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제자
* * *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실, 신서아 또한 자하연이 상상하는 만큼 여유롭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번 귀향부터 그랬다. 영 내키지 않는 일에 얽혀, 스트레스밖에 되지 않던 직장 생활. 그런 상황에서, 최근 박우찬의 활약상이 담긴 기사를 목격한 탓이다.
물론 취직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헌터 아카데미. 국가와 협회가 대대적으로 손을 잡고 출범시킨 프로젝트에 대한 소식은, 당연히 현 업계 최전선에서 뛰고 있던 그녀의 귀에도 닿았으니까.
그 사실에 의문은 없다. 여하간, 제자인 그녀는 박우찬의 실력을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프로젝트 담당자가 어떻게 알고 접촉한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만일 그 뿐이었더라면, 그녀 또한 축하해 주고 말았겠지. 어쩌면 가볍게 놀리려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울리지도 않게 웬 공무원이냐고 말이다.
동시에,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내가 같이 일하자고 했을 땐 무시했으면서.'
뭐, 마지막에 덕담 좀 돌리긴 했지만 정말로 뭐든 잘 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여하간, 몇 년 전부터 시종일관 우울한 낯짝을 하고 있던 박우찬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는 몰라도, 어쩌다보니 잠깐 관심을 가졌을 뿐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애시당초 직장 생활이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고.
허나, 기사 속 박우찬의 모습은 달랐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혼혈이 어쩌고저쩌고 떠들던 신문들의 일면을 장식한 박우찬의 얼굴은 썩 나쁘지 않은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동적으로 사표를 쓴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뭐, 나 정도라면 여기서 나가도 어련히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지만.
평소 그녀에게 강짜를 부리던 대머리 부장은 마치 다리라도 핥을 기세로 애걸복걸 매달렸다. 정말로 사표를 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거겠지. 물론, 돌아보진 않았다. 오히려 정말로 다리를 핥으려 들길래 무심코 패버렸을 정도였고.
"퇴직금 대신으로 하시죠."
실로 짜릿한 경험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오랜만에 엄마 얼굴도 보고, 사부랑 밤새도록 수다라도 떨 생각에 한층 발걸음이 가벼워진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청객이 있었다.
그게 바로 신서아가 자하연을 상대로 품은 첫인상이었다.
사부인 박우찬 앞에서는 서글서글한 어조로 일관하는 탓에 착각할 수 있겠지만, 신서아는 기본적으로 냉담한 성격이다. 낯가림도 심하다. 소심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는 탓이다.
때문에, 신서아가 난생 처음 보는 소녀를 보고 경계심을 품은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른 점보다, 나이가 문제였다. 박우찬과 모종의 인연이 닿은 여고생. 동시에, 박우찬이 가르치는 학생. 과거의 자신을 연상시키는 그 모습은, 신서아에겐 더더욱 굴러들어온 돌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동거라니?
'괘씸한 년.'
잠시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그건 내 역할 아니었나?
부글부글, 속내가 끓었다. 베란다에 맴도는 차가운 밤바람도 이 속을 식힐 순 없었다.
잠깐 이야기했을 뿐인데, 어느새 하늘에는 밤이 찾아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노을빛으로 젖어 있던 구름들은, 이젠 매캐한 색으로 새벽별을 물들이고 있었다.
후우, 밤하늘 아래 무더운 한숨이 퍼져나간다. 그렇게 호흡을 고른 뒤에야, 신서아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사정, 들었어요. 꽤나 힘들었겠더군요."
이제 와서 시시콜콜한 사담을 나눌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그럴 기분도 아니었으니까.
착 가라앉은 어조. 그 이상으로 허스키한 목소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볍게 잡담을 나불대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발성에, 자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좁히고 말았다.
다만, 화를 낼 생각까진 없었다. 방금 전까지 가벼운 톤을 가장하고 있었을 뿐, 오히려 이 쪽이 그녀의 본래 목소리라 하는 편이 정확하겠지.
사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대는 어디까지나 일개 생도. 현직 헌터, 개중에서도 상당한 유명인인 그녀가 화를 내기라도 하는 날에는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은 신서아 또한 알고 있었다.
여하간, 그녀의 스승은 자신의 제자가 헌터라는 직함을 내세워 다른 이들을 핍박하는 일 따위 눈 뜨고 좌시할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욱씬, 가슴 속으로 번지는 통증을 억누르며 신서아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알고 있어요. 저도 그런 상황에 처할 뻔한 적이 있으니까요. 틀림없이 불안했겠지요."
적당히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 날, 만일 박우찬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부모님과 함께 가족 모듬 세트가 되어 소화당하고 말았을 테니까.
물론, 정말로 순수하게 눈 앞의 소녀를 걱정해 건네는 말이냐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하지만, 알고 있겠죠? 학생과 교사가, 그것도 남교사와 여고생이 한 지붕 아래에 산다는 건 윤리적으로 그리 환영받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반박은 없었다. 아니,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하연은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 또한 알고 있지 않았나. 막말로, 상대가 박우찬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무슨 일이 생겼을 줄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므로,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드는 신서아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이해해요. 그 나이에 집을 구한다는 건 힘든 일이겠죠. 돈 문제도 있을 거구요."
반대로, 현직 헌터인 그녀에게 돈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현찰 박치기.
아무리 힘이 법보다 가까운 시대가 왔다곤 해도, 대뜸 주먹을 휘둘러서야 무식한 야만인에 지나지 않는다.
덕분에, 그녀를 비롯한 최소한의 양식 있는 헌터들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일까 셈해보고는 했다.
차라리 그 쪽이 싸게 먹히기도 했거니와, 이런 폭력의 시대이기에 더더욱 자신의 밑천을 쉽사리 드러내는 건 얼간이나 할 만한 짓이라는 인식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주변에 괜찮은 빌라 어디 없나 찾아보고 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방을 잡는 게 좋을 거에요. 저희 부모님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긴 하지만, 여자애가 머무를 만한 장소는 아니니까. 정서에도 안 좋고……."
애초에, 몬스터만 아니었다면 이런 허름한 빌라에서 머무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한숨이라도 내뱉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구구절절제 입으로설명하기엔 다소 멋쩍은 이야기인 만큼 도리어 입을 앙다물고 말았다.
무엇보다.
슬쩍, 조심스레 눈 앞의 소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신비한 분위기의 진줏빛 눈동자 위로, 굽이치듯 넘실대는 머리카락이 푸른 빛을 띄고 일렁인다. 마치 코트처럼 온 몸을 감싼 부드러움 너머론, 교복으로 대표되는 이 나잇대 소녀 특유의 풋풋함과 어른스러움이 알듯 모를듯 공존하고 있었다.
'혹시 사부는 이런 애가 취향인 건가?'
확실히, 사부가 여태까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다소 엉뚱한 상상이었으나, 자하연 또한 언젠가 그녀와 같은 고민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신서아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어디 가서 꿇린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눈 앞의 소녀에게는 보기 드문 독특함이 있었다. 거기에,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매까지.
'누, 눈매가 너무 사나워서 그런가?'
티가 나지 않도록 자신의 눈꼬리를 슬쩍 어루만져 보면,확실히 좀 날카로운 인상인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이제 와서 자신이 조언할 만한 처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저기……."
"집, 잡아줄게요."
"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자하연 또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대뜸 이 쪽을 불러내고는, 갑자기 이해하니 뭐니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여자가 돌연 침묵한 꼴이었으니.
허나, 그런 그녀조차 신서아가 대뜸 꺼내든 이야기엔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말했잖아요? 이런 상황, 별로 보기 좋은 거 아니라고. 집이 필요한 거라면, 까짓거 내가 한 채 사 주죠 뭐. 사부 제자라고 했죠? 그럼 내 사매라는 건데, 고작 이런 거 하나 못 해줄까."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걸 들키지 않도록 황급히 내민 스마트폰 너머엔, 나름 괜찮은 조건의 빌라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동시에, 친절한 웃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의로 치장한 말이 자하연의 폐부를 후벼팠다.
사실, 정말로 친절한 조건이기도 했고.
다소 탐탁찮은 기분이야 있지만, 쉬이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거기에, 신서아는 사기를 칠 생각도 아니었다. 만일 눈 앞의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정말로 집을 알아봐 줄 생각이었고. 오히려, 그쯤 되면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한 게 아닐까 하고 다소 미안한 감정을 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음 순간, 쿡쿡 웃음을 터트리는 자하연의 반응엔 아무리 신서아라 해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웃어?'
만일 신서아가 입을 열었다면,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고 말았겠지.
그러나, 신서아는 최소한의 인내심을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자하연은 방금 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호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 죄송해요. 웃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웃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네, 맞아요.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요."
"예전 생각?"
"오빠도 그렇게 말했었거든요."
오빠?
뜬금없이 튀어나온 지시대명사에 신서아가 그리 반문할 뻔했다. 물론, 그 명칭이 박우찬을 가리키는 뜻임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미쳤나?'
그러니 더더욱 의문이었다.
그 나이차에 오빠?
물론 박우찬이 그렇게 늙어 보이지는 않는다만, 아무리 그래도 오빠라니.
자신에게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호칭에, 신서아는 무심코 딱 굽소리를 내고 말았다.
새삼스레 깨달은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이 계집애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오빠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집 사줄까? 라고. 두 분이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바람에, 역시 사제 관계인 걸까 하고 생각해버렸네요."
게다가.
뒤이은 말에, 신서아는 눈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뭐? 집을 사줘?
아니, 있을 수 있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헌터들은 위로 가면 갈수록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오히려 반기는 경향이 있었다.
박우찬 또한 필시 마찬가지였겠지.
하지만, 박우찬은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모종의 사정 때문에 눈 앞의 소녀를 자신이 맡아 키우고 있다고.
'그럼 뭐야? 얘, 사부가 집 사주겠다는데 거부하고 따라들어온 거야?'
물론, 거기에는 신서아가 단박에 짐작하기 힘든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다. 허나, 그런 만큼 신서아로서는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결론을 내렸다.
얘, 강적이다.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자신도 모르게 신서아는 꼴깍 침을 삼키고 말았다. 상위 헌터답게, 신서아는 이번 문제 또한 빠르게 돈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하는 김에, 사저와 사매라는 관계를 들먹이며 이를 선의로 포장하는 작업 또한 잊지 않았다. 다소 떨떠름한 점은 있었지만, 선의라는 이름 하에 어떻게든 밀어붙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착각이었어.'
눈 앞의 이 계집애는, 어쩌다 보니 운 좋게 자신의 빈 자리를 꿰차고 들어간 후발주자 따위가 아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사부를 노리고 있는, 뱀이다……!!
"하지만, 죄송해요."
……비록 착각 속에 쌓아올린 답안이었지만, 결론만은 틀리지 않았다.
또렷이 반짝이는 연분홍색 눈동자 너머로, 선명하게 깃든 감정이 바로 그 증거였다.
자하연의 입에서 나온 사죄의 말 또한 그런 신서아의 의심을 부채질했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내 집 마련의 꿈을 고사하는 여고생을 보며, 신서아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꾸벅,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녀의 행동에 따라 물빛 머리카락이 파도친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자하연의 목소리는 실로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거절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무언가 사정이 있다.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오빠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에게 하나하나 알려줄 생각은 없다.
정 궁금하시다면, 당사자인 사부에게 물어보시는 게 어떨런지?
그렇게 말하는 듯한 자하연의 모습에, 신서아는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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