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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103화 (103/371)

〈 103화 〉 가스라이팅

* * *

사실대로 말하자면, 애시당초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희의 입학에 예의 집단의 손길이 닿아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최승준은 이미 언론에 대고 혼혈조차 포용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때문에, 그들이 지희를 내버려두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

더 이상 손을 쓸 방법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그러므로, 다음 날 아침.

지희의 혈통이 만천하에 까발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게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탓이다.

오히려 왜 이제서야 그러는 건지 의문이 앞섰을 따름이지.

하지만.

"흐윽, 흐으윽."

교실로 들어오는 지희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치심에 빨개진 얼굴.

그 위로 글썽거리는 눈물.

내 예상과 달리, 지희에게 있어 이번 사태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연한 소리지.

정치적으로 타격이 없다, 실질적인 문제는 없다?

그건 나나 최승준같은 입장에 있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 않았던가.

이 녀석들은, 헌터라기보단 차라리 고등학생에 가깝다.

낙엽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상심하는 나이.

니미 창녀 소리만 들어도 상처일텐데, 니 애미가 창녀라서 너도 하프 창녀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야 상심할 수밖에 없겠지.

'골때리네, 시발.'

그렇기에, 아침 수업종에 떠밀려 교실을 뒤로하기도 잠시.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께서 다짜고짜 지희가 뛰쳐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을 땐, 마침내 올 게 왔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선생님, 자습 부탁드립니다!!"

"걱정 말고 가 봐요, 박우찬 선생. 거 참, 개학 초부터 고생하네."

다행히, 내 수업에 대신 들어가주시겠다는 분들도 계셨다.

덕분에 나로서는 걱정 없이 교무실 밖으로 내달릴 수 있었다.

아카데미 개교로부터 대략 반 년.

학생 문제에 치여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내 모습도 어느덧 익숙해지고 말았다.

또 누가 가출했냐며 뜨뜻미지근한 시선을 보내는 경비 아저씨의 입담에 적당히 응해주기도 잠시.

마침내 교문을 뜬 나는 천천히 능력을 가다듬었다.

지희가 어디로 갔는지, 거기까진 모르겠다.

다만, 예측할 수는 있었다.

'우연일 리 없지.'

이토록 절묘한 타이밍이니 더더욱.

여태까지 고의로 외면하고 있던 마력의 파장을, 삽시간에 직시한다.

그리고.

채 1초도 걸리지 않아, 도시 전체를 아우른 기감이 해답을 고했다.

허면, 뒤는 간단하다.

축지.

대지에 깃든 마력을 거세게 짓밟은 순간, 내 눈 앞으로 몽마의 여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엇?!"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몽마.

뭐, 아무래도 좋다.

다음 순간, 뽑아든 대검의 손잡이가 몽마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끄흑?!"

신음을 토하며, 그 자리에 무너져내리는 여자.

그대로 대검의 보조 손잡이를 쥐어, 사지를 겨눈다.

지희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무슨 속셈인지 모를 이 몽마부터 죽여버리고 생각하면 되겠지.

새파란 하늘 아래, 햇빛을 머금은 강철이 흉흉하게 이를 번뜩였다.

"……선생님?"

그런 내 손을 덜컥 하고 잡아챈 건, 당연히 몽마의 술책 따위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몽마 따위를 상대로 실수할 수 있을 만큼, 내 직감은 만만한 물건이 못 되었으니까.

낯익은 듯 낯선 목소리.

언제나 쾌활한 어조로 농담을 떠들곤 하던 목소리 사이로 배어 나오는 울음기가, 그토록 곤혹스러울 수 없었다.

울적한 어조. 거기에, 그 사이로 파고드는 비음.

잠시 갈등하던 나는, 곧 이를 갈면서도 순순히 대검을 수납하기로 했다.

비록 자세한 사정이야 모른다지만,아무리 그래도 자식 눈 앞에서 부모를 찢어죽이기엔 다소 거부감이 있었던 탓이다.

단지.

'넌 이제 뒈졌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교로운 타이밍이라니.

설마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마침 내가 몽마를 참수하려던 순간 지희가 여기 도착했을 리는 없겠지.

즉, 지금 이 상황은 십중팔구 눈 앞의 몽마가 준비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몽마의 여왕으로서 지닌 하위종에 대한 통솔 능력.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지만, 어느 쪽이든 지희의 선택지를 유도한 건 틀림없이 눈 앞의 이 여자겠지.

물론, 나로서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혹시 17년 만에 회개했다는 둥 개소리를 지껄였다면 과연 곤란했겠지만, 이제 마음 놓고 죽여버릴 수 있을 테니.

생각을 갈무리하며, 나는 마저 몸을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볼품없을 정도로 퉁퉁 불어버린 눈가.

그리고 그 너머로 코 훌쩍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얼굴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건 역시 순수한 당혹 뿐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담임 교사.

거기에…….

와락, 지희의 표정이 구겨진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듯했다.

단, 방금 전과 달리 그 가슴을 가득 채운 감정은 슬픔이 아닌 형언할 수 없는 분노 쪽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몸을 일으킨 몽마와 지희.

자매라 하기에도 지나치리만큼 흡사한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

류지희에게 있어, 지금 이 상황은 전적으로 예상 밖이었다.

안 그래도 요 최근 있었던 일 때문에 한층 심난하기도 했고.

거기에, 눈을 뜨자마자 그녀를 물어뜯고 있는 매스컴에 직면하기까지.

'어떻게? 아니, 누구야?'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역시 그런 쪽이었다.

물론, 침착하게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지.

지희가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

개중에서도 하루아침에 이를 매스컴에 공표할 수 있는 누군가.

거기에, 고작해야 일개 학생에 지나지 않는 그녀를 노려 저런 기사를 낼 만한 이유가 있는 세력.

이런 조건을 하나도 남김없이 만족하는 자들은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일개 여고생이 냉정하게 사고할 수 있을까 묻는다면,역시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겠지.

때문에, 지희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혹시 누가 배신한 거 아닐까?

동아리 애들 때문인 거 아니야?

아니면 혼인회에서 날 싫어하던 애들?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를 가득 채웠다.

마치 눈에 보이는 세상 전부가 그녀를 적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연하지만, 실제론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에서 그런 기사를 다루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혼혈은 차별의 대상이 아닌 미지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몬스터와 사람 사이에 아이를 둘 수 있다는 사실부터 그리 유명하지 않으니까.

알고 있는 사람도 적고, 설령 알고 있다 해도 단순한 서면 지식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겠지.

굳이 따지자면, 신기하다는 시선 쪽이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아카데미 내부로 들어가면 더더욱 그렇다.

여하간, 교장인 최승준부터 혼혈들의 입학을 적극 환영하겠다 공표한 입장이었으니까.

교사들은 물론이요, 헌터로서 최승준이 가진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학생들 또한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만약 대침공 도중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대침공이 끝난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침공의 기억조차 흐릿한 세대에게 있어, 혼혈은 몬스터의 첨병 따위가 아닌 조금 특이한 이웃에 가까웠다.

그러나, 당사자인 지희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분위기를 살피던 학생들 중 누군가 다소 부주의한 질문을 던진 바로 그 순간.

류지희는 자신의 이성 비슷한 무언가가 뚝 하고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학교를 뒤로한 채 거리를 싸돌아다니고 있었을 정도였다.

머리가 멍하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적인 사고만이 한층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자퇴. 퇴학. 차별. 납치. 생체 실험.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뇌리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렇게.

무작정 걸음이 향하는 대로, 혹은 누군가 이끄는 대로 걷던 지희의 발걸음이 멈췄다.

왜냐하면 그 눈 앞에 나타난, 다소 당혹스러운 풍경 때문이었다.

일단 선생님이 왜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다.

혹여 자신을 앞지르기라도 한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선생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박우찬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은 역시 그녀로서도 예상할 수 없었다.

늘씬하게 뻗은 신체.

자신과 엇비슷할 정도로 반짝이는 은백색 머리칼.

거기에 무엇보다도, 거울 속에서 자주 보았던 새빨간 눈동자.

……다른 누군가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몸 안에 잠든 피.

자신을 구성하는 절반이, 본능으로 고했으니까.

어머니.

인간들이 사용하는 단어와는 다소 색다른 의미를 지닌 말이, 마치 저주처럼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놀랐다.

흠칫,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떨렸다.

'인간들?'

지독한 위화감.

개미들, 혹은 고양이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전혀 관계 없는 종족을 묘사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알싸한 현기증이 눈 앞을 감싼다.

그렇기에, 류지희는 자연스레 그녀가 아닌 박우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어, 그래. 지희야, 오랜만."

"바로 어제도 만났는데요."

"그래? 너무 반가워서 착각했다, 야."

평소처럼 실없는 대화를 나눈다.

자신이 혼혈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며, 여기에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과.

그것만으로도 마음속 한구석에 담긴 불안감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러나.

까득, 억지로 이를 악문다.

동시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왜 여기 계세요? 거기 그 사람은 또 누구고."

대답은 물론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어딘가에선 다른 해답을 바라고 있었던 걸까?

자연스레 그런 의문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동시에,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방금 전,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은 이후 이상할 정도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다.

어째서 선생님이 여기에?

그것도 하필이면 왜 저 여자랑?

혹시, 나를 배신한 건──.

먹구름처럼 드리운 의혹이, 가시가 되어 심장을 후빈다.

그러고 보면, 박우찬 또한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오히려 내가 물어야 하는 거 아니냐? 너, 수업 도중 갑자기 뛰쳐나갔다며?"

"앗, 죄송."

"나야 이해할 수 있지. 있는데, 그래도 땡땡이치면 안 된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녀의 담임인 박우찬은 이런 상황에서 시시콜콜하게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박우찬이 여기 있는 이유 또한 따지고 보면 결국 땡땡이친 학생을 잡으러 온 것에 불과하다.

까놓고 말해, 혼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운운은 나중 이야기고.

만약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지희가 아니었다 해도, 박우찬은 똑같이 행동했을 테지.

그런 사실을 새삼스레 인식하자, 지나칠 정도로 요동치던 마음도 점차 잔잔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물을 줘 싹을 틔우려 해도, 씨앗조차 내리지 못할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는 법.

말하자면, 지희의 가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제가 만나보겠다고."

"시발, 뭘 말했다는 거야."

"아니, 말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그 옆에서 앓는 소리를 내는 여자의 모습만큼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 꾹 움켜쥔 옆구리.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상상보다 한층 파리한 인상의 여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가요? 지금 이 상황이."

가급적 그녀를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 지희와 달리, 몽마는 그녀의 마음 속으로 성큼성큼 발을 들였다.

양 손을 좌우로 던지며 과장스레 말하는 모습은, 특유의 미모와 더불어 마치 배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17년 전과 마찬가지에요. 몽마의 딸이라는 사실은,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죠."

자신을 둘러싼 생존자 캠프의 싸움을 그렇게 일축한다.

모성애 가득한 목소리.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헤어져야만 했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찾아온 거에요.제 딸이, 인간 사회에서 핍박받는 일 없도록."

한 명의 어머니로서.

일체의 망설임 없이, 몽마는 그렇게 단언했다.

딸.

그리고 어머니.

몽마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류지희의 심장을 조용히 저며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그녀에게 있어,저런 단어는 지독히 낯선 말에 지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이국의 언어로,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국의 수도 이름을 발음하는 듯한.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마의 말은 이상할 정도로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마치 마음을 직접 만지작대는 것처럼.

"그래요. 나는, 내 딸이 몽마로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고자……."

"아이, 씨팔."

"끄아아아악!!"

그렇기에.

다음 순간, 박우찬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자신과 지나치게 닮은 그 얼굴에 꽂혔을 때.

그 결과 오똑하게 서 있던 콧날을 주저앉히고, 100m 이상 날려버렸을 때에도.

류지희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어머니의 이름을 외쳐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존나게 시끄럽네."

물론, 그런 건 박우찬이 알 바 아니었다.

방금 전부터 시끄럽게 잔수작을 부리려던 몽마를 입 닥치게 한 뒤, 박우찬은 슬쩍 지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몽마에게는 안타깝게도, 그건 딸내미 앞에서 무심코 모친에게 폭력을 휘두른 날건달이 자신도 모르게 눈치를 살피고자 취한 행동 따위가 아니었다.

"어, 지희야. 방금 전 들었지? 아무래도 쟤가 네 애미라는 것 같거든?"

"네, 네?"

"그래서 그런데, 너희 애미 좀 죽여도 되니?"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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