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박우찬의 하루
* * *
중간고사가 끝나고 마침내 가을이 본격적으로 깊어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 사이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이준구와 협회장 사이의 협상. 최승준의 평소운 박사 회유.
어느 쪽이든 그럭저럭 순조롭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겐 여전히 의외일 따름이었다.
평소운 박사의 능력이 필요한 건 틀림없다.
애초에 법정 위로 세우기도 힘들다.
일찍이 있었던 이준구와 정부 사이의 거래를 깨트리는 게 되기 때문이다.
것보다, 놈들의 영향력을 고려해 보면 어차피 감옥에 잡아넣어도 머지 않아 빼돌릴 게 뻔하고.
덕분에 지금은 최승준 쪽이 고생하고 있다만…….
그 이상으로 이준구의 반응 쪽이 의외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약속을 깬 건 평소운 박사 측이다.
당연히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건만.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 거기에, 앞으로의 전황은 그녀의 힘이 필요해."
그렇게 말하고 자빠질 줄이야.
아니,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대단한 결심이고, 실제로 고결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제기랄, 그냥 뚜껑 따면 안 되나?'
물론 농담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게 있어인공 게이트 형성 기술이란 그토록 매력적인 물건이었으니까.
뭐, 현실이란 언제나 가혹한 법.
혹시나 싶어 떠보기도 했지만, 정작 환멸하는 시선만 되로 받았을 뿐.
결국 평소운이 강제로 제공한 기술들은 헌터 협회와의 거래 재료가 되었다.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이론 연구자가 개량한 마법.
이것만 해도 입에서 군침이 돌 지경인데, 추가로 인공 게이트 발생 기술까지?
비록 연구동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곤 하나, 만일 복원에 성공하면 인공 게이트 상용화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야 헌터 협회로서도 우리 쪽을 배려할 수밖에 없겠지.
입이 귀에걸릴 지경일 테니.
심지어 게이트까지 발생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피해 없이 불법 연구소를 장악했다는 공적도 있다.
게이트 운운하는 이야기는 공표하기 힘들다 치더라도, 후자는 틀림없이 대단한 성과다.
협회장의 시선이 호의적으로 변하는 일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뭐, 협회 쪽으로서는 우리가 협회장을 갈아치우고자 하는 계획을 진행한 적 있다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할 테고.
거기에, 사실대로 말하자면 예의 계획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만일 녀석들이 정말로 대침공을 일으키는 데에 성공한다면 가장 먼저 책임을 지고 사임할 자리니까.
협회 내에 한해선 꽤나 그럴듯한 권한까지 휘두를 수 있는 의자에 비밀 조직의 끄나풀이 앉는다는 참사.
우리로서도 그런 상황을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평소운 박사의 연구 결과물은 나름대로 제 역할을 다한 셈이었다.
연구소를 공략한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내게 마법의 소양은 없다.
지식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오컬트는 보통 학문에 담긴 사상이나 철학과 등가.
별다른 생각 없이 몬스터만 죽이고 싶은 내게 차분히 수양을 쌓는다는 건 도저히 몸에 맞질 않았다.
허나, 평소운 박사의 연구소에서 발견한 마법들 중 일부는 나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 몇 있었다.
개중에서는 내가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신체 강화 따위도 있었으니까.
물론 이론 연구자 특유의 허례허식 가득한 구성이라는 건 변함 없음.
그렇지만, 평소운 박사와 달리 그녀의 스폰서들은 천재가 아니다.
덕분에 연구실 내에는 그런 스폰서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각종 술식 해부도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나조차 술식에 손을 댈 수 있을 만큼.
막말로, 내가 평소 사용하던 조악한 강화 마법과 전투에 사용하기 힘든 평소운 박사의 강화 마법.
전자를 후자에 가까운 성능으로 끌어올리는 것보단, 후자를 전자에 가깝게 깎아내리는 편이 쉽다.
당장 내겐 마술적인 지식도 없거니와, 하물며 후자는 참고서까지 있는 판국이었으니까.
그러므로 당분간 나는 술식 깎는 노인이 되어야 할 처지였다.
동시에, 생각한다.
평소운 박사의 연구소에도 하연이와 관련된 정보는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
그만한 극비 정보, 보안을 생각하면 문서로 남길 리 없다.
설령 만들었다 한들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챈 시점에서 최우선 파기 대상이었을 테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의문이 남는다.
평소운의 여유롭기 짝이 없던 태도를 고려해 볼 때, 평소운에겐 조직 회선으로 연락을 넣기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조직은 코빼기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몇 가지.
하나는 그들이 나를 비롯한 헌터들과 충돌을 피했다는 점.
퍽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이준구가 있던 시점에서 조직도 무력으론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총력을 동원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경우 십중팔구 몬스터도 포함되어 있을 거다.
이준구를 잡으려다 내게 쓸려나가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면 접근하지 않는 편이 정답이다.
하물며 내 체질을 모르는 저 쪽이 보기에 나는 공략 난이도 S랭크에 준하는 상황도 무난히 통과한 괴물 헌터.
도저히 내키는 일은 아니었겠지.
평소운 박사 또한 상당한 가치가 있지만, 그 정도 출혈을 감수할 수준인가 물으면 역시 회의적이다.
결과도 확실하지 않은 도박에 지나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그 자리엔 협회 출신 헌터들도 있었으니.
섣불리 부딪혔다간 협회 자체가 우리 쪽으로 넘어올 가능성도 있고.
놈들로서는 진퇴양난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두 번째 가설도 있다.
즉, 평소운 박사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건 이미 전부 뽑아냈다는 쪽이다.
물론 평소운 박사의 능력은 우수하다.
예의 비밀 조직 내에서도 필두 연구원을 자칭할 만한 지식은 있다.
그러나.
만약 평소운 박사의 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놈들의 플랜이 단순한 이론 상으로는 이미 완성 단계에 있다면?
그렇다면, 놈들에게 있어 평소운 박사는 아깝긴 해도 굳이 챙길 필요는 없는 패가 된다.
그러니 버렸다.
이런 가설이다.
……어느 쪽이든, 확언하긴 힘든 상황.
다만, 당장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출근하기 위해 조용히 눈을 떴다.
"니미."
그리고.
아직 새벽조차 밝지 않은 도시 너머로, 무심결에 내뱉은 욕지거리가 뿌옇게 흩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작달막한 단칸방 지하.
사람이라곤 고작해야 둘밖에 없는 이 하숙집에, 익숙치 않은 온기가 느껴졌다.
넘실대는 푸른 머리칼.
쏘옥 하고 한 아름에 안기 좋은 체구.
오밀조밀하게 갖춰진 이목구비.
눈을 뜬 내 앞.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고 일어난 내 품에 하연이가 안겨 있었다.
*
"죄송해요, 오빠."
아침이 밝아, 자하연도 눈을 떴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자하연은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
무어라 훈계하고자 입을 열었던 박우찬 또한 침묵할 수밖에 없는 마법의 말이었다.
사실, 자하연이 박우찬의 침소에 숨어든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족히 다섯 번.
요 근래, 벌써 다섯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던 셈이다.
그 때마다 박우찬은 자하연의 무방비한 행동을 지적하려 했으나, 언제나 이런 식으로 끝을 맺곤 했다.
거기엔 둘이 맺고 있는 다소 특수한 관계가 영향을 주고 있었다.
박우찬은 자하연의 후견인이다.
동시에, 호위이며 보호자이기도 하다.
예의 비밀 조직의 음모가 얽힌 사연에 의해, 협회로부터 밀착 호위가 필요한 상황에 처한 자하연.
거기에, 당시 자하연의 능력에 흥미가 있었던 박우찬.
둘의 이해가 일치한 덕택에, 이제 막 협회에 발을 들인 박우찬은 자하연의 전속 호위로 발탁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 둘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즉, 박우찬의 제자 된 신서아의 어머님이 운영하고 계시는 하숙집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눈 앞에서 남편이 잡아먹힌 충격에 서아의 어머님은 몬스터에 대한 PTSD가 걸리고 말았다.
때문에, 도시의 절묘한 변두리에 재건된 이 하숙집에선 철저할 정도로 몬스터와 관련된 물품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점이 박우찬의 마음에 쏙 들었다.
신서아에게 헌터로서의 기술을 가르칠 동안 머물렀던 이 장소는, 그대로 박우찬의 거점이 되었다.
제 2차 대침공이 종료된 이후에도 마찬가지.
개중에서도, 어떤 의미로는 서아네 어머님 이상으로 몬스터에 과민반응하기 십상인 박우찬이 선택한 건 반지하.
밖에서 가끔씩 보이는 몬스터 관련 퍼레이드조차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준구가 일찍이 말했듯, 반지하는 교육에 좋은 환경이 못 된다.
선택할 땐 좋았겠지만 말이지.
하물며, 지금은 가을.
새벽이 찾아올 때마다 묘하게 싸늘한 공기가 사무치는 계절이다.
"조금 추워서……."
그러므로.
박우찬으로선 저런 말이 나올 때마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람 몇 명 몸을 눕히는 게 고작일 단칸방.
제대로 된 침대 하나 없는 장소에서 추위에 떠는 아이를 향해 어찌 호통을 칠 수 있겠는가.
만약 박우찬이 그럭저럭 뻔뻔한 성품이었다면 도리어 크게 나올 수 있었겠지.
애초에 집 하나 없던 계집애.
데리고 사는 시점에서 이 이상 배려하고 말고 할 일도 없다고.
실제로 자하연 또한 박우찬에게 방을 바꾸자는 식의 요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허나, 박우찬은 묘하게 소심한 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하연이가 내게 폐를 끼치기 싫어 이런 일에선 입을 다무는구나 하는 감상이.
무엇보다 박우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도 없었다.
까놓고 말해, 집을 바꾸다 못해 새로 지을 만한 돈도 있었으니까.
문제는 요 최근 몬스터 소재를 사용한 친환경 건축 운운하는 건설사들 쪽이지.
반대로 말하자면, 취향 때문에 자하연으로 하여금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게 하고 있다는 부채감.
박우찬이 자하연에게 화를 낼 수 없는 근간엔 바로 그런 감정이 있었다.
그리고.
자하연은 그걸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집을 바꾸자는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일찍이 황윤하가 시작한 이야기로부터, 자하연은 어렴풋이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했다.
박우찬에 대한 연모.
어쩌면 박우찬이 자신을 통해 과거의 연인을 보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말조차 기쁘게 느껴지는, 연심.
말하자면, 이건 자하연 나름대로의 어프로치였다.
두 명이 눕기엔 적절치 않은, 어떤 의미로는 적절한 넓이의 단칸방!
그럭저럭 무르익고 있는 겨울!
거기에, 두 사람 사이의 신장차!
이 모든 여건을 조합하면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다소 순진하다고나 해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박우찬의 말마따나 무방비하다고 해야 할까.
자하연의 계책이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박우찬이 자신에게 손을 댈 리 없다는 믿음이 전제된 행동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만약 정말로 박우찬이 선을 넘으면 어떻게 할 건지.
그런 부분에 대해 진지한 고려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반대로, 박우찬이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었다.
'씨발, 이걸 어떻게 말해.'
그야 말할 수 있을 리 없지.
눈을 뜨면 그 앞에 보이는 얼굴.
조용히 닫힌 눈꺼풀 위로 우아하게 뻗은 속눈썹.
좁디 좁은 단칸방에 사느라 의식하기 힘든,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식하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박우찬.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그를 향해 느슨한 미소를 짓고 있던 소녀의 얼굴이 완연하게 잠든 모습은 무어라 말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눈을 뜰 때마다 당장 숨이 닿을 거리에 놓인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상대는 여고생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려 한들 매한가지였다.
새벽의 마력은 아직 어린 제자조차 여인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거기까지 의식하면 그 다음은 더더욱 고난이다.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의식하고 마니까.
예를 들면,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가느다란 신체.
예를 들면, 은은하게 물결치는 파도색 머리카락.
예를 들면, 조용히 온기를 전하는 사람의 피부.
예를 들면, 호흡할 때마다 느껴지는 향기.
예를 들면, 도를 넘은 부드러움까지.
까놓고 말해, 눈을 뜨고도 멍하니 바라본 적도 있을 정도다.
만약 자신이 몬스터를 죽인다는 쾌감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언젠가 한 번은 날을 잡고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노라 박우찬 또한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일단 아침부터 드세요."
"으, 으음."
……아무리 그래도 다섯 번.
자그마치 다섯 번이나 잠자리를 착각한다는 게 과연 가당킨 한 일일까?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도 산더미 같긴 했지만, 만약 그랬다가 자신의 기대와 다른 대답이 나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니, 애시당초 다른 대답이란 무엇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을 때마다, 박우찬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언제나 생각을 뒤로 미루곤 했다.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우찬을 바라보며 샐쭉 웃는 분홍빛 눈동자.
그 모습으로부터 간신히 시선을 돌리며, 박우찬은 눈 앞의 식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하연아. 아침 준비하기 힘들지 않니? 요 최근 피곤해서 그런 것도 있을 것 같은데……."
"아."
애써 돌린 화제.
혹은 발악에 가까운 저항이 단박에 진압당했다.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토하는 탄식.
덜컥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박우찬은 무심코 발 밑을 확인하고 말았다.
혹시나 염통이 떨어진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자 밑엔 아무 것도 없었다.
참으로 잔혹한 현실이었다.
'시발.'
도대체 뭐야, 이 분위기.
심장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박우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 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입맛에 안 맞으세요……?"
"아니, 맛이야 있지. 나야 뭐, 네가 힘들진 않을까 했던 거고. 음."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하연이의 요리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게 박우찬의 입맛을 길들인 하숙집 아주머니께 배운 솜씨 덕분이라는 건 그로서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후후. 다행이다."
아무래도 오늘 또한 아침 일로 말을 붙이긴 글러먹은 모양이다.
의혹 하나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결국 박우찬 또한 젓가락과 함께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런 박우찬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자하연.
요 며칠, 박우찬의 아침은 대개 이런 느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