃기지 마, 오라질 년아!! 방금 건 고소하면 내가 이겨!! 어, 아마도!!"
"오, 오라질 년?!"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예은.
언제나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계집애는, 생각보다 앙큼한 점이 있었다.
방금 전까진 의료 행위였다는 듯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고작해야 한 번 포옹하는 걸로 온갖 생각 다 하는 꼴이라니.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더 이상 그런 잡담을 나눌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예은이에게 부탁해 미리 회수했던 코트를 우리 위로 덮어 단단히 여민다.
거기에 예은이를 한층 더 깊게 끌어안자, 꺄앗 하는 계집애같은 비명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길 잠시.
"예은아. 설명할 시간은 없는데, 당황하지 마라. 너, 염동력자인 것도 꼭 기억하고."
"네?"
다음 순간.
아까 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던 땅울림이 조용히 멎었다.
그리고.
지면이 폭발했다.
*
결론만 말하자면, 의식을 방지하는 건 실패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식은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내가 지하실에 들어온 시점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작동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의식의 시작이 되는 트리거가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으로 따지자면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고 비유해야 할까.
그리고 예의 의식의 트리거가 되는 건 다소 전형적인 클리셰.
즉, 의식을 집행하는 당사자Ghoul의 피였다.
처음부터 놈들의 노림수였던 걸까,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내가 그 직전에 개입한 걸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지하실에 도착한 시점에서, 곧바로 구울의 왕을 죽여버렸다 한들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점이다.
부우우우웅, 귓가를 스치는 공기의 흔들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상공 1km 이상.
용맥의 마력을 통째로 갈취한 대의식은, 그대로 우리들을 하늘 끝까지 날려버렸다.
지하에서부터 폭발한 마력이 아카데미 교사 절반을 무너뜨리는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코트와 포션.
양 쪽의 힘을 빌어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고 그 여파를 받아낸 내게, 하늘 저편의 풍경이 보였다.
"니미럴."
정말로 니미럴 풍경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시 상공을 점거하고 있던 초대형 게이트.
아카데미 지하에 그려진 마법진이 목표로 삼은 건 바로 거기였다.
그렇게 사출된 용맥의 마력이, 초대형 게이트와 접촉.
널찍이 열린 이계의 문 너머로, 마법적인 신호를 보낸다.
소환 마법.
혹시나 했지만, 아카데미 지하에서 진행되던 건 말 그대로 소환 의식이었다.
하연이가 아닌 예은이를 촉매로 삼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제 3차 대침공이 시작된 건가?
규격 외 등급 몬스터가 나타나는 건가?
아니, 그토록 조악한 상황.
거기에 급조한 이론 위에 구축된 마법이다.
문제 하나 없이 성공했을 것이라 생각하긴 힘들다.
실제로도, 다음 순간 모습을 드러낸 건 소위 말하는 대침공에 가까운 무언가가 아니었다.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광경은 충분히 절망적이었다.
신도심 아래.
하늘을 뒤덮은 게이트의 모습 위로, 돌연히 그림자가 진다.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며, 눈 앞의 구울이 아닌 하늘을 살핀 모든 이들은 깨닫게 되겠지.
어처구니없는 절망.
두 번의 대침공을 겪으며, 어떠한 인류도 감히 피할 수 없었던 질문을.
……그래.
저런 괴물들을 상대로, 도대체 인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제 2차 대침공이 종식되길 3년.
헌터들의 피로 쌓아올린 평화 위에서 아늑함을 누리고 있었던 이들은, 다시 한 번 자문해야 할 때가 왔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침략자들의 관문Gate이, 세계를 부수고 나타나는 소리인가.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3년의 평화조차 지금의 인류에겐 향유할 자격이 없다 판단한 절대자라도 있는 걸까.
산산조각난 평화가, 그토록 명확한 형상으로 인류를 방문했다.
『───────!!!!』
그리고.
괴물의 왕.
신도심의 하늘을 빠짐없이 뒤덮은 게이트 위.
초대형 게이트조차 뒤덮는 위용을 아낌없이 자랑하며.
용이, 나타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