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의식을 파괴하는 방법
* * *
"애미."
시골에 있는 엄마가 들었다면 한탄했을 발언과 함께, 나는 무릎을 꿇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멋대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투덜거리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피로나 수면 부족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고통.
연전에 의해 축적된 데미지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부상은 달랐다.
지극히 물리적인 상흔.
물론, 그렇다 한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큰 상처는 아니었다.
계속되는 싸움. 지친 정신.
거기에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예은이의 모습.
추가로, 그 틈새를 찌른 기습까지.
모든 조건이 맞물린 공격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하게 반응할 수는 있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잃은 건 목의 가죽 몇 장과 피 몇 방울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순간, 핑 하고 시야가 돌았다.
……그래.
문제가 있다면 바로 구울의 손톱에 깃든 독성이다.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다.
다만, 딱 거기까지.
손톱에 깃든 독으로 사냥감을 마비시키고 잡아먹는 식시귀???.
놈들에게 있어, 손톱의 독은 어디까지나 식사를 위한 향신료에 불과하다.
생명에 지장이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라고?
그야 당연하지.
반대로 전신을 마비시키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니까.
즉각 목숨에 영향을 끼칠 만한 독성은 없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굳이 치명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비된 상대를 죽여버리면 되니까.
'염병할.'
속으로 욕지거리를 뇌까린다.
속보, 존나 아픔.
미친 듯 날뛰는 고통이 뇌리를 좀먹는다.
허나, 만일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한들 당장 눈 앞의 사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마법진 위에 다소곳이 누운 예은이.
동시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법진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던 구울 한 마리.
내 목덜미에 상처를 입힌 바로 그 놈이었다.
느껴지는 마력으로 보건대 족히 A랭크 이상.
타락한 정령으로서 그 힘을 일부나마 간직하고 있다 전해지는 설화 속 존재.
'구울의 왕인가.'
켈켈 흘리는 웃음이 영 천박하기 그지없는 게 왕이라기보단 거지 왕초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일단 지금 상황부터 그렇고.
회복은 마땅치 않다.
해독제를 꺼낼 틈도 없거니와, 마력 조작 능력으로 해주할 수 있을 만큼 저농도도 아니고.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의 사거리 내인 지금.
마비된 내가 능력을 운용해 독성을 빼내는 쪽보단 놈이 나를 발톱으로 포착하는 게 훨씬 빠를 거다.
즉, 어지간한 빈틈이 없는 한 이대로 싸워야 한다는 뜻인데.
'좋진 않네.'
솔직히 꽤 빡센 상황이다.
상대는 A+랭크 몬스터.
그럭저럭 쌓인 데미지에 더해, 현재는 마비독에 중독된 상태.
마력은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정장을 복원하는 데에 소비할 마력을 고려하면 사실상 바닥.
혹사할 만큼 혹사한 감각은 당장에라도 이성과 작별 인사를 보낼 듯한 기분이고.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정작 저 쪽이 예은이를 인질로 삼진 않았다는 점인데…….
기습할 기회를 챙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지.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다행일 따름이었다.
허면, 내게 유리한 점을 몇 가지 셈하자.
하나는 단순한 스펙이다.
기습은 어떻게든 흘렸다.
독에 당하긴 했지만, 목에 구멍이 남진 않았으니까.
거기에 내 객관적인 능력은 대략 A+랭크 헌터 수준.
단순한 전투 능력만으로도 눈 앞에 있는 구울의 왕을 상대할 수 있다.
추가로 감각에 의한 보정까지 더해지면 단순한 능력으론 충분히 압도할 수 있겠지.
남은 건 아직 부하 구울들이 다가올 때까진 시간이 있다는 점 정도?
그게 끝이다.
후우, 호흡을 골랐다.
농담으로도 공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조건이다.
십중팔구 눈 앞의 우두머리도 장기전을 노리고 있겠지.
당장 눈 앞에서 여유를 부리는 이유 또한 매한가지다.
녀석으로서는 손해를 볼 이유도 없으니까.
애시당초 놈들의 목적은 마법 의식의 완성.
나를 상대로 승전보를 올리는 게 아니다.
하물며 지금은 버티기만 해도 마비독이 효과를 발휘할 테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까닭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 쪽이 노려야 할 건 단기 결전.
신세계 질서, 혹은 게이트.
어느 쪽에서든 지원을 받아 여유가 생긴 구울들이 더 이상 내려오기 전에, 놈을 죽이고 승부를 봐야 한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태산같은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씹새끼."
저 쪽에서 먼저 다가오기라도 했다면 조금이라도 편해졌을 텐데.
피식 웃으며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방금 전처럼 전신을 사용해 대검을 휘두르는 건 힘들다.
그 쪽은 여러모로 체력을 소비하는 전법이니까.
때문에, 나는 대검을 앞세웠다.
한 손은 손잡이에, 한 손은 보조 손잡이에.
창으로 따지자면 짧은 파지에 가까운 감각.
일격 신앙에 의한 방어 능력을 고려하면 효율적인 전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
아슬아슬하게 기습을 회피하고, 구울의 우두머리가 거리를 벌리고 난 뒤.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략 10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간극 끝에, 다시 한 번 싸움이 시작되었다.
선수를 끊은 건 내 쪽이었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가야지 어쩔 수 있나.
동시에.
그렇게 쇄도하는 나를 불꽃이 덮쳤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구울이 다루는 정령의 힘 중 화염은 비교적 흔한 능력이다.
덕분에 나 또한 별다른 고민 없이 파고들 수 있었다.
검면을 방패로 앞세워, 옆으로 흘린다.
형체를 취한 화염이 대검의 옆면을 타고 뒤쪽으로 흘렀다.
마치 냉병기같은 반응.
그러나,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염에 하나하나 물리법칙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시 한 번 앞으로.
동시에, 내 진격을 앞둔 구울의 왕은 뒤를 향해 후퇴한다.
연인을 포옹하듯 허공을 끌어안는 양팔.
우두머리의 동작에 맞추어, 일렁이는 화염이 쇄도한다.
……아니.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불덩이를 쥐고 던진 듯한 동작.
거기에 맞추어 움직이려던 내 사고를 읽기라도 한 듯, 화염구가 궤도를 바꾼 탓이다.
쿠웅!!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제동을 건 육체가 삐걱이며 비명을 지른다.
그런 나를 향해 이번에야말로 이를 드러내는 화염구.
대검 너머로부터 묵직한 충격이 닥쳤다.
동작은 단순한 페인트.
실제로는 다른 방식으로 화염을 조작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 평가할 틈도 없었다.
콰아앙!!
다음 순간, 등 뒤에서 폭발이 작렬했던 탓이다.
방금 전, 처음으로 출수한 화염.
잔여하고 있던 불꽃이 그대로 배후를 덮쳤다.
어지간한 헌터들도 목숨을 빼앗길 콤비네이션.
하지만.
"미안한데."
반응 없는 대답을 던진다.
훅!
코트 대신 벗어 휘두른 정장의 수트.
방패처럼 사용한 옷깃이 폭발의 여파를 거둔다.
견제를 위해 흩뿌리는 화염.
이후, 그렇게 난사한 불씨를 기점으로 하는 불꽃 조작.
어느 쪽이든, 놈의 압도적인 상위 호환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던 덕택이다.
화력은 나쁘지 않지만, 페이크가 하나하나 조잡하다.
화염을 조작하는 속도도 녀석보단 느리다.
아니, 어쩌면 녀석 쪽이 지나칠 정도로 빨랐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당연한 이야기지.
쌓아올린 기술과 기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특권이니까.
고작해야 잔재주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여유를 부릴 수도 있을 만큼.
후웅!!
불티 너머로 쇠구슬이 날아든다.
노리는 건 머리.
조악한 무기라지만, 직격한다면 구울의 왕이라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일격이다.
그런 만큼, 구울의 왕 또한 머리를 내주진 않았다.
가볍게 까딱 고개를 젓는 것으로 공격을 회피하는 구울의 왕.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쿵!
화염구를 받아낸 충격으로 붕 떴던 발을 대지에 붙임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직진.
동시에 주문을 읊는다.
'소재는 쇠구슬. 재료로 마력을 지불.'
확실히, 마력은 얼마 남지 않았다.
정장을 수복하는 데에만 해도 바닥을 드러내고 말겠지.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때문에.
여기서는 정장의 수복을 포기.
초반부터 수를 던진다.
콰드득!!
벽면에 쳐박힌 쇠구슬이, 순식간에 송곳처럼 변모한다.
배후에서의 기습.
예상하지 못했던 탓인지, 우두머리 또한옆구리를 내주고 만다.
동시에, 분을 터트리며 옆구리를 찌르고 있는 송곳을 박살내기까지.
그 틈을 타, 나는 다시 한 번 걸음을 내딛었다.
축지.
여태까지 아끼고 아끼던 기회를, 지금 이 자리에서.
동시에.
간신히 옆구리의 철침을 빼낸 우두머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그야 그렇겠지.
실로 찰나.
헌터의 신체 능력, 나아가서는 내 몸놀림을 고려해도 삽시간에 좁힐 수는 없었을 거리.
구울의 왕에게 있어선 안전 장치나 다름없는 간격을, 한 달음에 뛰어넘는다.
이 시점.
우두머리 구울이 선보일 수 있는 공격 수단은 딱 하나.
자신의 육체를 사용한 근접 공격.
개중에서도, 주로 사용하는 손톱 쪽이다.
그리고.
읽을 수 있다면, 피할 수 있다.
터엉!!
두 번째.
아끼고 아꼈던 엘릭서를 최종전에서 남김없이 쏟아내듯, 두 번째 축지가 폭발한다.
손톱을 피하고 일격을 박는 건 실로 간단하겠지.
그렇지만, 상대는 구울.
일격 신앙에 의한 방어를 고려하면, 그런 공격으론 승부를 볼 수 없다.
때문에.
지금 여기서 필요한 건 충분한 위력.
즉.
진이란 진은 다 빠진 나도 충분한 공격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
다시 말해, 중력이다.
두 번째 축지를 밟으며, 내 몸이 솟구친다.
놈의 손톱이 빈 공간을 가르며, 천장에 거꾸로 발을 붙인 나.
이윽고.
천장을 박차며 추락.
중력의 인도에 따라 복도를 향해 쇄도한다.
핑 하고 도는 시야.
급격한 마력 운용과 축지의 연속 사용에 따른 부담이, 마비독의 효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상관 없다.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이상, 이 추락은 나도 멈출 수 없으니까.
양 손으로 검을 쥔 채, 팔을 앞으로.
이대로 휘두르기만 하면 축지에 의해 축적된 힘이 멋대로 놈의 몸을 베어버릴 거다.
서걱!!
실제로도 그랬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구울의 몸뚱이가 하늘을 날았다.
그렇지만.
'쯧.'
손맛이 약하다.
아슬아슬하게 반응했나……!!
혀를 차며 착지.
우득 하는 소리를 낸 다리를 무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딛는다.
그제서야 방금 전 날아간 게 무엇인지 눈에 들어왔다.
구울의 팔이다.
아무래도 때에 맞춰 뒤로 뛴 모양인데……!!
훌륭한 반사 신경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놓칠 생각은 없었다.
대검의 위력을 이기지 못해 나부끼던 칼날.
거기에 달린 보조 손잡이를 억지로 움켜쥔다.
그리고.
호흡을 크게 삼킨 다음 순간.
찰나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서, 마지막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날아드는 반대쪽 손톱에 맞추어, 끌을 맞대 튕겼다.
그렇게 빈 틈을 이용해, 대못으로 상반신을 할퀴고 꿰뚫었다.
온 몸의 뼈가 박살난 놈의 흉곽을, 대패로 붙들어 뜯어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드러난 몸뚱이에, 톱날을 걸었다.
그렇지만.
"씹!!"
마비독 때문일까.
한 호흡에 행해진 연속 공격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놈이 남은 팔을 들어 톱날을 막아세웠기 때문이다.
연속 공격의 틈새가 무뎌진 탓일까.
억지로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앞으로.
"으랴아아압!!"
기합과 함께 칼날을 튕긴다.
어지간한 무기에 뒤지지 않는 구울의 손톱과 톱날이 불씨를 튕기기도 잠시.
다시 한 번 양 손으로 대검을 움켜쥔 나는 토해내듯 포효했다.
"그 분 외에는 신이 없도다 !!"
신의 이름과 함께 무너진 방호를 넘어, 흉곽 안으로 칼을 쑤셔넣는다.
동시에.
놈의 이빨이 어깨에 꽂혔다.
크로스 카운터.
지금 이 상황에서 우두머리 구울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던 탓이다.
"갸아아아악!!"
문제는 두 가지.
첫 번째는 몬스터와 신체를 접촉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깨를 파고드는 이빨.
구울의 구취가 내 몸에 닿고 있는 지금 상황에 비하면, 어깨를 불사르는 고통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놈이 남는 마력을 모조리 이빨에 때려박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깨뼈가 짓물리며 어깨가 주저앉는다.
불꽃의 마력이 팔의 근육을 문자 그대로 녹여버린다.
만약 그 뿐이었더라면 당장 이 시체를 치워버렸을 테지.
두 번째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즉.
"갸르륵……!!"
구울의 왕은 죽지 않았다.
계산 실수?
아니, 그건 아니다.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위력.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타이밍.
내가 생각하기에도 절묘한 계산 끝에, 놈을 죽일 수 있는 루트를 산출했다.
때문에.
만약 변수가 생겼다고 한다면, 지금 이 상황 때문이겠지.
"이런 미친!!"
쭈웁, 쭈웁.
그제서야 놈의 주둥아리가 묘한 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말할 것도 없었다.
흡혈.
타인의 피를 빨아 그걸로 자신의 마력과 생명력을 회복하는 능력.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떠오르는 점이 있었다.
전락한 악령의 왕.
우두머리 구울 중에서는 그렇게 불리는 녀석도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불을 다루는 정령이라 칭송받으며, 동시에 피를 빠는 흡혈귀라 두려움을 산 존재.
어떠한 일화에서는 수많은 구울들을 통솔하는 존재라 일컬어졌다 하는,악령Markish.
만약 눈 앞에 있는 녀석이 흡혈귀라 불린 적도 있는 악령의 왕이라면…….
'그야 흡혈 능력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실제로도 그랬다.
피를 빠는 소리가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놈의 육신에 생기가 도는 것이 느껴진다.
아주 조금.
흡혈에 의해 회복한 분량만큼, 아주 조금 부족했나.
까득, 억지로 이를 악문다.
그렇다면 차라리 끝을 보자.
놈의 회복과 내 추가 공격,어느 쪽이 먼저 상대의 목덜미에 닿을까.
"그래. 승부를 내자, 자식아!!"
악에 받쳐 그렇게 목소리를 낸 다음 순간.
퍽!!
끔찍한 소리와 함께, 눈 앞에 있던 놈의 머리가 폭발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왜냐하면.
폭발. 고함. 외침.
수많은 소음 끝에 간신히 눈을 뜬 예은이가 뒤늦게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갸아아아악!!"
"서, 선생님?!"
뭐, 그건 그거고.
나는 지근거리에서 폭발한 구울의 살점이 몸에 붙은 탓에 다시 한 번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지만.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