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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65화 (65/371)

〈 65화 〉 인연

* * *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신서아는 간신히 제 침대에 몸을 뉘였다. 때 아닌 직장 생활에 온 몸이 쑤셨다.

솔직히 말해, 정말로 출근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단순한 술주정이었고…….

하지만.

기억하기도 부끄러운 자신의 주책을 듣고, 박우찬은 단 하루 만에 자신을 아카데미 교사 자리에 꽂아주었다.

정작 당사자인 박우찬은 교생이라 미안하게 됐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어디일까.

'것보다, 사립도 아닌데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들어가도 되나?'

현 교장인 최승준이 아카데미 운영에 상당한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사부는 오로지 자신이 술김에 흘린 푸념 한 마디를 위해 바로 그 최승준과 담판을 지었다.

이 나라에선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법한 대기업의 후계자이며, 현직 S랭크 헌터를 상대로 들이받은 박우찬의 모습을 떠올리면 서아는 아직도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쑥스러움과 부끄러움.

거기에, 한 줄기 의구심이 피었다.

물론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최승준 헌터와 너 나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사부의 모습은 그 이상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사람의 일생은 수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이 헌터가 된 이후 만난 동료들처럼, 사부에게도 사부만의 인연이 있었을 테지.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 모를 정도로 어리지는 않다.

허나.

아는 것과 실감하는 건 별개다.

신서아에게 있어, 이번 출근은 이를 실감하는 과정이었다.

이름만 들어본 최승준 헌터를 눈 앞에 두고 바짝 얼어버렸던 건 오히려 약과다.

아카데미 개교로부터, 고작해야 2개월.

그 사이, 사부인 박우찬은 자신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사건들을 겪었던 모양이었다.

개중에서도, 서아의 속을 박박 긁어놓은 건 바로 박우찬과 친한 학생들 대부분이 여고생이었다는 점이다.

마치 숭배라도 하듯 박우찬의 기술을 훔치려 드는 남학생은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다.

어찌저찌 사부랑 친해졌다는 여고생. 집안 사정 때문에 사부가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줬다는 여고생. 심지어 그 이준구 헌터의 동생이라는 여고생까지.

삼인삼색, 각기 다른 여고생들이다.

솔직히 말해, 좀 깼다.

만약 사부가 아니었다면 신고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여고생 만발한 사부의 모습을 보면서, 신서아는 도대체 어쩌다가 이준구 헌터의 여동생이랑 알게 된 건지 묻고 말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엥? 처음부터?"

"엉. 아, 말 안 했던가?"

"그야 안 했지!!"

"생각해 보니 물어본 적도 없잖냐."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사부는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물론 물어보진 않았다. 상식적으로 그런 걸 물어보고 다닐 리 없으니까. 아니, 도대체 누가 만나는 사람마다 혹시 대통령이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며 다닌단 말인가.

허나, 신서아는 사부의 대답에 그 이상으로 쓸쓸함을 느꼈다.

신서아가 알고 있는 사부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우중충한 얼굴로 혼자 싸돌아다니는 사람. 누군가 뜯어말리지 않으면, 밥을 먹는 것조차 잊고 몬스터를 썰어 죽일 사람.

그렇기 때문일까? 신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박우찬의 진정한 모습이라 생각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오로지 자신만이 사부의 웃는 얼굴을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모습이야말로 사부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는 달랐다.

사부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자신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고작해야 A+랭크 헌터인 제자는 눈에도 차지 않을 만큼 뛰어난 헌터들과 알고 있었고, 심지어 지금은 그 실력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고 있는 듯했다.

최승준 헌터를 상대로 자신을 추천하는 모습이나, 이준구 헌터가 여동생의 교육을 맡겼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홀대받고 있는 사부의 이름을 내가 알리겠다고,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런 자신을, 사부는 헛웃음과 함께 만류했다. 네 출세길이 막힐 뿐이라면서, 천천히 고개를 젓던 사부의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동쪽 하늘에서태양이 뜨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이는 없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이번에도 내 뜻을 따라주어 고맙다고 눈꺼풀에게 인사하는 이가 없듯이.

말하자면, 박우찬에게 있어 타인의 평가란 딱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거겠지.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바꿔버릴 수 있는 것.

그렇기에 박우찬은 주변의 평가에 개의치 않는 것이리라.

"아, 바보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참, 도대체 뭘 그리 안절부절했던 건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사부는 다른 제자들을 들였다. 티아 씨랬던가? 여자친구도 생긴 듯했다. 어디서 중동인을 데려온 건진 역시 모르겠지만.

심지어 다른 아이를 하숙집에 들였고, 같이 살기까지 한단다.

……안심해야 할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드디어 사부가 정신을 차렸구나, 하고 말해야 하겠지.

하지만.

자신이 없어도 괜찮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활하고 있는 사부의 모습.

자신의 빈자리에 개의치 않고 다른 이들로 대신한 듯한 박우찬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나."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아니, 자신이 있을 자리조차 남아있지 않다.

반쯤 현실도피에 가까웠던 일탈로부터 하루.

신서아는 벌써부터 지독한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허면, 돌아오시렵니까."

문득, 낯선 목소리가 그리 물었다.

창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 없던 바로 그 자리에, 지금은 불청객이 서 있었다.

기묘한 행색의 사내였다. 전신을 밤그림자와 같은 색의 도포로 덮은, 편집증적인 의상. 눈구멍을 제외한 다른 그 어느 부분도 바깥으로 노출하지 않은 그 모습은, 마치 어둠을 옷의 형태로 다듬은 듯했다.

아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독특한 그 외관에 서아는 별다른 질문 한 번 없이 남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다시금 입을 연 서아의 목소리엔 심상찮게 날이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해 주시길."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다름이 아니라, 무척이나 담담하게 그리 자신하는 사내의 말이 너무나도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놀라운걸? 언제부터 나 하나 감당 못하던 우리 길드에 이런 인재가 들어왔지?"

대답은 없었다. 단지, 사내는 조용히 재촉할 뿐이었다.

"돌아오실 생각이시라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서로 편해지겠죠."

그리 말하는 사내의 존재감은, 당장 눈 앞의 신서아조차 따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흐릿했다.

말에 담긴 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전서구처럼, 타인의 말을 옮길 뿐.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사내의 그림자를 향해, 신서아의 눈매가 날을 세운다.

사부를 대할 때와는 달리, 예리하기 그지없는 시선.

득달같은 그 눈동자에, 사내 또한 너스레를 떨며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억지로 데려가려 들 생각은 없습니다."

"데려갈 수는 있고?"

"없지요. 그렇기에, 더더욱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오실 생각이시라면, 언제든지 안내해드리겠다.

사내는 침묵으로 그리 웅변했다.

쯧,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찬 신서아는 그대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꺼져. 생각 없으니까."

"그렇습니까."

"허튼 짓하면 다 뒈질 각오로 터트릴 거니까 그리 전하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신서아의 목소리에도, 대답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신서아의 친가까지 찾아온 남자의 존재 자체가 길드의 대답이기 때문이겠지.

허튼 마음 먹지 마라.

이건, 경고다.

"……개자식들."

"칭찬,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한 마디 져주는 일도 없이, 창가에 나타난 인영은 조용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쿵.

그렇게 사내를 떠나보낸 뒤에야, 신서아는 베개에 제 뒤통수를 내려칠 수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애초에, 이번 일은 정말로 단순한 일탈에 지나지 않았다. 머잖아 길드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또한, 다른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섣불리 행동할 생각도 없었고,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을 찾아볼 여력도 없었다.

단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람, 나는."

다시 한 번,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의미 없는 반항을 해 봤자, 저 쪽의 신경을 거스를 뿐이다. 달리 저항할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머리를 낮추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얼 기대했던 걸까.

따로 설명을 한 적이 있는가 물으면, 그렇지 않다. 그런 만큼, 자신의 속내를 알아주지 못하는 박우찬을 향해 실망을 토해도 곤란할 뿐이겠지.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방문한 사부가,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빈자리를 잊어버린 듯 행동해도 이제 와서 배신감을 느낄 일은 아니다.

물론, 사람의 감정이란 이처럼 합리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피식,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신서아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한 번 눈을 감자, 두 번 다시 뜨기 싫었다.

눈을 뜨면 내일이 올 테니까.

*

"흠."

그리고.

하숙집, 부엌.

개중에서도 냉장고 앞에 선 나는, 서아와 침입자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내 명예를 위해 미리 변명해두자면, 딱히 엿들을 속셈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듣기 싫어도 들렸다.

마음 같아선 나도 피해주고 싶었지만, 이래서야 어쩔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뭐, 서아의 대화 상대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만일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둘의 대화를 포착할 수 없었겠지.

그 정도로 뛰어난 은신 능력이었다.

별다른 전투 능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감지하기 힘들었으니까.

십중팔구 은신 특화형.

각성한 능력은 물론이요, 당사자 또한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몸을 숨기는 기술만 익힌 거겠지.

저만큼 특화된 능력을 꿰뚫어보기 위해선, 마찬가지로 감지 특화 능력이 필요하다.

방금 전, 둘이 나눈 대화를 고려해 보면 십중팔구 협회에 등록된 내 마력 감응 능력을 고려한 인선이 아닐까.

협회에 이름을 올린지 어언 3개월. 공식적인 수단으론 나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 또한 이젠 옛말이다. 협회 상층부와 연줄이 있다면 내 정보를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겠지.

훌륭한 판단이다.

다만.

녀석에게선 몬스터 냄새가 났다.

방금 전까지 게이트 근처를 지분거리다 오기라도 한 건지, 도저히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악취.

설령 은신 특화 헌터가 상대라 해도, 이 시점에서 내 감지 범위를 벗어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걸 빌미 삼아 저 형씨를 핍박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겠지만. 이거, 능력이 아니라 체질 쪽이고.

물론, 서아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있다.

설령 그게 아무리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복면남과 자신의 방 안에서 밀담을 나누는 일이라 해도, 내가 이제 와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

상대가 스토커라도 됐다면 모를까, 그런 일도 아니고.

오히려 나로서는 예의 집단이 드디어 이 하숙집까지 습격할 생각인가 하고 긴장했었지만…….

'길드인가.'

방금 전, 둘이 나눈 대화를 고려해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만일 저 대화가 길드 내의 문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서아는 이미 하산했고, 어엿한 헌터로서 자립하기까지 했으니까.

서아의 부탁을 받지도 않은 내가 길드 내부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단순한 오지랖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그러게나 말이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람, 나는.

무심코 이 모든 대화를 엿들어버린 나로서는, 서아의 혼잣말에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침공이 종료된 지금, 저토록 짙은 몬스터 냄새.

거기에, 어딜 어떻게 들어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둘의 대화까지.

"아니, 서아야. 너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니……?"

아무래도 나로서는 그리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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