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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97화 (97/371)

〈 97화 〉 죽여 멸하는 신이로다

* * *

물론, 귀수산의 중심에 똬리를 튼 요호들의 우두머리는 박우찬의 강습을 알고 있었다.

여우비를 찢으며 달려드는, 거대한 마력 덩어리.

귀수산에 걸어둔 환술이 통째로 무산당하는 상황에, 모르기도 힘들었다.

때문에, 요호굴의 터주는 무리를 끌어모았다.

어차피 우왕좌왕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녀석들이다.

이제 와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돌아가도 이미 늦었다.

그렇기에, 우두머리는 허겁지겁 달려든 요호들을 역으로 자신의 밑에 편제했다.

귀수산을 향해 다가오던 마력은, 도합 7기.

전장의 이점을 고려하면, 유리한 건 자신들이다.

얻어걸린 격이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박우찬에겐 다수의 적을 단번에 제압할 만한 기술 따위는 매우 드물었으니까.

박우찬은 어디까지나 사냥꾼Hunter.

화려하게 날뛰는 건 그의 역할이 아니다.

문제는, 당사자인 박우찬 또한 이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안녕하예쁘게 베기!!"

다음 순간, 작렬한 검섬이 일대를 베어 갈랐다.

뎅겅, 요호들의 모가지가 날아오른다.

여하간, 불리한 상황이라는 건 틀림없다.

박우찬 자신도 강력한 단일 개체를 상대하는 거라면 모를까, 다수를 상대하는 건 비교적 서투르다.

지형의 이점도 저 쪽에 있다.

그렇지만.

굳이 어울려줄 필요는 또 없다.

애초에, 단순한 감지력은 박우찬이 위.

요호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알고 있었다.

리스크는 있지만, 지금은 몰살이 우선.

그리 결론지은 결과가, 지금 눈 앞에 있었다.

후두두두둑.

핏물이 튄다.

요호의 피로 빚은 여우비가 내린다.

동시에, 둘로 동강난 나무들이 만세 삼창하며 하늘을 수놓는다.

이윽고, 낙하.

나무들의 상반신. 나뭇가지. 나무의 몸통. 요호의 머리통.

귀수산 위에 애써 구축한 여우들의 둥지가, 삽시간에 민둥산으로 되돌아간다.

지금쯤 귀수산 공략에 착수하고 있을 제자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깔끔한 솜씨였다.

단 일격에, 천이 넘는 요호가 참수당한 시체 꼴이 되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우찬은 영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 선빵은 안 좋다니까.'

선빵필승이라는 말도 있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다른 법.

누차 말했다시피, 시그니처란 헌터 개개인의 능력을 극한까지 규명한 기술이다.

그리고.

괴물 죽여서 칼밥 먹는 놈들의 성질을 체현한 기술이니만큼, 대다수 시그니처는 살상력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론상 무적.

문자 그대로, 한 번 휘둘러 전장에 결론을 내리는 성명절기.

소위 말하는 A+랭크 이하 헌터들의 시그니처를 '미완성'이라 폄하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빈틈이 있으니까.

확실하게 몬스터를 죽여버릴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면, 감히 시그니처라는 이름을 참칭할 수 없다.

어떤 의미로는 꼰대짓에 가까운 발언이긴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이론상 무적인 시그니처조차 파훼당하는 경우는 더러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이준구의 시그니처.

뇌속으로 후려갈기는 스트레이트조차 마찬가지다.

벼락의 속도로 작렬하는 일격을, 정면에서 버티는 괴물이 있다.

창천에 울리는 우렛소리에도, 반응하는 녀석들이 있다.

완성된 시그니처라 해도, 결국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S랭크 헌터의 집대성.

만해를 같은 만해로 받아칠 수 있듯이, 대등한 S랭크라면 이론상 무적이라 일컬어지는 시그니처를 정면에서 타파할 수도 있다.

지금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턱.

머리 없는 몸통이, 떨어지던 머리를 받아든다.

그리고 제 모가지가 잘린 단면에 슥 하고 올리니,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달라붙는 게 보였다.

바야흐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외견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뚜둑, 어긋난 머리통을 붙잡아 고정하는 소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스물은 되지 않을 그녀에겐,동년배의 계집애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점이 두 가지나 있었다.

하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요염함이요, 하나는 두개골 위에 불룩 솟은 여우귀였다.

평소라면 왜 여우귀가 있는데 사람 귀도 있는 건지, 무슨 용도라도 있는 건지 궁금해했겠지만…….

대신, 박우찬은 칼을 당겼다.

'주술이로군.'

자신이 입은 피해를 제물에게 떠넘기는, 다소 전형적인 주술이다.

특징적인 건, 역시 그 완성도겠지.

1대 1이었다면 모를까, 광역 섬멸을 위해 휘두른 시그니처로는 저 주술까지 베어낼 여력이 없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는 여력을 확실한 몰살에 돌렸다고 해야 할까.

허나, 그렇다 쳐도.

자신의 시그니처조차 일격에 베지 못했을 만큼 완성도 높은 주술.

거기에, 이 오싹한 감각.

'S랭크인가.'

그리 결론내렸다.

예상했던 경우 중 최악의 상황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당시 귀수산을 움직이게 한 건 죽어서 호국대룡이 되겠다 선언한 문무왕.

몬스터로 따질 경우, 최소 B랭크.

문무왕이라는 준걸이 얽힌 걸 생각해 보면, 적어도 A랭크에 준하는 힘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귀수산을 움직이고 제어하기 위해선 A랭크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때문에, 가장 먼저 요호들의 우두머리라 의심한 건 역시구미호였다.

거타지 설화에서도 등장하듯, 성체가 된 용에게도 필적하는 강함.

실제로 협회 또한 구미호를 최소 A랭크 몬스터로 분류하고 있는 실정이니까.

다만, 아무리 그래도 S랭크라니.

이건 조금 예상 밖이다.

물론, 박우찬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건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는 한복 너머로, 넘실대는 아홉 꼬리가 선명히 보였으니까.

"유성신?"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을 입에 올린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요호가 순식간에 인상을 폈다.

유성신.

송나라 대에 편찬된 속에서 등장하는 천호??다.

당나라의 도사, 나공원에게 몇 번이나 그 술책을 파훼당한 여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사 나공원조차 천호의 영역에 이른 유성신을 죽일 순 없었으니.

결국 나공원은 붙잡힌 유성신을 동쪽 끝 신라에 풀어주어, 이후 신으로 섬기게 하였다고 한다.

전설 자체는 어디까지나 평이하기 짝이 없다.

태평광기 속 등장하는 수많은 천호들과 그 맥락을 같이할 뿐.

그러나.

유성신이 그런 천호들과 궤를 달리하는 건, 바로 그 본질에 있다.

여타 천호 설화들과 달리, 유성신은 당시 한반도 남부에서 섬겨지던 여우 신앙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도래인들이 한반도를 떠나며 일본 열도에 전파한 여우 신앙.

일본의 여우신을 비롯, 수많은 여우 전설의 근간이 된 오래된 요호신.

그게 바로 유성신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짜증에 젖었던 그녀의 기분이 삽시간에 회복된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막말로, 이 시대에 유성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자가 세상 천지에 몇이나 되겠는가.

비록 예의 하나 없는 기습 탓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주물이 박살나긴 했으나, 만일 자신의 신도라 한다면 용서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박우찬에겐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다.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반응으로 보건대,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정체를 추론하기 위해 들여야 할 시간을 절약한 셈이니, 오히려 이득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므로.

다음 순간, 박우찬은 앞으로 전진했다.

동시에, 내던진 철구가 유성신의 얼굴을 향해 작렬한다.

쿠우웅!!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해야 할지, 제대로 된 피해는 입히지 못했다.

왜냐하면, 눈 앞의 소녀와는 마치 별도의 생물인 것마냥 움직인 꼬리가 쇄도하는 철구를 쳐냈기 때문이다.

콰자자자작!!

박우찬의 시그니처가 작렬했음에도 불구하고, 멀찍이 남아있던 숲에 대로가 뚫렸다.

요호의 꼬리가 튕겨낸 쇠구슬이 만들어낸 참상이었다.

당연히, 유성신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스스로의 피로 적신 저고리 탓에 한층 섬찟한 광경이었다.

박우찬이 고려할 사항은 아니었다.

놀러 온 게 아니다. 장난을 치러 온 게 아니다.

하다못해, 대화를 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박우찬은 이기러 왔고, 그 이상으로 죽이러 왔다.

대기를 가르며, 칼날이 날아든다.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던 요호 또한, 당장엔 괴성을 내지르며 응전할 수밖에 없다.

요력이 담긴 꼬리 중 하나가, 박우찬이 휘두른 대검과 격돌했다.

요호의 마력 덕택에, 유성신의 꼬리를 덮은 체모는 그 한 올 한올이 강철을 상회하는 경도를 자랑한다.

거기에, 요호에게는 앞으로 여덟 개나 되는 꼬리가 있었다.

박우찬의 사지오체를 부수기 위해 작렬하는 여덟 꼬리.

정면에서 박우찬을 참수하기 위해 번뜩이는 여우의 손톱.

도합 열 개의 공격이, 박우찬을 덮친다.

물론.

공격 수단의 갯수로 몬스터의 강함이 결정되었다면, 헤카톤케이레스는 A랭크가 아니라 S랭크 몬스터였겠지.

세상 만사, 리스크와 리턴이 있는 법.

이런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손잡이를 붙잡은 박우찬의 검이, 신묘하게 움직인다.

롱소드와 같이, 깔끔한 회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 반대.

검을 맞대고 있던 여우의 꼬리를 억지로 밀어내며, 전신에 회전을 넣는다.

동시에, 칼날의 궤적을 수습.

대검을 회수하는 동작과 함께, 검끝을 흩뿌린다.

떠밀린 꼬리. 튕겨져나간 대검.

그리고 여기에 부딪힌 요호의 신체 각부가, 서로 좌충우돌하며 얽히고설킨다.

결과적으로, 도합 10회에 해당하는 여우의 공격 중 박우찬의 몸을 스치기라도 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바야흐로 공방일체.

서양에 전해지는 대검술의 묘리와 같이, 대검을 회수하는 동작이 공격이 되고 방어가 된다.

그렇게 발생한 공백.

유성신의 지근거리에 발생한 때 아닌 안전지대 속에서, 박우찬의 팔뚝이 불거졌다.

아직 회전의 기세가 남은 대검이, 시린 금속음을 토해냈다.

"자, 잠깐!!"

물론, 멈추지 않았다.

올려베기.

솟구친 섬광이, 아슬아슬하게 유성신의 눈가를 할퀴고 지나갔다.

단, 빗나간 건 아니었다.

철퍽, 섬뜩한 소리.

고깃덩이가 바닥에 추락하는 소리와 함께, 유성신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요력의 1할이 증발했음을 깨달았다.

방금 전, 박우찬이 휘두른 일격이 유성신의 꼬리 중 하나를 앗아간 것이다.

"뭐, 꺄아아…… 컥?!"

되지도 않는 비명을 내지르는 유성신의 주둥아리에, 박우찬의 오른쪽 주먹이 쳐박혔다.

굳이 필요한 동작은 아니었지만, 인간 모습으로 짖어대는 게 기분 나빴기 때문이다.

우두둑, 근골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장갑 위로 피가 튀었다.

유성신의 이빨이 부러진 탓이다.

황급히 거리를 벌리는 유성신.

그런 유성신의 뒤를 쫓는 대신, 박우찬은 창고에서 꺼낸 용액을 듬뿍 부었다.

마력을 부식시키는 독이다.

그리스에서 나타난 A+랭크 몬스터, 히드라의 독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물건.

불로불사인 신들조차 괴롭힌다는 끔찍한 고통으로 인해, 이럴 때에는 퍽 쓸모가 있었다.

재생을 방해할 수도 있거니와, 잘린 꼬리를 통해 주술을 사용하는 일도 막을 수 있으니까.

'남은 건 여덟.'

슬쩍, 꼬리의 숫자를 센다.

공교롭게도, 유성신에게 별다른 약점은 없다.

나공원 도사가 사용했다는 부적 따위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요 며칠 사이 그런 걸 준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지만.

'구미호라는 종의 약점까지 벗어난 건 아닌 모양인데.'

구미호는 꼬리에 요력을 담아 저장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꼬리를 자르는 데에 성공할 시 마력까지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위한 시험이었지만, 아무래도 나름 잘 된 모양이다.

눈 앞에 있는 유성신의 기세가 완연히 줄어든 게 피부로 와닿을 정도였다.

칼날에 발라둔 계명주사 때문일까, 꼬리를 베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비싼 값은 하는군.'

결국, 구미호와의 싸움은 양파 껍질 벗기기다.

얼마나 많은 껍질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는가?

아홉 겹이나 되는 껍질을 벗기는 동안,조바심에 등 떠밀리는 일 없이 작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박우찬은 아주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조급함에 잡아먹히는 일 없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같은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비록 시그니처를 사용한 탓에 오한이 들거나 머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다.

상대는 고작해야 S랭크 몬스터.

딱 적절한 패널티다.

스스로를 북돋기 위한 허세인가, 그렇지 않으면 진심인가.

구구절절 스스로의 마음을 분석하는 대신, 박우찬은 다시 한 번 검을 고쳐쥐었다.

"아니, 잠──."

그리고.

요호가 무어라 지껄이려는 틈을 타, 박우찬은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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