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움직이는 섬
* * *
'아니, 뭐야 이거.'
그리고.
남해로 내려가는 길, 신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 뇌까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휴가를 확보했을 때까진 좋았다.
절묘한 판단이었다고 해야 할까.
아카데미의 교직원 대다수는 전직 내지 현직 헌터.
협회에서의 의뢰를 핑계로 휴가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 정도는 당연히 제공하고 있었다.
다만.
예상대로 흘러간 건 딱 거기까지.
자신이 처음 계획했던 여행과 지금 이 상황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하간, 신서아는 다른 여학생들을 데려갈 생각 따위 없었으니까.
당연한 이야기.
그녀에게 있어, 이번 제안은 다소 과감한 데이트 신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정사실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 여행에, 다른 여자를 데려가는 얼간이는 없다.
학생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허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법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단 박우찬이 놓인 상황 자체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자하연.
설마 이 맹랑한 꼬맹이가 따라올 줄이야.
자신도 모르게 바득바득 이를 가는 신서아였지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며칠이라곤 해도, 남해 멀리까지 내려가는 여행.
사부의 능력을 고려해 봐도, 도저히 커버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호위 임무인지 뭔지, 여고생을 하숙집까지 데려와 키우고 있는 시점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
물론 신서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
바다 찍고 오는 김에 기정사실까지 만들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여자다.
냉정하게 머리가 굴러갈 리 있나.
연심이란 이토록 맹목적인 법이었다.
하여튼, 자하연의 합류로 인해 신서아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신서아가 보기에, 자하연이라는 저 꼬맹이는 썩 위험한 면모가 있었다.
유달리 경게심이 강한 신서아였기에 알 수 있는 사실.
저 꼬마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거기에 그 이상으로 사부를 바라보는 시선은, 영 범상찮았기 때문이다.
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조차 확실하지 않은 감정.
때문에, 억지로 자하연이 있는 하숙집에서 거리를 두고쐐기를 박을 생각이었지만…….
'설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이야.'
그 시점에서, 신서아는 이번 밀월 데이트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자라 할 수 있는 여고생 앞에서 그런 걸 노리기엔 사람이 염치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지만, 역시 여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봉고차 안.
박우찬이 이번 의뢰를 위해 대여한 렌트카는, 좌석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붐볐다.
거기엔 언젠가 그녀 또한 본 적 있던 이들이 줄줄이 들어차 있었다.
본인과 자하연을 포함해, 박우찬이 동아리에 속한 학생들 전원.
추가로 같은 처지인 중동 출신 교생, 티아 씨까지.
다름이 아니라, 반쯤 자포자기한 채 더 부를 사람이라도 있느냐 물은 결과물이었다.
물론 박우찬으로서는 단순히 김민철 사건에 대한 마음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였지만…….
당연히, 자하연이나 신서아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숙집 임시 동맹이 결성되었다.
동아리 애들을 부른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생각하는 건 명백했으니까.
어떻게든 바닷가 데이트를 흐지부지하게 만든다!
덕분에 동아리 실습이라는 핑계로 휴가를 한층 더 쉽게 잡을 수 있었다는 소소한 장점도 있긴 했다.
뭐, 그거야 어쨌든.
대략적인 암투를 끝낸 지금, 신서아는 다시 한 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좋답시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잖아, 이거.
해변가에서 1대 1 데이트 대신, 봉고차 옆좌석에 만족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국 손해만 본 거 아니야?
연거푸 마른 세수를 반복하다 보니 한층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몰래 수영복까지 샀는데!!
소리 없는 아우성이 메아리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봉고차는 시원스레 도로를 타고 남해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지만.
*
헌터 협회 특징, 복지 존나 잘 되어 있음.
세상에, 씨발.
살다살다 협회 의뢰를 핑계로 휴가를 받을 수 있을 줄이야.
내 생각에, 헌터 협회는 신이다.
어쩌면 고대의 예언자가 협회의 존재를 예측해 창안한 개념이 신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적어도 성좌라 자칭하는 몬스터보단 훨씬 더 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런 식으로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가운데, 우리들은 남해 인근에 도착했다.
차로 치어죽이지 않으면 뒈지질 않는 몬스터를 매장하기 위해 딴 면허가 이런 데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나중에 차나 한 대 뽑을까?'
몬스터의 기습에 취약하다거나, 내가 달리는 게 더 빠르다거나.
여러 문제가 산재한 물건이었지만, 이럴 때 보면 참으로 편리한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여하간, 내가 전원을 업고 뛸 수도 없으니까.
머릿속으론 멋들어지게 페라리 한 대를 뽑은 내 모습을 상상하며, 스포츠카 대신 렌트카의 키를 뽑는다.
동시에, 다시 한 번 주욱 시선을 훑었다.
마치 좀비처럼 휘적휘적 렌트카 안에서 기어나오는 녀석들.
표정 한 번 볼만했다.
'처음엔 나랑 서아만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하연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서아가 갑자기 더 부를 사람 없냐고 물어봤을 땐 깜짝 놀랐다.
일부러 바닷가 근처 의뢰로 잡았다길래 영락없이 놀아제낄 생각이라 짐작했었는데.
엄청 제대로 헌터 활동 뛰고 있었구나.
사부로서 면목이 없을 지경이다.
"자, 다들 주목!"
짝짝, 가볍게 박수를 치자 곧장 내게로 이목이 쏠렸다.
본래 이런 역할은 의뢰를 맡은 당사자인 서아가 하는 게 좋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인원이라면 아무래도 서아에겐 거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고.
반대로, 서아네 인맥을 동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뭐? 길드? 못 봐, 전부 감옥 갔어!
때문에, 이번에는 거의 떠밀리듯 정리역을 맡게 되었다.
뭐, 서아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감찰 및 토벌.
그렇게 생각하면 정리역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있을 수 없는 판단까진 아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내색하지 않고 녀석들의 안색을 살핀다.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들 중 한 명인 서아와의 동업.
혹은, 앞으로 녀석들의 경력 한 줄을 차지할 정식 의뢰.
어느 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의 눈은 퍽 또랑또랑하기 그지없었다.
"알고 있겠지만, 오늘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니다."
"어, 진짜요?"
"나 수영복 가져왔는뎅."
"조용!"
크윽, 시발.
헌터로서의 의무감 운운하는 생각을 하자 마자 저런 반응이라니.
내심 부끄러움이 샘솟았다.
아무리 현역 헌터와 생도라는 차이가 있어도 그렇지, 이렇게 의식의 차이가 클 줄이야.
서아를 보기 부끄러울 지경이다.
뭐, 어쩔 수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 모인 계집애들은 태반이 고등학생이고.
게다가, 의뢰에도 특필할 만한 부분이 적다.
남해에서 지속적으로 관측되고 있는 특이한 현상에 대해 조사하고, 보고하라.
영 심심한 의뢰다.
물론 이런 의뢰들도 자칫 잘못하면 어마어마한 피해를 낼 수 있는 게 바로 이 업계지만, 아직 학생인 녀석들로선 실감하기 어렵겠지.
다만.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건진 대충 알겠는데, 다들 기억하지? 이 의뢰를 받은 건 어디까지나 여기 있는 신서아 헌터다."
"네! 신서아 헌터입니다. 그 때도 말했지만, 잘 부탁해요 여러분!"
"알고 있겠지만, 이 녀석은 이렇게 보여도 A+랭크 헌터라고."
"방금 뭔가 이상한 접두사 붙이지 않았어, 사부?"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의뢰도 A+랭크 헌터를 경유해 들어온 거란 말이야. 알간?"
"이젠 아예 무시하네, 이 양반이."
옆에서 딴죽을 걸긴 했지만, 덕분에 학생들의 얼굴에도 어느 정도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여하간, 서아의 말에 의하면 이번 의뢰는 신서아라는 헌터가 건재함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의뢰.
겉으로 보기엔 심심하다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협회 상층부가 E랭크 의뢰를 신서아 건재의 증거로 내세울 리는 없지 않겠는가.
즉, 이 간단해보이는 의뢰에도 나름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의뢰의 함정은 십중팔구 거기.
지나칠 정도로 무해한 내용 쪽이다.
"우리들이 맡은 의뢰는 이 남해 부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 다시 말해 갑자기 발생하는 안개와 섬을 조사하는 일이지."
"뭐, 아지랑이같은 거 잘못 본 게 아닐깝쇼?"
마치 첨언하듯 그렇게 투덜거리는 윤하.
그 말에 내가 입을 멈추자, 곧 윤하는 머쓱하다는 태도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다만, 이번에 내가 말을 줄인 건 윤하를 타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지.
"거 왜, 있잖아요. 수평선에 맺힌 아지랑이를 잘못 본 사례라던가……."
"그럴 가능성도 있지."
"어, 그렇죠?"
"문제는, 이 세계에선 그런 현상도 몬스터가 될 수 있다는 거고."
실제로 그런 전설 또한 있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독일, 브로켄 산의 유령일까.
혹은, 아서 왕 전설에 등장하는 악녀 모르간의 유령섬 환상Fata Morgana을 들 수 있겠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이상 현상을 보고 기묘한 전설이나 마녀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과거에도 몬스터가 존재했던 건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몬스터가 전설의 가죽을 쓰고 나타나는 건지.
어느 쪽이든, 몬스터는 자신의 기반이 된 전설에 귀속당하기 마련이다.
벼락에 약한 북구의 거인은, 전격 계통의 능력으로 쓰러뜨릴 수 있다.
악마의 형태를 빌린 몬스터들은, 주기도문을 읊어 쫓아낼 수 있다.
이번 사례 또한 마찬가지다.
단순한 신기루라는 확신이 있다면 모를까, 어쩌면 신기루에서 기인한 몬스터일 수도 있으니까.
애시당초 신기루라는 단어부터 고대 중국 전설 속 괴물로부터 유래한 단어고.
이번 의뢰 또한 마찬가지다.
까놓고 말해, 이미 비슷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의뢰는 이번에 처음 발주된 물건이 아니다.
듣기로는 몇 달 전부터 꾸준히 남해 부근에서 올라오고 있던 보고라고 하던가.
당연히 협회가 파견한 헌터 또한 서아가 처음은 아니었다.
단.
몇 번이나 헌터를 파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성과는 제로.
덕분에 협회 측은 이번 일 또한 신기루라는 입장을 고지했다.
허나, 현지인들은 달랐다.
날 때부터 바다와 접하며 살아온 이들은 저런 식으로 발생하는 신기루 따위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며 술렁대곤 했다.
결국 협회 또한 그런 현지인들의 반발에 양 손을 들었고.
이후, 만에 하나라도 일처리에 책이 잡히는 일 없도록 A랭크 헌터까지 파견했으나…….
정작 그렇게 파견한 A랭크 헌터가 실종당하고 말았다.
뭐, 헌터의 실종 자체는 사실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협회 소속의 헌터라면 더더욱.
비록 대침공이 종료되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각지에 협회의 관리를 받는 게이트들은 남아있었으니까.
사실상 작업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하나, 상대는 게이트.
안전 수칙을 준수한다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작업이나 다름없는 사냥이기에 더 심한 걸지도 모르고.
언제나 그렇지만, 안전 사고를 일으키는 건 아무 것도 모르는 초심자가 아니다.
자기는 괜찮다고, 완전히 손에 익었다고 방심하는 숙련공이 보통 이런 사고의 피해자가 된다.
그러니, 나로서는 어디서 유출된 몬스터한테 습격이라도 당한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어느 쪽이든, 실종은 실종.
당연히, 협회에는 비상이 걸렸다.
현지도 현지대로 A랭크 헌터까지 실종됐다는 사실에 지레 겁을 집어먹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지지부진하던 사건을 서아가 맡게 된 셈이다.
확실히, A랭크조차 실종된 의문의 사건을 해결했다고 하면 A+랭크 헌터의 복귀 치고는 나쁘지 않은 편이겠지.
현지 또한 만족할 수 있는 인선일 테고.
"그러니까, 우리들의 목적은 남해 일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의 정체를 규명하는 거다. 알겠지?"
정말로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
하지만.
만약 몬스터라고 한다면?
물론, 토벌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자, 녀석들도 퍽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참.'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말이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애돌보미 역할이나 하고 있는 건지.
아니, 실전 연습에는 좋겠지만.
어쩌면 몬스터를 퇴치할 수도 있다는 기대 덕분일까?
내 마음에도 한층 여유가 생겼다.
당장 지금만 해도 짐작이 가는 몬스터만 여럿이고.
거기에.
"만약 빨리 끝나면 바다라도 가자. 알겠지?"
"오오오오오!!"
역시 사기 진작엔 포상 휴가가 최고지~
아무래도 다들 방학 내내 한가한 모양이니.
심지어 윤하가 신세지고 있는 해체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듣기로는 아예 장기 휴점을 냈다던가?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해체소의 주된 고객은 어디까지나 헌터.
그리고 지금 이 사회에서, 헌터가 뒈졌으면 뒈졌지 돈이 부족하진 않다.
관광지가 한창 성수기인 요즘, 제대로 장사가 될 리도 없지.
비수기에도 성수기에도 몬스터만 죽이면 되는 내 쪽이 특이한 경우고.
"그럼, 일단 짐부터 풀까? 선생님 이름으로 예약해 뒀으니까, 다들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렴."
"네!"
"어른 조는 협회 지부부터 들리자고. 사정 청취도 해야 하니까. 괜찮지?"
내 말에, 서아 또한 떨떠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기도 방에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나야 좋은데, 저 사람 괜찮아?"
그리 말하며, 서아는 주차장 한켠을 가리켰다.
거기에 있는 건, 지금까지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없던 여신.
조금 마음에 걸린다는 이유로 한 번 언급했다가 1분만에 후회한 티아마트였다.
"우웨엑."
같은 차를 타기 위해 억지로 힘을 약화시켰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천성이 그런 걸까.
현재, E랭크 몬스터 이하에 가까운 마력밖에 느껴지지 않는 여신의 분신은 한참 차멀미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지랄 났다, 아주.'
결국 티아마트는 학생 조에 합류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뭐, 녀석의 정체를 고려하면 섣불리 협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쪽보단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맥이 빠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