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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158화 (158/371)

〈 158화 〉 평소운이 남긴 유산

* * *

결론만 말하자면, 신세계 질서Novus Ordo Seclorum는 아카데미 측과 정면 충돌을 회피하기로 했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 작전부터 그랬다.

평소운 박사의 연구동이 습격당한 이후.

아직 들키지 않은연구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한 끝에 입안된 작전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현실 도피다.

애시당초 남은 연구동들이 들키는 것 또한 결국은 시간 문제.

자연스레 신세계 질서의 정책 또한 남은 연구동의 은폐보단 활용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즉, 남은 시간 동안 연구동을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극단적으로 말해서, 어차피 뭘 해도 연구동이 발각당하는 건 피할 수 없는 결말이다.

허면, 현재 잔존하고 있는 연구동을 처분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이 도리어 현실적이겠지.

폭주시키는 것도 좋다. 함정을 설치해 진입한 헌터들과 함께 매립시키는 것 또한 방법일 테고.

풍수도참을 활용해 아카데미를 폭격하는 쪽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리라.

어느 쪽이든, 진지한 논의는 아니었다.

파기해야 할 정보는 파기한 뒤, 남는 짜투리 시간은 어떻게 활용하는 편이 좋을까.

고작해야 그 정도 이야기.

고작해야 그 정도 사담에 본격적으로 살이 붙기 시작한 건, 바로 어제 새벽부터였다.

요 최근 들인 끄나풀 중 한 사람이 박우찬의 이탈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신세계 질서 또한 본격적인 회의를 열었다.

박우찬이 갑자기 돌발 행동을 벌인 이유 따위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장 눈 앞에 놓인 기회를 활용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집단이 아니었다.

때문에.

"시시한 일이지요."

태시영이 말했듯, 이번 작전은 다소 심심한 면모가 있었다.

신세계 질서의 간부들은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온 기회.

허나, 제대로 된 준비 하나 없이 급조된 작전에 조직의 대망을 걸 정도로 그들은 성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실성도 없고.

박우찬이 갑작스레 자리를 비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박우찬이 보인 철저함을 고려해 보면, 십중팔구 자신의 대리인에게 인수인계 정도는 마쳤겠지.

실제로도 그랬다.

계획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줄곧, 구울 부대는 추정 목표가 머무르는 하숙집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아카데미 측에게 남은 전력이 박우찬만 있는 건 더더욱 아니고.

처음부터 자신들과 적대하던 이준구와 최승준.

거기에 추가로 조직을 이반한 남상원 등.

정면에서 타겟인 자하연을 납치하기 위해선 최소 S랭크 이상의 무력이 셋 이상 필요한 상황.

박우찬 한 명이 자리를 비웠다고 경거망동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듬은 작전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허를 찌르는 것.

이번 작전으로 자하연을 탈환하는 건 포기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야 다행이긴 하겠지.

다만, 어떻게 봐도 탈환한 자하연을 촉매로 사용해 소환 의식을 벌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조직이 내린 결론이었다.

당장 박우찬이 얼마나 자리를 비울지 그조차 불확실한 상황.

하루 이상 자리를 비운다면 좋겠지만, 갑자기 도시를 떠난 것으로 볼 때 길어도 반나절이 고작일 게 뻔했다.

설령 2일 이상 자리를 비운다 해도 마찬가지.

그 경우, 애초에 제대로 된 준비 하나 없이 자하연을 납치하고 의식을 벌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굳이 염려할 필요도 없겠지.

그런 판단 하에 입안된 계획의 개요는 실로 간단했다.

자하연을 노리는 척 양동을 벌인다.

당연히 박우찬은 가장 먼저 자하연을 구하러 가겠지.

허면, 당장 그들에게는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게 된다.

노리는 건 바로 그런 찰나다.

박우찬이 돌아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

플러스, 박우찬이 하숙집을 제압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

그만한 시간이 있다면, 남은 연구동을 이용해 소환 의식을 벌이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문제는 정작 의식의 근간이 된 평소운 박사의 이론 쪽이다.

아무래도 평소운 박사는 촉매인 자하연을 어떻게든 대체할 수는 없을까 연구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 작전은 바로 그런 평소운 박사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즉.

"으윽……."

눈 앞에서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는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예은.

태시영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영웅'의 여동생.

이번 의식의 중심이 되는 건 바로 그녀다.

납치하는 건 손쉬웠다.

갑자기 눈 앞에서 열린 게이트에 당황하던 이예은.

언제나 그랬듯, 오빠인 이준구 쪽은 국회의원 일로 바빠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나름대로 실력은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태시영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제압부터 납치까지 10초는 걸렸을까.

분명 오빠인 이준구 또한 머잖아 집으로 돌아올 테지.

저만한 초대형 게이트가 발생했으니.

그렇게 되면 이예은이 사라졌다는 사실 또한 눈치챌 수 있을 테고.

그러나 태시영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준구를 얕보는 건 아니다.

단지.

태시영은 이준구를 알고 있었다.

영웅.

뇌신.

인류 최강.

사람의 형상을 한 우레.

그렇게 불리는 영웅 나리께서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

여동생의 부재를 확인했다 해도 마찬가지.

오히려 어중간하게 실력이 있는 만큼 그렇게 생각하고 말겠지.

따로 대피한 모양이로구나, 하고.

이 쪽은 그러는 사이에 의식을 완료하면 그만이다.

……평소운 박사가 정부에 제공한 '상품'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 높은 샘플.

이번 의식은 그런 이예은을 촉매로 삼아 진행된다.

평소운 박사가 가장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자신이 직접 제작한 인공 헌터 프로젝트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평소운 박사의 촉매 대체 계획 또한 그런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전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평소운 박사가 인공 헌터를 작성하기 위해 토대로 삼은 이론이 관계되어 있는 모양이다만…….

태시영으로서는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빡대가리였기 때문이다.

아니, 최소한 박사 과정은 필요할 만한 물건들 뿐이었고.

단지.

"결국 타협에 지나지 않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지금 이런 상황에선 본래 촉매인 자하연을 손에 넣기 힘들다.

거기까진 알겠다.

태시영 또한 이해한다.

그러니 어차피 버릴 생각이었던 잔여 연구동을 기반으로, 평소운 박사의 스페어 플랜을 가동한다.

여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면 평소운 박사를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다분히 결과주의적인 생각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기서 평소운 박사의 새로운 계획안을 사용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평소운 박사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데이터는 전부 손에 넣었다.

하물며 그 자리에서 협회 측을 포함한 아카데미 쪽과 정면 격돌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러니 평소운 박사 쪽을 잘라 내버린다.

이해할 수는 있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너무 어중간하죠.'

정작 계획을 시행하는 당사자가 된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리 그래도 무어라 한 마디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번 작전만 해도 그렇다.

의식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 상층부는 태시영에게 한 가지 요구 사항을 달았다.

이예은을 죽이지는 말 것.

물론 이유는 있다.

이제 와서 인명 중시 사상에 눈을 떴을 리도 없고.

방금 전에도 말했던 이예은의 오라비, 이준구 때문이다.

이준구라는 헌터는 틀림없이 영웅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 사나이.

자신과 같은 이유로 싸우다 쓰러진 헌터들을 애도하기 위해 정계에 발을 들인 정치가.

결과적으로, 그런 이준구의 행동은 헌터와 민간인 양 쪽으로 나뉘어 분열될 뻔한 이 나라를 규합했다 평가받는다.

때문에.

이준구는 그들과 전력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

애시당초 본인부터가 싸우는 일보단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열의를 보이기 때문이다.

헌데, 여기서 이예은을 죽인다면?

어쩌면 이준구 또한 눈이 돌아갈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미친개랑 싸우고 있는 판국인 상층부로서는 도저히 바랄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다만, 제물을 죽여 가공하지 않은 시점에서 의식의 성공 확률은 한층 더 낮아지겠지.

급조한 의식장.

술식을 구성한 당사자도 없음.

촉매도 불완전.

하물며, 의식의 밑준비도 완벽하진 않다.

태시영이 보기에, 이번 작전은 말 그대로 복권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니 질러두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잘 되서 제 3차 대침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뭐, 지금 이 상황 하에서는 고작해야 그 정도가 한계겠지.

단지.

'이 쪽의 기분도 생각해 보라는 뜻이지요~'

고작해야 이런 일에 차출되는 자신의 기분도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고 기대하는 마음 또한 있었다.

어쩌면 이준구라는 걸물과 합을 겨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박우찬과 다시 한 번 재전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그건 어려울 듯 싶다.

어차피 이 쪽의 역할은 이예은의 납치가 전부.

하달된 임무는 이미 마무리한 상황에서 억지로 남아있던 건 자신이니 무어라 불평할 수도 없지만.

아침은 진즉에 밝았다.

마음 속으로 정해둔 시간이 다한 지금, 구멍 뚫린 배에선 탈출해야 할 때였다.

'정말이지.'

인생, 뜻대로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 쪽의 사정 때문에.

이미 살의에 미쳐 날뛰고 있는 도축업자에겐 이런 방법은 쓸 수도 없겠지.

이준구와 달리, 이예은 등 누군가를 죽여버린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할까 의문이다.

여하간, 태시영은 기억하고 있었다.

포션을 사용했다지만 당장 의사에게 보여야 할 학생을 앞두고도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던 미친 사냥꾼을.

태시영이 아카데미에 대한 테러 따위를 포기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학생 한 둘 죽인다 한들 도축업자가 더더욱 불이 붙을 거라곤 생각하기도 힘드니까.

즉, 이번 작전처럼 문제인 건 자신 쪽이라는 건데.

무심코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자신이 S랭크 헌터라는 점을 팔아 조직에 들어온 건 사실이었지만, 생각보다 여러모로 자연스럽진 않았던 탓이다.

뭐, 다음 기회도 있겠지.

지금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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