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 *
"우와아……."
방금 전, 김민철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여신은 그런 소리를 냈다.
진이 빠진다는 듯한 억양이었지만, 나로서는 다소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감탄만 하지 말고 관리 좀 하라고. 네 양아들이잖아.
"폐적했엉."
"가출이 아니고?"
"이잉."
"이잉은 무슨, 지랄."
진심 꿀밤 마렵네.
몬스터만 아니었다면 반대쪽 뿔도 꺾었을 거다.
아니, 몬스터가 아니었다면 애시당초 뿔 따윈 나지 않았겠지만.
하여튼.
"시발, 그 새끼가 비겁하게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않았으면 진작 끝장을 봤을 텐데."
"본인은 이제 네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
"안 닥쳐?"
"히잉."
신화 속 원시 참피답게 징징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열이 뻗쳤다.
다행히 녀석 또한 제 잘못은 알고 있는 모양인지, 평소랑 다르게 으름장 한 번에 쭈그러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나는, 간신히 하숙집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됐으니, 앞으로 며칠 동안은 얘도 여기에서 살 거야."
그러나, 정작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결국 나 또한 슬쩍 눈매를 찌푸리며 둘의 반응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하연아? 서아야? 또 왜 그래?"
"어버, 어버버. 어버버버버."
"뭐야, 얘 왜 이래?"
완전히 맛이 가버렸는뎁쇼?
내 말에 완전히 넋이 나간 양 괴이한 소리만을 반복하는 서아.
허나, 불현듯 정신을 차리곤 나를 향해 외친다.
"아니, 잠깐!! 누구야, 그 사람?!"
"어? 서아야, 아무리 그래도 직장 동료는 기억해둬야지."
"그런 뜻 아니거든?!"
"뭔데 그럼."
"기기기기긱!!"
고장난 로봇이라 해야 할지, 이빨을 가는 소리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말하기 힘든 괴성을 흘린다.
아니, 얘 아직 20대 아니었나?
성차별적인 발언이지만, 저 나잇대 계집애가 저래도 되는 걸까.
"그, 그래. 알겠어. 알았다고. 어, 뭐였지? 티아 씨랬나?"
"티아 빈트 라흐만 빈 압둘라 무함마드?"
"맞아. 티아 빈트 라흐만 빈 압둘라 무함마드 씨가 우리 집에서 살 거라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숙집에서 살겠지."
"아니, 도대체 왜?"
"방금 전까지 설명했잖냐……."
그런 서아의 반응엔 아무리 나라 해도 진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나도 내키지는 않았다.
단지, 현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결과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을 뿐.
'사실 여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하필이면 상대가 김민철 그 놈이라는 게 문제다.
여하간, 티아마트랑 같은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려 든 놈이니까.
하물며, 정신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까지.
나를 제외한 다른 교사진이 상대라면, 버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티아마트의 거처를 옮긴 이유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일부러 티아마트의 거처를 가까운 장소로 옮겨, 김민철의 이목을 끌어들이기 위해.
김민철이 오로지 내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중요한 건, 김민철이 나를 적대하는 것.
달리 나서서 행동을 취할 필요까진 없다.
여하간, 회식 자리에서 술 한 번 같이 마셨다는 이유로 살심을 품는 놈이니까.
그런 녀석이, 이젠 나와 티아마트가 같은 하숙집에서 거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속내가 어떻게 될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다른 교사진에게 눈독 들일 걱정은 없겠지.
정말이지, 귀찮은 상황에 얽히고 말았다.
만약 이번 문제의 당사자가 티아마트만 아니었다면, 알아서 하라고 던져둔 뒤 손을 털었겠다만…….
문제는,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내게 있다는 점이다.
까놓고 내가 이 년을 교사 자리에 추천해서 일어난 일이고.
물론 어느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다.
그렇다기보다, 여신을 교사로 채용하자 제안한 시점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는 건 너무 놀부 심보가 아닐까.
'처음엔 혼란 조금 감수하고 이 쪽의 손을 늘릴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설마 미치광이 스토커 자식이 달려들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협회랑 알력 다툼이나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김민철 이 놈이 문제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교육했길래 저런 이종간 스토커가 탄생한 거야?
뭐, 농담이지만.
교육이 중요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그러나, 내가 봤을 때 김민철 그 놈은 그냥 천성이 막되먹은 놈이다.
비록 신들의 어머니라 한들, 저런 미친 자식을 교정하지 못한 책임을 무는 건 과연 억울할 테지.
"어디 보자. 일단, 여기 티아 씨가 최근 스토커 피해에 시달리고 있거든?"
"그래서?"
"그런데 그 스토커가 사실 의붓 동생이라는 거야."
"응?"
"티아 씨가 가급적 선처를 바라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건데, 문제는 그 스토커가 예전에 티아 씨한테 프러포즈한 적이 있대."
"어?"
"대충 알겠지? 만약에, 티아 씨가 혼자 있을 때 그 양반이 힘으로 밀고 들어오려 하면 곤란하잖아."
"으, 으음."
"그래서 내가 데리고 있기로 한 거지. 일단 내가 추천한 인원이니까."
"아니, 그래도 남자랑 여자가 한 방을 쓰는 건 조금 그렇지! 직장 동료나 아는 사람 중에 여자 없대?"
"그게 너잖아."
"아."
좋아, 이걸로 한 명 제꼈다.
중동 출신 이민자라는 거짓말을 이런 데에 쓸 줄이야.
막말로, 아무리 김민철을 유인하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정말로 내가 이 년이랑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 수는 없지 않겠나.
남녀칠세부동석이고 나발이고, 하루 안에 칼부림을 낼 자신이 있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티아마트를 맡는 건 서아네 하숙집이 되겠지.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직장 동료라는 걸 제외하면 변변찮은 연 하나 없는 서아와 티아마트 사이를 주선하는 게 전부다.
이 정도면 죽고 싶은 수준에서 끝낼 수 있다.
"엄마는 뭐라셔?"
"사정 듣더니 괜찮으시다더라."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긴 했다.
나름대로 미화한 개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파격적인 내용 뿐이었으니까.
당장 나만 해도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부르짖는 게 느껴질 정도이거늘, 어르신들은 어떻겠는가.
덕분에, 서아네 어머님께서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두 명 분 월세를 계산하며, 지나가듯 서아에게는 말했냐고 물으셨을 뿐.
이제부터 말할 생각이라고 하니까 한숨을 푹 쉬긴 하시더라.
"뭐, 알겠어요. 그런 사정이라면 어쩔 수 없죠. 티아 씨?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같은 학교 다니는 신서아에요."
"으, 음."
삽시간에 혼란을 떨치고 일어난 서아가, 표지 모델로 활동할 적에나 지었던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다소 냉담한 태도였다.
하숙집 아주머니께서도 그러셨지만, 어쩌면 서아는 제 개인적인 영역에 누군가 들어오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나를 곁눈질하던 티아마트 또한 떨떠름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니.
아니, 사실 티아마트는 줄곧 저랬지만.
계획의 골자는 이해했다면서도, 이 하숙집에 머무르는 일만큼은 끝까지 반대했었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아랑 하연이 앞에서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에 거리낌을 느꼈다고나 할까?
물론 녀석과 김민철 사이의 일은 어디까지나 개인사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금 지나치지 않나 싶은데.
뭐, 어느 쪽이든.
지금은 멀쩡히 악수를 나누고 있는 걸 보면 어떻게든 납득한 모양이다.
"하연아, 너는 쟤 알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며칠만 참자. 응?"
"네. 괜찮아요, 오빠."
"그래, 고맙다."
"그런데 말이죠, 오빠?"
"응?"
"혹시 이번 일도 그 사람들이랑 관계된 건가요?"
어디 보자.
여기서 하연이가 말하는 그 사람들이란 십중팔구 예의 집단을 뜻하는 거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글쎄, 이번엔 아닐 거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왜냐하면, 상대가 김민철이었기 때문이다.
티아마트랑 술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려 드는 미치광이 테러리스트.
저런 놈을 통제할 수 있기나 할까?
"그런가요."
대답을 듣고도, 하연이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담담한 얼굴로 다가와, 표표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을 뿐.
하지만.
"……하연아?"
"알겠어요. 쉬세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걸까.
그렇지 않으면 무엇일까.
평소와 다름 없는 태도. 평소와 다름 없는 억양.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서는 하연이의 모습에서 나는 모종의 처연함을 느꼈다.
*
아침.
새벽빛 짙게 깔린 거리를 나서며, 자하연은 스스로도 모르게 푸욱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평소에 비하면 다소 빠른 등교길.
시원한 새벽 바람이 이마를 어루만지는 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하연의 마음은 어딘가 답답했다.
애초부터 지금 이 시간에 등교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지금은 박우찬의 지하방에서 셋방살이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학생과 교사가 같은 곳에서 산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떤 추문을 살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물며, 여고생과 남교사라면 더더욱.
사실 자하연 본인으로서는 비교적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지만, 오빠에게 오명을 덮어씌우고 싶진 않았다.
때문에, 박우찬과 자하연은 평소 같은 하숙집 아래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따로 등교하곤 했다.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경우, 일찍 출근하는 건 대부분 박우찬 쪽이었다.
아직까지 잠자리에 익숙해지지 못한 자하연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그녀에 대한 배려인지.
둘 중 먼저 눈을 뜨는 건 보통 박우찬 쪽이었고, 그럴 때마다 박우찬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게 내버려둔 채 홀로 출근하곤 했다.
허나, 오늘은 달랐다.
일찍 눈을 떴다고나 할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자하연은 저 하숙집에 남아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갑갑하게 느껴졌다.
최근 이런 일이 부쩍 늘었다.
신서아 헌터 때만 해도 그렇고.
비록 그 때는 박우찬이 자신에게 먼저 손을 벌린 덕택에 나름대로 도움이 될 수 있었지만…….
결국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제대로 설명해 주기도 전, 박우찬은 벌써부터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린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박우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사안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해보려 해도, 그녀로서는 아무래도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반응은 같은 동아리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박우찬이 말해주기도 전부터 그녀들은 나름대로 서로의 사정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나 함구령이 내려진 이야기를 제외하면, 거의 7할 가까이.
덕분에 그녀들은 학교가 문을 연 이래 박우찬이 얼마나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박우찬의 행적을 조립해 추론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자하연을 구해주었다. 사실 이예은과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다. 황윤하의 가계에 도움을 주었다. 류지희의 가족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신서아 헌터와 관련된 일을 마무리한 지금은 또 새로운 일거리를 가져와 바쁘게 구르고 있다.
사람 돕는 게 취미라도 되는 걸까?
또 그럴싸한 이야기다.
여하간, 난생 처음 보는 계집애의 인생을 돌봐주고 있는 사람이니까.
자, 봐라.
너희들이 그렇게 날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다.
결국 너희들은 내게서 무엇 하나 앗아가지 못했다.
자하연이 보기엔, 박우찬은 저렇게 말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도축업자.
어떤 기사에 따르면, 박우찬은 일찍이 그렇게 불리던 헌터였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냉혹하게 몬스터를 도륙하는 사나이.
사냥에 방해가 되는 이들은 설령 협회라 해도 가만두지 않는다 일컬어지는 비 인가 헌터.
그 기사를 보고 난 뒤에야, 자하연은 박우찬이라는 헌터에게 품고 있던 의문점을 해소할 수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준구 헌터와 알고있던 이유.
자신이 헌터라는 게 밝혀진 그 날, 자신과 함께 협회로 향했던 까닭까지.
동시에, 어깨를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말로 오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구나.'
박우찬에게 도움을 받길 벌써 몇 개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하연은 박우찬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일개 찌라시 기사보다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사실, 이런 마음을 품어선 안 되겠지.
여하간, 자신은 이미 박우찬에게 목숨을 빚졌다.
거기에, 그 뒤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자신이, 이제 와서 박우찬에게 달리 무언가를 요구해선 안 되는 법이다.
몰염치. 인면수심. 뻔뻔한 데에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갑갑함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걸까.
박우찬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다. 조금이라도 이 마음 속 빚을 갚아나가고 싶다.
방자한 생각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감할 줄은 역시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자하연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소녀의 탄식이 새벽 공기 사이로 뒤섞여 사라졌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아가씨."
그리고.
그렇게 뒤섞여 흩어지는 연보랏빛 하늘 아래로,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순식간에, 자하연의 몸이 임전 태세로 들어갔다.
무언가 눈치챈 건 아니다.
아니,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박우찬 또한 이번엔 티아마트에게 단단히 함구령을 내렸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헌터.
어중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 더더욱, 이번 일에 어설프게 얽혀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상대는 진짜배기 테러리스트.
학생 수준에서 참전해 봐야, 방해밖에 되지 않는다.
여하간, 이번 사건은 예의 집단이 관련된 사안도 아니고.
현실적인 판단과 배려, 양 쪽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여기에 있었다.
박우찬이 섣불리 자신의 인상착의를 퍼트렸을 리 없으니.
전신에는 넝마에 가까운 거적떼기. 한 손에는 화려한 디자인의 지팡이.
아이러니하게도, 박우찬이 철저하게 자하연을 보호했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사내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먼저 반응했다.
위화감.
주변 사람들은커녕 환경과도 어우러지지 못한 듯한 이질감.
배경으로부터 톡 튀어나와 있는 듯한 이물감이, 눈 앞의 사내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흠? 뭐야, 반응은 나쁘지 않네."
"누구, 세요?"
거리를 벌리며, 자하연은 그리 물었다.
동시에 놀랐다.
간신히 입 밖으로 낸 자신의 목소리가, 볼품없을 정도로 달달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로브를 두른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일 따름이었다.
"사실 아가씨한테 용건이 있는 건 아니야. 방금 전엔 수상한 예언자 아저씨처럼 말하긴 했지만, 그런 재주를 부릴 줄 아는 것도 아니거든."
"그, 러신가요?"
"응, 그래. 애초에, 아가씨 때문에 찾아온 것도 아니니까. 미안해, 아가씨?"
"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뭔가 빡치더라고?"
"뭐가, 말이죠?"
"아가씨는 그런 적 없나? 영화관에서 잠깐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어떤 놈들이 멋대로 내 좌석을 점거하고 있는 거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닐까?"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아니, 눈 앞의 사내가 타인과 함께 영화 따위를 볼 수 있는 인간인가 하는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지."
"방금 전부터,도대체 무슨 소리를……."
"나도 의자를 뺏을 거야."
나는 속이 좁거든.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지금 이 상황에 맞지 않는, 마치 소년과 같은 미소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하연의 의식이 암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