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여신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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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할 정도로 당황한 서아를 간신히 진정시킨 뒤에야, 나는 협회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은 이번에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내가 협회에 도착했을 무렵, 협회내부는 한창 어수선한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공무를 처리하는 직원들도, 일감을 들고 쏘다니는 헌터들도.
단지.
평소라면 1층까지 내려오는 일도 드물 고급 정장들이 들락날락하는 모습만 눈에 밟힌다.
딱히 소란을 부리거나 실무자들에게 공무를 지시하려 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넉살 좋은 아저씨들처럼 차만 얻어마시고 가는 경우도 부지기수.
그렇지만, 협회 직원들 또한 사람이다.
실무에 대해선 당연히 그들이 더 자세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실질적인 상사들이 연신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가만히 앉아 평소처럼 응대하기도 힘든 법이다.
덕분에 지금 협회 1층 메인 플로어는 때 아닌 부산스러움으로 한가득이었다.
당장 내가 처한 상황만 봐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바로 그런 협회 휴게실에서, 나는 현 헌터 협회 본부장을 만나 독대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먼저 보자고 한 건 아니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 비밀스레 면회를 신청하니, 잠깐 기다리시라는 말과 함께 본부장이 내려왔다.
나로서는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의외인 상황이었다.
까놓고 말해, 티아마트와 면담을 나누는 건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여신 본인의 결정에 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티아마트를 보필하고 있는 협회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협회를 경유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협회 측에서 농간을 부려 티아마트와 면회자 사이에 농간을 부린다거나…….
혹은 자신의 친지를 우선하는 식으로 일정을 배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협회가 통과시킨 안건도 내키지 않는다면 무시할 수 있는 여신의 권위.
거기에, 협회가 그런 농간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신이 눈치챌 경우 닥칠 후폭풍.
막말로, 협회의 대처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자리를 비울 수도 있는 게 현재 티아마트의 입장이다.
처음엔 김민철의 양육과 관련된 사정으로 찾아들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절대적인 갑과 을.
티아마트와 협회 사이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렇게 평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티아마트를 속일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모르긴 몰라도, 녀석이 꿍쳐 둔 권능만 몇 개.
협회의 청탁을 감시하는 힘이 없다고 자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티아마트에 대한 면회를 신청한 직후 협회장이 나왔다는 건, 지금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현재 여신께서는 모든 면담을 거절하고 있다네."
짐짓 근엄한 얼굴로 말문을 여는 본부장.
다만, 그 말을 들은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성좌도 달거리를 하냐는 생각이었다.
물론 입 밖에 낼 수는 없었지만.
……조용히 주변을 훑는다.
협회 1층 휴게실.
공식적으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장소이며, 실제로 우리들이 들어오기 전까진 몇몇 직원들이 쉬고 있기도 했다.
허나.
잠깐 자리를 비워줄 수 있겠냐는 본부장의 말에 모조리 자리를 비운 게 바로 5분 전.
겉으로야 정중한 부탁이었지만, 사실상 축객령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즉, 지금 이 상황은 일종의 밀담이라는 소리인데.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도 거기에 있고 말이야."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왜냐하면 내 쪽의 면담은 별다른 문제 없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처 차단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일찍이 녀석과 거래를 마쳤을 적.
매일같이 협회 최상층에 쳐박힌 녀석을 분신이나마 외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섭할 당시 일이다.
내가 녀석에게 받은 권한 중에는 무제한 대면 권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시엔 이런 걸 어디다 쓰냐고 생각했지만 말이지.
사실 지금도 그렇다.
녀석이 분신으로 나돌아다닐 수 있게 된 이상, 내가 굳이 찾아갈 필요도 없었고.
그리고 티아마트가 모든 면담을 거부했다는 건 문자 그대로인 이야기.
즉, 당장 잡혀 있던 모든 면회를 거부하고 이후 추가적인 면회 신청을 거부한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잘 해석하면 내 쪽은 올려보낼 수 있다는 소리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궤변에 가까운 논리다.
협회 쪽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겠느냐 물으면 할 말도 없고.
다만, 협회로서는 오히려 내 등을 밀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뭡니까?"
"여신님의 동향을 살펴주게."
변덕스러운 여신이 또 무슨 일로 기분을 상했을까 모른다.
어쩌면 저번 면담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고, 단순히 날씨가 나빠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지.
그러니, 여신의 기분을 살펴다오…….
만약 그런 식의 요구였더라면 나 또한 별로 상관은 없었다.
내키진 않지만, 어차피 기분을 풀어줘야 하는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고.
겸사겸사 불안에 떨고 있는 협회 측을 안심시킬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나.
어차피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티아마트의 정체에 대한 일이라면 또 모를까, 면담 내용 자체에 비밀 엄수 의무는 없고.
도리어 제 이득을 챙기고자 뻔뻔스레 침묵을 가장하는 경우가 많으면 많겠지.
다만.
내게 의외였던 건, 그렇게 말한 본부장의 눈매에서 번들거리는 근심걱정 쪽이었다.
물론 정치적인 의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당장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만 해도 몇 가지는 될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감정 중 가장 뚜렷한 것은 명확한 우려였다는 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여신님과 친하십니까?"
그런 만큼, 눈 앞에서 그 년 저 년 할 수도 없다.
억지로 가다듬은 어투가 나로서는 기묘할 정도로 낯설다.
그렇지만, 당사자인 본부장 쪽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누군가 친하다고 왈가왈부할 수 있는 분은 아니지."
"앗, 죄송."
"다만, 지금 여신님의 태도에 심려를 표하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여신님께 신세를 진 건 사실이지."
거기까지 들으니 나 또한 짐작이 갔다.
여신인 티아마트가 면담이라는 이름 하에 진행하고 있는 건 단순한 얼굴도장 찍기 따위가 아니다.
계시.
성좌들이 으레 신화 속에서 발휘하곤 하는, 자신의 말을 전하는 힘이다.
물론 티아마트 여신에게 예언 능력 따위가 있는 건진 나도 잘 모른다.
그렇지만.
망설이고 있는 자. 두려워하고 있는 자. 아연함에 떨고 있는 자.
그런 이들의 등을 밀어주는 여신의 목소리란, 번민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힘이 될 것인가.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사람들은 망설임을 겪고, 확신을 얻고자 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판단을 말없이 지지하는 여신의 모습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용기를 얻었을까.
여신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권위 때문인지, 아니면 계시의 권능이 발휘하는 설득력 때문일지.
어느 쪽이든,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녀석의 언변에 도움을 받은 듯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 양반만 해도 그랬고.
……내게 있어, 눈 앞의 사내는 지나가다 언뜻 본 새파란 타인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조차 나를 몬스터인 티아마트에게 보내 축복을 받게 할 생각이었으니.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좋은 인상으로 남지는 않았다.
단지, 저렇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고평가를 매기기 충분했다.
까놓고 나라면 내 앞에서 여신 뿔 자르고 튀어서 계약 파투 낸 새끼한테 절대로 저렇게 못 굴 것 같은데.
"뭐, 알겠수다. 딱히 따로 선정한 질문은 없고?"
"없네. 그런 걸 내켜하지도 않으시니."
"깐깐하긴."
"어허."
조용히 어르는 어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디 보자.
어떤 질문을 준비하는 게 좋을까?
일단 어째서 이런 일을 한 거냐고 성토해야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으면 최소한 무슨 이유로 휴가를 낸 건진 사전에 고지해야 할 거 아닌가.
거기에 안부를 전하는 말 몇 마디.
방금 막 있었던 걱정도 전하는 게 좋겠지.
그리고 무슨 문제가 있다면 이준구나 최승준 등지와 의견을 교환할 필요도 있겠고.
문득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살다살다 내가 몬스터와 인간 사이를 중재하게 될 줄이야.
성좌라고 해도 별로 다를 바 없고.
신에게 선택받은 대전사도 아닌 팔자에 이게 무슨 일인지.
문득 여기 오기 전 최승준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나를 편애한다, 라.'
확실히지금 이 모습만 보면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을 법했다.
심지어 다른 양반들도 그리 여기는 모양이고.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찾아왔을 리 없으니.
못해도 티아마트에게 나와 같은 권한을 받은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반증이다.
참으로 복잡한 일면이라고나 해야 할까.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창세신.
신들의 어머니이며 괴물들의 어머니.
동시에 사실 그 정체는 일찍이 죽음을 맞이한 여신의 이름을 계승한 후계자.
다툼을 피해 몬스터 국적을 써서 지상에 강림한 성좌.
자신이 살 터전을 위해 단신으로 밀입국한 외국인이며, 이를 위해 아이를 거두고 키운 어머니.
나의 손을 빌려 스스로의 의지로자식을 떠나보낸 존재요, 우리들의 협력자.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을 반기는 지모신이되, 일찍이 거기에 시달린 탓에 무조건적인 숭배를 꺼리는 피해자.
사람 인생이라는 게 다 그런 법이지만,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녀석의 이번 돌발 행동과 그 계기 또한, 나로서는 당장에 짐작할 수 없었다.
신들의 어머니로서 내린 결론일까, 괴물들의 어머니로서 내린 결론일까.
아니면 다른 얼굴을 쓰고 있다 떠올린 착상일까.
어느 쪽이든, 만나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겠다만──.
"애미."
본부장의 당부를 받으며 협회 최상층에 오른 다음 순간.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마디로, 개좆됐다.
당장 눈에 보이는 풍경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밖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최상층을 통째로 튼 층계.
그 한가운데 놓인 소파 위로, 티아마트는 조용히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분신이.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저기에 있는 건 녀석의 본체가 아니라 분신이었다.
일단 느껴지는 감각부터가 확연히 달랐으니까.
머릿속으론 알고 있었다.
애초에 녀석이 협회 최상층에 머무르고 있는 건 일종의 자계.
김민철과 관련된 사건으로 인해 다소 사회와 거리를 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협회 내에서도 티아마트를 물리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수단 따위는 전무하단 뜻이기도 했다.
테러리스트가 된 김민철에 대한 책임론을 운운할 수는 있어도.
정면으로 찍어누르려 한들, 그 힘부터 문제고.
티아마트의 본체를 사살도 아닌 제압 따위의 여유를 부리며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은 헌터 협회에도 없다.
애초에 나나 이준구, 최승준 따위를 제외하면 승산도 확실하지 않을 판국에.
S랭크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위.
말 그대로, 일개 국가의 총력을 다해도 부족할 상대.
그게 바로 녀석의 진정한 힘이다.
그렇기에.
녀석이 진정으로 협회의 시선을 피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어떠한 차질 하나 없이 이 최상층을 떠날 수 있겠지.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 머릿속으로 얼마 전 이 방에서 있었을 일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언제나 그렇듯, 다시 한 번 지상으로 분신을 파견한 티아마트.
그대로 분신에게 최대한 힘을 불어넣는다.
말 그대로, 본체의 힘마저 능가할 정도로.
분신의 한계조차 넉넉히 능가하는 마력.
거기까지 가면, 분신과 본체의 역학 관계가 뒤바뀌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말하자면, 분신을 이용한 위상 교환이라고 해야 할까.
분신을 만들고 분신과 본체의 힘을 뒤집는 것으로, 분체의 자리에 본체를 보내고 본체의 자리에 분체를 보낸다.
고작해야 그런 술수로, 티아마트는 제 자리에 가만히 남아 이 협회 최상층을 탈출했다.
사실, 협회를 탈출했다는 일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협회로서는 골치가 아플 일이겠지만.
여신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있으리라.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었다.
"뭣, 하필이면 어째서 지금 네 녀석이……?!"
당장 내가 여기에 올 줄도 몰랐던 듯한 녀석의 반응을 보면 더더욱 일목요연한 사실.
즉.
분신을 남겨두고, 본체는 몰래 협회 밖으로 빼돌린다.
이후 모든 면담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 녀석은 지금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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