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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121화 (121/371)

〈 121화 〉 스탬피드

* * *

……대지에 박힌 칼날을 뽑으며, 박우찬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각한 부상은 없었으나, 무리한 움직임을 취한 반동 때문이었다.

물론 이럴 때를 대비해 구비한 물건도 있었다.

창고 너머에서 꺼낸 최고급 포션을 입 안에 털어넣는다.

자칭이나마 엘릭서 운운하던 실력은 허언이 아니었던 걸까.

회복약이 혀끝에 닿자 삽시간에 몸 상태가 좋아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욱씬거리던 통증이 가시고, 그 자리를 묘한 권태감이 채운다.

자연적인 회복을 촉진하는 대신 마력을 소비해 신체를 재생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포션이라고는 했지만, 그 실체는 사실상 효과 좋은 회복용 마도구에 가까운 셈이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몸에 좋은 건 그야 이 쪽이겠지만, 반대로 이런 상황에서 사용할 만한 물건은 아니다.

물론 박우찬에게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발끝으로 땅을 툭 하고 걷어찬다.

그리고.

고작해야 사소한 동작 한 번으로 용맥에 접속한 박우찬은, 그대로 주변에 흐르는 마력을 갈취해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터무니없는 폭거.

혹은, 자살 행위.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헌터라면 충분한 시설. 몬스터라면 게이트의 제어권.

거기에 상당한 시간과 준비가 갖추어진 뒤에야 장악할 수 있는 게 바로 용맥의 흐름이다.

하물며, 저토록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제대로 된 여과 시설 하나 없이 자신의 몸으로 흡수한다?

자신이 바람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태풍에 몸을 던지는 일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당연하지만, 스탬피드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박우찬에겐 별다른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극한까지 발달한 감각이 능력을 휘두른다.

용맥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을 시추하듯 뽑아내, 여과하고 정제한다.

방금 전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태풍에 몸을 던진 헌터가 폭풍을 구성하는 바람 한 올 한올을 자신의 제어 하에 두는 듯한 위업.

그렇게 몇 초.

박우찬은 태풍의 제어에 성공했다.

사냥에 나서기 전과 완전히 동일한, 혹은 그 이상의 컨디션.

손을 쥐락펴락하며 스스로의 몸을 점검한 박우찬은, 이윽고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역시 대형종의 수렵엔 나름 손맛이 있다.

서아가 실컷 고생한 덕분일까?

더 이상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도 없었다.

덕분에 박우찬 또한 한층 상쾌해진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다.

'정상까지 가야겠군.'

일단 우두머리를 사냥하는 데엔 성공했다.

달리 마땅한 지휘 개체도 없는 상황이니, 강원도 지부 측에서도 별다른 문제 없이 스탬피드를 정리할 수 있겠지.

오히려 지금 자신이 내려갔다간 지휘 체계에 혼란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물며, 아직 해야 할 일도 남아 있었다.

'도주진.'

갑자기 자취를 감춘 도주진 헌터는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도주진 헌터가 우연히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스탬피드가 발생했다면 뒤늦게라도 합류하려 했을 테지.

그러나.

도주진은 아직까지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어떻게 된 걸까?

……아무리 그래도 단순한 변비였다고 웃어넘길 만한 시점은 지났다.

까놓고 말해, 박우찬은 도주진이 이번 스탬피드의 범인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근거는 없다. 이유도 모르겠다. 솔직히 짐작도 가질 않는다.

하지만 모든 정황 증거가 도주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식 재판에 회부할 수는 없겠지만, 심증을 가지기엔 추분했다.

'원래부터 끄나풀이었던 건가? 아니면?'

차라리 두두리와 싸우고 있는 틈을 노렸다면 명쾌하게 결론이라도 내릴 수 있었겠다만.

쯧,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만다.

시그니처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쁘게 베기.

이준구가 평하기를 일격필살. 최승준이 평하기를 병신같은 이름 도내 1위.

박우찬의 절초라면 설령 상대가 두두리라 해도 일격에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겠지.

허나, 이 뒤에 도주진이 남아 있다면 아무리 박우찬이라 해도 전력을 안배할 필요가 있었다.

여하간 지금 당장으로선 도주진의 목적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러니 지금은 정상으로 가야 한다.

하는 김에 겸사겸사 주변에서 대충 100마리 정도만 썰고 가도 좋을 테고…….

"아니, 씨발!!"

다음 순간, 박우찬의 손이 날렵하게 스스로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알싸한 통증과 함께 번쩍 정신이 들었다.

하여튼 이 놈의 감각은 이래서 문제다.

태연하게 헛소리로 변죽을 올리려 드는 판국이니 원.

고개를 털어 사고를 억지로 정리한다.

물론 외면한다고 해서 정말로 괜찮은 건 아니긴 했지만,지금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이제 막 거물을 썰어제낀 참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참을 수 있다.

어, 대충 10분 정도는?

방금 전 자신이 갈라버린 하늘 너머로 빗줄기 대신 떨어지는 화살비를 보며 박우찬은 그리 판단했다.

신서아로서는 때 아닌 고생길이 열린 셈이었다.

어쨌든.

간신히 살심을 다스린 박우찬은 산의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기 전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산 정상에는 협회가 세운 감시용 망루가 있었다.

도주진이 있다면 십중팔구 거기겠지.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몬스터를 상대로 심력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몸을 피할 만한 장소가 필요할 테니까.

무슨 수단을 사용해 스탬피드를 일으킨 건진 여전히 모르겠지만, 박우찬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설령 저들이라 해도몬스터를 피하기 위해선 별도의 수단이 필요할 거라는 사실을.

만파식적을 동원했다 쳐도 마찬가지.

고작해야 도구 하나로 몬스터를 억누를 수 있었다면 세계 각국은 이미 몬스터를 사육하고 있었을 거다.

전례만 봐도 그렇고.

몽마의 여왕은 물론이요, 신과 같은 구미호조차 귀수산을 제어하기 위해선 힘을 써야 했다.

일개 비밀 조직이 지분거릴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당당하게 공표해서 조직의 이름값을 높였겠지.

거기까지 가면 우리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테니.

……때문에.

끊임없이 사고가 회전한다.

결국 문제의 근간은 거기에 있었다.

도주진은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걸까?

본래부터 예의 집단의 끄나풀이었나?

아니, 그렇다고 말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작위적인 면모가 있다.

아카데미가 강원도 지부로 현장학습을 온 지금.

마침 거기에 예의 조직의 끄나풀이 있었다?

그런 우연이 없지는 않겠지.

다만, 그렇게 생각하기엔아무래도 방법이 너무 어설프다.

만약 처음부터 이런 일을 벌일 속셈이었다면 애초에 점심시간을 틈타 박우찬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으니까.

오히려 박우찬의 경계심을 살 뿐이고.

겸사겸사 강원도 지부가 저들과 결탁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은 덤이다.

즉, 본디 저들과 연이 없던 도주진에게 예의 집단이 접근했다는 쪽이 더 합리적인 이야기겠지.

문제는 도주진이 녀석들의 꼬드김에 넘어간 이유를 모르겠다.

도대체 녀석들은 도주진에게 무슨 제안을 건넨 거지?

그리고 도주진은 무엇을 바라고 저들에게 협력을 약속한 걸까?

박우찬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덧 그의 걸음은 산마루에 도착했다.

저 멀리 보이는 망루가 은은하게 불빛을 발한다.

'역시.'

흔적으로 보건대 역시 몬스터들도 망루까지 다가오진 않았던 모양이다.

주변에 쳐 둔 결계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단 대다수 몬스터가 마력을 쫓아 하산한 탓이겠지.

조용히 몸을 낮춘다.

보폭은 넓게, 젖은 땅 위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숨을 멈추고 시야를 멀리 둔다.

……주변에서 수상쩍은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마력 감지는?

'힘들겠지.'

박우찬은 그리 판단했다.

다름이 아니라, 스탬피드가 한창 진행중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이제 와서 감응 능력을 돌리려고 해 봐야 보나마나 몬스터에게 이목이 쏠리고 말겠지.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몬스터를 잡으러 튀어나가진 않을까 경계해야 할 판국이다.

때문에, 박우찬은 차라리 기습의 리스크를 감수하기로 했다.

망루 밑까지 거리는 10m.

평소의 박우찬이라면 한달음에 넘어갈 수 있는 간격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마치 태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거의 두두리를 상대할 때 걸린 시간만큼을 소요하고 나서야, 박우찬은 망루에 접근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때까지 도주진의 공격은 날아들지 않았다.

눈치채지 못한 걸까?

그렇지 않으면 이 쪽의 행동을 유도하고 있는 걸까.

망루의 벽에 등을 기대며, 박우찬은 문득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서아에게 자신이 어떤 몰골로 보일까 상상해버린 탓이다.

우두머리를 잡겠다고 나섰던 사부가 갑자기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다?!

큭큭, 박우찬 본인도 모르게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 어느 쪽이든.

'서아에게 보여주고 싶은 광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벽에 귀를 대고 의식을 기울이길 몇 초.

여전히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망루를 앞두고, 박우찬은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그리고.

"도주진 이 씨발 새끼!!"

천둥처럼 포효하며, 박우찬은 망루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짝을 걷어차며 구르듯 몸을 날린 박우찬.

재빨리 중심을 잡으며 그 안을 훑는다.

그 결과.

"씹."

어울리지 않게도, 박우찬은 경악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도주진은 박우찬의 상상 이상으로 예의 바른 녀석이었다.

박우찬의 부름에 저런 몰골이나마 모습을 드러낸 건 필시 그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서였을 테니까.

문짝 너머.

망루 위쪽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가운데에, 도주진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죽음의 향기.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여하간, 아무리 신체 강화 능력자라 해도 심장에 구멍이 뚫린 상태로 살아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때문에, 아주 잠깐이나마 박우찬의 머리도 하얗게 백열하고 말았다.

죽었다고?

누가?

도주진이?

왜?

범인이 아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샘솟는다.

그렇게, 다음 순간.

스탬피드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사냥꾼의 몸이 완전히 경직되고 말았다.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1초 남짓.

그러나 이 상황을 연출한 누군가에게 있어선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타앙!!

그리고.

스스로의 몸을 접붙이고 있는 먹구름 너머.

"쌤!!"

문득, 박우찬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낮고 무거운 격발음이 울려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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