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죽여 멸하는 신이로다
* * *
'뭐야, 이 새끼.'
자신도 모르게, 유성신은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구미호는 약한 몬스터라고 할 수 없다.
단순한 요술이나 주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동방의 몽마라 일컬어지는 매료 능력을 제해도, 구미호의 육체 능력은 비교적 탁월한 편이었다.
여하간, 용왕의 비늘을 꿰뚫고 그 모가지에 이빨을 박아 넣을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힘. 둘 다 얼추 비슷하다.
속도. 순발력과 반응속도를 포함해, 짐승인 유성신 쪽이 훨씬 앞선다.
방어력. 저 쪽도 나쁘지 않은 방어구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만, 근골마저 몬스터인 유성신을 넘어설 수는 없다.
단순한 신체 능력이라면, 대다수 항목에서 유성신이 앞서고 있다.
그러한 사실들을 조합해, 유성신은 결론을 내렸다.
'못 이겨……!!'
힘은 비등하다. 저 쪽도 만만치 않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개중에서도 자신이 우위다.
속도는 상회한다. 오히려 뒤떨어지는 부분을 찾기 힘들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자신이 앞서나가고 있다.
방어력은 압도한다. 요호의 체모와 요술에 의한 방호는, 설령 계명주사를 동원한다 해도 쉽게 타도하기 힘들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어맞는 건 유성신 쪽이었다.
기술의 차이도 있다. 인간들이 검술이라 부르는 묘리가, 짐승의 발톱을 빗겨 흘린다.
단지.
만약 그 뿐이었더라면, 우위를 점하는 건 어디까지나 유성신이 되었겠지.
어지간한 달인이라면 또 모를까, 박우찬의 검술은 둘 사이의 육체적 간극을 능히 만회할 수 있는 수준까진 아니었다.
그러나.
박우찬은 검사가 아니다.
사냥꾼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유성신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애시당초, 자신의 육체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알았다.
자신 이상으로 요호의 신체 구조에 통달한 듯한 움직임.
휘두르는 검. 내딛는 발걸음.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요호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유도한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유성신이 휘두른 꼬리와 발톱이, 대검의 손잡이와 부딪혀 비산한다.
튕겨져나간 흉수.
마력을 깃들인 발톱이, 스스로의 꼬리를 할퀸다.
그리고.
유성신의 공격을 받아넘긴 결과, 마침 적절한 위치에 놓인 대검을 고쳐쥔다.
동시에, 내려베기.
꽈르르르릉!!
번뜩이는 칼날이, 노호성을 토해낸다.
음속의 벽을 뛰어넘은 결과 터져나오는 벽력성.
우레와 같은 강철의 포효가, 공기마저 찢어가른 탓이다.
그렇게.
서걱,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둥의 꽁무니에 달라붙긴 너무나도 빈약한 소음.
허나, 유성신도 박우찬도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박우찬에게 있어선, 승리로 이어지는 궤적.
유성신에게 있어선, 패배로 향하는 길이었으니까.
"캬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메아리친다.
성대를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
저토록 가련한 몸 어디에서 저런 성량이 나오는 걸까.
물론, 당사자인 유성신에게 물어도 좋은 대답을 기대하긴 힘들겠지.
오히려 대뜸 팔을 자르려 들 거다.
너라면 버틸 수 있겠느냐면서.
꼬리가 떨어져 나간 건 그만한 충격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다.
남은 꼬리는 일곱.
다시 말해, 구미호의 요력 중 2할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당장 도망쳐 회복에 전념한다면, 머잖아 회복할 수 있는 부상이다.
하지만.
"일곱."
표정 하나 확인하기 힘든 방독면 너머로, 담담한 목소리가 그리 고했다.
숫자를 세고 있다.
남은 꼬리의 숫자를.
아니, 그녀를 죽여버릴 수 있을 때까지 남은 횟수를.
방금 전, 저 사내가 입에 올린 숫자는 앞으로 남은 유성신의 구명삭이었다.
뿌득, 이가 갈린다.
퇴각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의 경종이 난동을 부린다.
실제로, 현명한 판단이다.
용에게 필적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미호에겐 용과 같은 자존심은 없었다.
여하간, 대다수 일화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게 그녀들의 역할이니까.
그러나.
쉬이이이익,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꼬리 위에 모종의 약물을 뿌리고 있는 박우찬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약물과 맞닿은 꼬리가 검게 물든 마력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대관절 무슨 영약인진 모르겠지만, 저 약품과 절단된 꼬리가 접촉한 순간 희미하게 남아있던 연결조차 녹아버리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야, 섣불리 도망칠 수도 없다.
어설프게 재생해도, 꼬리 속의 마력은 돌아오지 않겠지.
다시 말해, 평생동안 요력의 2할을 상실한 채 지내야 한다는 뜻이다.
……수련과 수행.
정당한 방법으로 꼬리 2개 분량의 요력을 새로 쌓을 때까지, 과연 얼마나 되는 시간이 걸릴까.
못해도 200년은 필요하겠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디서 이딴 새끼가 튀어나온 거냐고, 유성신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친 건, 역시 일전에 살해한 A랭크 헌터인지 뭔지 하는 놈이었다.
구미호가 요력, 다시 말해 마력을 보충하는 수단은 여럿이 있다.
평범하게 덕을 닦아, 스스로의 격을 높이는 것.
이에 비해, 다소 사술에 가까운 술책이 바로 간을 빼먹는 방법이다.
동서고금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장기인 간은, 요호들에게 있어선 일종의 영약처럼 작동한다.
서해 용왕의 간을 빼먹은 구미호에 대한 일화나, 100개의 간을 취해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
당연하지만, 여타 영약과 마찬가지로 간 또한영험한 기운이 담긴 쪽이 더 효과가 좋다.
예를 들면, 마력이 집적된 고랭크 헌터의 생간이라던가.
예의 헌터를 죽인 건, 고작해야 그 정도 이유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한 진실에 접근했다던가,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말하자면,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지닌 행동 양식.
생물로서 지닌, 자신을 보전하고 무리를 확장하기 위한 본능이다.
박우찬의 비유를 인용하자면, 짐승의 지혜라 할 수 있겠지.
남해 지부를 점거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사정도 없잖아 있지만, 그녀 개인으로서는 딱 그 정도.
어디까지나 헌터들의 신선한 생간을 얻기 위해서다.
'아직 협회 쪽엔 손도 대지 못했건만……!!'
때문에, 그녀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 된 밥상에 재 뿌리는 일도 정도가 있다.
눈 앞에서 진수성찬이 뒤집히는 꼴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러할까.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물론, 박우찬이 알 바는 아니었다.
독액이 잘려나간 꼬리를 물들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박우찬은 세심하게 꼬리의 모습을 확인하는 대신 다시 한 번 몸을 던졌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꼬리들.
하지만, 꼬리가 두 개나 잘린 탓에 유성신의 공격에는 빈틈이 있었다.
거기에 길이 있다.
축지.
정면으로 달려들었던 박우찬의 신체가, 꼬리로 이루어진 포위망을 빠져나간다.
'뒤!'
목 뒤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유성신은 까득 이를 물었다.
평소라면 그 어리석음을 질타하며 꼬리를 휘둘렀을 상황.
다만, 지금은 달랐다.
이미 두 개나 되는 꼬리를 내주고 말았다는 공포심.
거기에, 눈 앞으로 힘차게 휘두른 꼬리를 이제 와서 되돌리기도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 이번에는 몇 개나 되는 꼬리가 날아가게 될까.
결국 유성신 또한 억지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어?"
턱, 하고 발이 걸렸다.
물론, 발을 헛디딘 건 아니었다.
이토록 긴박한 전투 상황.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리가 있나.
당연히, 박우찬의 술책이다.
반 걸음.
평소보다 반 걸음 더 내딛는 걸로, 박우찬은 단번에 간격을 제압했다.
수많은 격투가들이 추구하는 보법.
충분한 기술과 경험이 있어야 처음으로 가능한 영역 단위의 제압을, 몬스터에 대한 지식으로 가능케 한 것이다.
요호종, 개중에서도 구미호의 특징.
꼬리가 가지는 중요성.
두 개의 꼬리를 잘라낸 현 상황.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빈틈.
인간형의 동체가 취할 수 있는 동작.
후방에 쏠리기 마련인 무게 중심.
이를 고려하면, 유성신이 뒤를 돌아보게 하는 건 실로 간단하다.
그렇게 반 걸음.
급히 뒤를 도는 다리 사이에 끼워넣어 무너지는 유성신의 얼굴에, 하는 김에 스트레이트.
동시에, 한층 더 심하게 비척대는 몸체를 제어하기 위해 억지로 꼬리를 세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면을 향해 휘두르고 있던 꼬리를, 강제로 제어하는 부담.
곧바로 박우찬을 공격할 수 있다면 좋겠다만, 반사적으로 무너지는 자세를 바로잡으려 드는 본능이 더해지면──.
"아."
털컥, 두 개의 꼬리가 엉키고 말았다.
물론 꼬리 좀 얽혔다고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고작해야 그런 이유로 머뭇대기엔 지나칠 정도로 강인한 육체 탓이다.
때문에.
다음 순간 일어난 일은, 유성신으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면으로 달려들며, 동시에 축지를 밟아 배후를 점한 박우찬.
직후, 뒤로 돌아서는 유성신을 넘어뜨리며 하는 김에 한 대 두들겨 팬다.
자세가 무너지는 요호.
거기에, 비상에 가까운 도약을 더한다.
땅과 수평으로 날아오른 몸이 핑그르 회전하며, 전력을 다한 참격이 작렬하는 건──.
공교롭게도, 마침 얽히고설키던 유성신의 두 꼬리다.
결과.
"여섯, 다섯."
촤아아아악!!
피가 흩뿌려진다.
박우찬의 참격이, 얽혀있던 두 개의 꼬리를 동시에 절단했다.
옆에서 보자면, 숫제 유성신이 공격을 향해 꼬리를 헌납한 꼴이었다.
말 그대로, 구미호의 신체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안 된다.'
결론은 빨랐다.
이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구미호였던 유성신에게, 용과 같은 자만심은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방심하고 있었다.
얕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꼬리를 헌납했을 땐, 당황.
다음으로 꼬리를 헌납했을 땐, 곤혹.
그렇다면.
세 번째는 어떠한가?
단번에 뭉텅 하고 끊긴 꼬리들을 내려다본다.
요력의 태반을 잃은 지금, 유성신은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백병전에서 이기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다.
이 남자, 자신보다 격상이다……!!
다음 순간, 요호의 주변으로 마력이 휘몰아쳤다.
어설프게 인간 모습으로 의태하고 있어서야, 이길 수 없다.
최소한, 익숙하지 않은 인간태는 벗어던져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병신.'
틀린 판단은 아니다.
단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최악의 선택이다.
마력이 불어닥친다.
유성신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까지, 잘해야 1초 남짓.
그리고.
이런 조건 하에서라면, 박우찬은 1초 안에 유성신을 도륙낼 자신이 있었다.
"넷."
실제로도 그러했다.
본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유성신의 꼬리가,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박우찬이 베어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애병에 달린 대못을 사출해, 꼬리 중 하나를 바닥에 꿰어 고정한다.
그렇게 되면, 뒤는 베어버릴 필요도 없다.
바닥에 꼬리를 고정하는 힘과,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힘.
양 쪽으로 잡아당긴 고무줄처럼,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꼬리.
이윽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유성신의 육체에서 꼬리가 뽑혀나가고 만다.
구미호적, 혹은 폴리모프적이라 해야 할 자살행위였다.
물론, 박우찬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대지에 꼬리를 못박은 직후, 박우찬은 다시 한 번 몸을 날렸다.
높이뛰기라도 하듯, 유성신의 머리 위를 지나치는 사냥꾼.
그런 박우찬의 눈에, 고작해야 네 개밖에 남지 않은 꼬리가 눈에 들어온다.
의태니 뭐니 말은 요란하다만, 결국 그 본질은 단순한 변신에 지나지 않는다.
허면, 반대로 묻자.
만약 자신이 독수리로 변신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변신하려 할까?
십중팔구입을 부리로, 팔을 날개로 변신시키겠지.
설마 엉덩이를 부리로, 입을 깃털로 삼는 변태가 세상 천지 어디 있겠는가.
절대 없을 거다.
구미호 또한 마찬가지다.
애초에, 변신이란 동서고금 변신 전의 모습과 동떨어진 형상으로 변하려 하면 할수록 힘이 드는 기술.
앞다리를 손으로, 뒷다리를 발로.
필시 그런 식으로 변신했을 테지.
다윈 선생께서도 그러실 거라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당연히, 꼬리의 위치 또한 읽을 수 있다.
의태가 풀리기까지, 대략 1초.
박우찬은 대검의 보조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셋, 둘, 하나."
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
다음 순간, 유성신은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주저앉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의태는, 해제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제할 수 없었다.
의태를 해제하기 위한 술식을 다룰 최소한의 마력조차 거덜났기 때문이다.
톱날을 켜, 꼬리를 갉아 끊었다.
끌을 후벼파, 여우의 동체에서 꼬리의 뿌리를 도려냈다.
대패를 밀어, 꼬리의 거죽을 잡아당겨 꼬리뼈 채로 뽑아냈다.
칼날을 휘둘러, 요호의 꼬리를 걸고 그대로 밀어 잘라냈다.
문자 그대로, 당장 눈 앞의 몬스터를 해체하기 위한 해체술 일체.
그 극한이라 부르기에 부족함 없는 기예였다.
……화려한 테크닉과는 거리가 멀지만, 본디 사냥꾼의 전법이란 이러한 법.
눈 앞의 개체에 맞춘 해체술을 구사해, 말 그대로 해부한다.
시그니처 이상으로 박우찬이 의지하는 수렵기???다.
그렇게.
마침내 눈 앞에는 마력의 9할을 잃어버린 요호 한 마리만이 남았다.
"자, 잠깐!!"
그런 박우찬을 향해, 유성신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정신없이 흙바닥을 걷어차는 꼴이 퍽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힘의 9할을 잃은 상황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냥꾼의 모습이란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성신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이.
힘은 잃었다.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일조차 여의치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상실이었다.
사실, 힘으로 밀어붙여도 당해낼 수 없겠지.
그래도 아직 남은 게 있었다.
무엇을 숨기랴, 바로 이 미색이다.
"머, 멈추라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허나, 박우찬은 멈추지 않았다.
무거운 발소리가 귀수산의 등을 울린다.
아무래도 저 쪽 또한 슬슬 싸움이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마치 남의 일처럼, 박우찬은 그리 생각했다.
"그, 그래!! 궁금하지 않은가?! 내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벌인 건지!!"
"딱히."
"허, 허면!! 바라는 건 없는가?! 여우의 지혜를, 요호의 힘을 원하지 않느냐?!"
매정한 대답에도, 여우신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오히려 좋다.
방금 전처럼 말 하나 통하지 않는 상황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인간형 몸체에 남은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 혀끝에 매료의 힘을 덧붙인다.
요설이라 불리는, 매력적인 말의 힘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진,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
단지.
지금 이대로 있으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 뿐이리라는 확신.
알싸한 죽음의 향기가, 여우신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인은 어떠하냐?! 원한다면 이 몸을 주마. 얼마든지 탐미해도 좋다! 감히 단언컨대, 이 몸은 천하의 절색일 터. 사람의 몸으로 유성신을 쓰러뜨린 그대를, 내 부군으로 삼으리……!"
그리고.
뚝 하고, 그제서야 박우찬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화색이 도는 유성신.
다만.
그녀에게는 공교롭게도, 박우찬이 멈춘 이유는 단 하나.
요호가 간격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 어떻지?"
"실베스테르, 난 타협하지 않아."
"……?"
"이 칼은 눈 앞에 몬스터가 있으면 베어야 해."
아니, 실베스테르가 뭔데 씹덕아──.
그렇게 말할 틈도 없었다.
왜냐하면.
다음 순간, 참수당한 여우신의 모가지가 붕 하고 하늘을 날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을 거라곤 마지막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얼굴.
요력의 태반을 잃은 끝에, 사냥꾼이 휘두른 칼날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구미호의 죽음이란 이토록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남해의 수많은 섬들을 들썩이게 한, 움직이는 섬에 대한 이야기도 어떻게든 일단락이 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