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
* * *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원."
영 막연하기 짝이 없는 황윤하의 그 중얼거림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그녀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한 마디였다.
일단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탓에, 주변에는 오로지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자들 뿐이었다.
사실, 박우찬의 얄팍한 인맥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녀들은 자연스레 한 자리로 모이게 되었다.
솔직히, 미묘한 광경이었다.
먼저, 이준구의 여동생이라는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여한 이예은을 보자.
이예은의 경우, 상대적으로 다른 여학생들과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 류지희와는 중학생 때부터 몇 번 아웅다웅했고, 자하연이나 황윤하라면 같은 조가 된 적도 있으니까.
박우찬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실습 당시의 경험으로, 과거 흡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헌터가 사실 박우찬이었음을 깨닫게 된 그녀는 비교적 쉽게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일전, 오빠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던 모습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 덕분이었다.
허나, 정작 당사자인 박우찬이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흠이다. 박우찬으로서는 갑자기 자신의 전법을 바꾼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드디어 오라비인 이준구가 따끔하게 혼을 냈구나 생각할 뿐, 자신이 영향을 주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친구라 생각하고 있는 류지희와의 관계 또한 비슷했다.
이예은에게 있어, 류지희는 친한 친구다. 허나, 반대로 류지희에게 있어 이예은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기 위해 어울린 동급생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마치 류지희가 모종의 목적을 품고 이예은에게 접근했다는 투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자신이 혼혈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류지희로서는 가급적 문제 없는 학생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었을 뿐. 무언가 철저한 설계 끝에 본인의 교우 관계를 조작한 건 아니었으니까.
피의 숙명에 괴로워하며, 이런 고뇌를 알지 못하는 동급생들을 내심 깔보는 게 허락되는 건 딱 중학교 2학년까지다.
때문에, 류지희는 지금 이 자리가 썩 불편했다.
왜냐하면, 방금 전부터 조금 위축된 기색을 보이던 이예은이 조심스레 류지희 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속내는 평범한 여고생에 가까운 류지희에게 있어, 이예은의 그런 행동은 내심 부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정작 수다를 떨기도 여의치 않았다는 점이다.
눈에 띄게 사이가 나쁜 사람은 없었지만, 반대로 이런 상황에서 수다를 떨 수 있을 만큼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다.
당연히 박우찬 또한 류지희의 특수한 배경까지 다른 학생들에게 털어놓지는 않았고, 덕분에 류지희는 박우찬의 부름 하에 모인 다른 여학생들에게 다소 심리적인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황윤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예은과는 저번 시간에 같은 조를 짠 적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류지희는 별다른 문제 하나 없는 학생이다. 박우찬에게 아르바이트를 소개받을 당시, 자하연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있다.
요컨대, 전부 데면데면한 관계라는 뜻이다.
각자 다른 관계. 각자 다른 거리감.
허나, 지금 이 시점 셋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도대체 우리 담임은 뭘 하고 다니는 거지?'
아카데미 개교로부터 고작해야 2개월.
무슨 일을 했길래 부르기만 하면 이렇게 험상궂은 얼굴을 한 아저씨들을 줄줄이 매달고 나타나는 여고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걸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현장도 드물겠지.
그러나, 신경이 쓰이는 건 다름이 아니다.
이예은에게는 오빠인 이준구의 이름을 들어.
류지희에게는 반 친구로서 할 말이 있다는 식으로.
황윤하에게는 아르바이트 관련으로 질문이 있어서.
각양각색의 핑계로 그녀들을 한데 불러모은 동급생, 자하연.
물론 그녀들 또한 박우찬과 자하연 사이에 나름의 관계가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형태로 실감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작 당사자인 자하연은 그녀들의 의문 가득한 시선에 대답해주는 대신, 방금 전 박우찬이 들어간 게이트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담임인 박우찬이 조금 맛이 간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찌라시 기사에 따르면, 옛날엔 이름 좀 날린 헌터였다고도 들었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금 이 상황은 다소 묘한 면이 있었다.
이번엔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려나?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런 생각을 삼키며, 그녀들 또한 미묘한 침묵 속에서 게이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그 시점에서, 나는 다소 예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여신이라 자칭하는 미친 년의 조언을 듣고, 이 나라 어딘가에 인간으로 의태한 몬스터들이 뿌리내리고 있을 거라 판단했던 날의 이야기다.
물론, 이후 예의 집단과 맞부딪힌 결과 몬스터 군락 수색은 포기하기로 했었지.
이준구가 개인적으로 움직이던 협회 소속 인력들에게서 그들의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조사하려 한들, 이 쪽이 계획을 세울 때마다 줄줄이 새나간다면 우리들로선 어찌할 수 없다.
차라리 그 사이 따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물론이요, 이준구와 최승준 또한 간과했던 사실이 딱 하나 존재한다.
나와 하연이가 처음으로 만났던 그 날.
바로 그 좁디좁은 골목길 안에는 세 마리나 되는 A랭크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거지?'
고작해야 집 앞 5분 거리에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못해도 이 신도시 정도는 능히 커버할 수 있는 내 능력을 고려하면, 무언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상대가 몬스터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예의 헌터가 사용했던 공간 조작 능력이 담긴 도구 따위도, 군락 규모가 되면 아무래도 부산스럽다.
설마 내 창고만한 공간 능력 너머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것도 아닐 테고.
하물며, 내 창고 정도면 어마어마한 고랭크 공간 능력이다.
고작해야 1회용 마력 결정 따위로 그만한 규모의 공간을 상시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허면, 그 집단은 평소 어디에서 머무르고 있는 걸까?
예의 집단이 하연이를 노리고 있다는 점, 거기에 어쩌면 이 신도시에 하연이를 맡긴 게 그 집단일지도 모른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십중팔구 이 신도시 근처가 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내 감지 능력에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로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게!"
한바탕 날뛰고 난 뒤에야, 이 게이트를 관리하고 있던 책임자가 튀어나왔다.
가슴팍에는 반짝이는 뱃지.
언젠가 서아가 보여준 적 있던, 길드 소속 헌터라는 증거다.
공교롭게도, 보기 드문 물건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주변으로는 동일한 뱃지를 착용한 헌터들이 한가득 널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팼다.
아니, 책임자 나오라고 했는데 쫓아내려 들잖아 사람 빡치게.
만일 그 뿐이었더라면 나 또한 적당히 손속을 두려 했지만, 바로 칼부터 뽑는 꼬락서니가 영 탐탁치 않았다.
아주 수상쩍다고 온 몸으로 광고를 하는데, 내가 또 가만히 넘어갈 수는 없지.
바로 그 결과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괴한의 침입에, 떨떠름하게 나를 바라보는 책임자. 그를 향해, 나는 형식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이 게이트 책임자 맞소?"
"예, 그렇습니다. 헌데, 무슨 일이신지……."
"됐고. 거, 댁들이 무슨 길드였더라?"
"네? 저희 말씀이십니까?"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길드의 이름을 묻는 나를 향해, 책임자 양반은 그런 시선을 던졌다.
물론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적당히 그 손을 휘젓는다. 어차피 오늘내일 안으로 사라질 길드, 이제 와서 시시콜콜하게 이름이나 듣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뜬다. 사실, 눈을 감고 집중해볼까 했는데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당신, 책임자 아니잖나."
"예?"
"저기, 저 안에 책임자 남아있는 것 같은데?"
그리 말하며 책임자라 자칭한 남자가 나온 건물을 가리키니, 방금 전까진 어떻게 해도 감출 수 없는 황당함이 묻어 나오던 사내의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계속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왜, 경찰 부르게?"
사실, 부르기야 이미 불렀을 거다. 경찰이 아니라 길드 내에 속한 헌터들이겠지만.
한껏 부풀어 오른 내 감각이, 지금 이 장소를 향해 쇄도하는 헌터들의 기척을 순식간에 간파했다.
어디 보자, 실력은 보통에 숫자는 나쁘지 않군. 하지만, 그 이상으로 벌써부터 무기를 빼든 모습이 퍽 흉흉하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애초에, 사람 하나 매장하는 데에 이골이 난 놈들일 테고.
같은 길드에 속한 녀석은 물론, 도저히 이런 일엔 협력 못 하겠다고 잡아떼던 녀석들까지 전부 이런 식으로 매장했을 테니까.
요컨대, 최근 점진적으로 상승하고 있던 이 게이트 내 사망률은 십중팔구 저 녀석들 때문이라는 거다.
"서로 다 알 거 아는 입장인데, 괜히 힘 빼지 말자고."
"……효도 길드 소속이십니까? 원하는 게 뭐죠?"
이야기는 들어보겠다는 듯이 눈매를 좁히는 자칭 담당자 양반.
물론, 헌터들이 멈출 기색은 없었다.
보나마나 구라라는 뜻이다.
애초에, 길드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난동까지 부린 나를 살려둘 생각이 없을 테니까.
다만.
"죽일 것이다."
"예?"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다 주운 나뭇가지로 허공을 슥 그었다. 너무나도 완만한 그 행동에, 눈 앞의 담당자 양반 또한 멀뚱멀뚱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하지만.
공격은 이미 끝났다.
예쁘게 베기.
작렬한 시그니처와 함께,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던 헌터들의 움직임이 모조리 멈췄다.
휘두른 나뭇가지의 움직임에 맞추어, 그들의 장비가 통째로 두동강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기와 갑옷, 양 쪽을 잃어 당황한 헌터들에게 작렬하는 충격!
헌터들의 의식이 순식간에 날아간다.
물론, 죽이지는 않았다. 헌터들 또한 사람이었으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몬스터에게 손속을 둘 이유는 없다.
지독하리만치 부푼 내 감각이, 시야 저편에 있는 군락을 포착한다.
게이트의 끝.
세상의 끝이라는 표현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그 장소에, 대지에서 돋아난 듯한 도시가 있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까진.
이젠 없다. 왜냐하면, 막 잘랐기 때문이다.
서겅!!
섬뜩한 소리와 함께, 도시가 참수당했다.
일격에 반토막난 도시의 절반. 개중에서도 잘려나간 절반이, 창공을 향해 도약한다.
그러나, 중력에 반항하듯 몸을 날린 도시의 상층부 또한 결국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쿠르르르릉!!
하늘을 수놓은 건물들이, 대지를 향해 추락한다.
그 주변에 튀는 핏물 사이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마뱀들의 머리통이 보였다.
요컨대, 그런 이야기.
이 길드는 자신들이 관리하는 게이트 내에 몬스터들의 군락을 유치하고 있었다.
사육이라도 하려 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지.
허나, 아무래도 길드는 이 사업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제 살을 깎으면서까지.
최근 급증한 게이트 내 사망률은, 바로 그런 의미겠지.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길드에 가입한 이. 혹은, 돈을 위해 헌터가 되었다 한들 인류에 대한 배신까지 저지를 생각은 없었던 이.
그런 헌터들의 골통을 손수 빠개고, 몬스터들의 밥으로 던져줬던 거겠지.
설령 동조하지 않는다 해도, 시험 삼아 두어 명 정도 죽여놓으면 누구나 침묵할 수밖에 없다.
상대가 A+랭크 헌터라 해도 매한가지다.
아니, 어쩌면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업계든, 위로 가면 갈수록 짊어진 게 늘어나는 법이니까.
부하. 동료. 혹은 가족.
뭐, 상관 없다.
예의 집단이 사주한 건지,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지니고 길드 측에서 주도하던 건지.
어느 쪽이든, 그딴 개짓거리도 오늘까지다.
게이트 안에 구축되어 있던 도시가 폭락한다. 중력에 의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간 도시의 상층부가, 아직까지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도시의 하층부를 완전히 뭉게버렸다.
3초.
서아의 고민 한 줄기를 해결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딱 그 정도였다.
"가르르르륵!!"
그리고.
수백 이상 되는 몬스터들을 참살한 탓에, 격렬하게 날뛰는 감각을 진정시키는 사이.
방금 전, 내가 지목한 관리자 사무소의 문짝이 폭발했다.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굉음과 함께, 문짝 너머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내게로 덤벼든다.
"저, 저 미친 새끼!!"
관리자 양반은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그리 외쳤지만, 녀석으로선 어쩔 수 없었겠지.
여하간, 몬스터란 결국 짐승이니까.
말하자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짐승이다.
그렇기에, 녀석은 방금 전 일어난 마력의 파동이 자신의 일가족에게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깨달은 것이리라.
물론, 내 알 바는 아니다.
내게 발톱을 들이민 놈의 낯짝을 차분히 관찰한다.
우악스레 뻗은 팔.
새파랗게 돋은 비늘.
거기에, 날카로운 이빨까지.
이 군락의 진정한 관리자는, 말 그대로 몬스터였다.
'뱀 인간인가.'
그렇다면, 이걸로도 충분하겠지.
휘두르는 발톱에 맞춰, 나뭇가지를 휘두른다.
그리고.
높아야 B랭크나 할 뱀 인간은, 이 빈약한 무장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여하간, 이번엔 닥치는 대로 죽일 수도 없으니까. 증거 확보를 위해, 적어도 몇 마리 정도는 생포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자?"
5년 치 인내심을 끌어모은 친절한 목소리로 그리 제안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녀석은 내가 영 아니꼬웠던 모양이다.
퉷, 방독면 위로 침이 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녀석의 머리통이 박살났다.
"아잇, 씨발!!"
나도 모르게 호다닥 물러섰다. 다행히, 역겨운 몬스터의 뇌수가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길드도 꽤나 잔인한걸?
몬스터가 상대라지만, 통제용 폭탄이라도 심어둔 건가.
덕분에, 이번에도 꽤 고생하게 생겼다.
머릿속으로 남은 게이트의 숫자를 셈하며, 나는 어느새 혼절한 자칭 담당자의 옷가지에 피 묻은 장갑을 닦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