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시그니처
* * *
정필연이 생각하는 박우찬이라는 인간의 뿌리는, 여하간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강자다.
무슨 일이든 넉살 좋게 웃어넘길 만큼 성격 좋은 건 틀림없지만, 그 근간을 지지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실력에 대한 신뢰.
말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자부로부터 오는 여유다.
자칫 잘못하면 오만하게 비칠 만큼 광오한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실수를 저지를 리 없다는 낙관 따위가 아니라, 설령 무언가 잘못됐다 할지라도 자신에겐 별다른 문제조차 되지 못한다 여기는 데에서 오는 자신감. 그리고 실제로 대다수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오는 배포다.
때문에, 정필연은 얼마 전 학교를 떠들썩하게 한 찌라시 기사에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그 기사에 적힌 말처럼 정녕 박우찬이 S랭크 몬스터조차 사냥한 적 있는 헌터라고 한다면, 저런 태도 또한 당연하다 할 수 있겠지.
방금 전, 눈 앞에서 시연한 시그니처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전에 박우찬이 경고해 준 덕택에, 정필연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차분히 관찰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오히려, 충분한 여유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눈으로 쫓기 벅찬 마력의 흐름은 박우찬이 사용한 시그니처의 완성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먼저, 박우찬은 자신의 마력을 얕게 흩뿌렸다. 그러자, 대기 속의 마력이 박우찬의 마력과 접촉하며 뒤섞였다.
그렇게 움직이던 마력이, 어느 순간 캔이나 송판에 담긴 마력과 정확히 맞물린다.
박우찬이 검을 휘두른 건 바로 그 때였다.
검압을 날리지도, 보이지 않는 칼날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문자 그대로, 박우찬의 목검은 당장 눈 앞의 공기를 둘로 나누었을 뿐이었다.
허나.
문득, 정필연은 언젠가 지나가듯 들은 적 있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한 방울의 물로도 사람을 익사시킬 수 있다는 내용의 괴담이었다.
눈 앞에서 일어난 일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박우찬이 한 일은 어디까지나 정확한 타이밍에 공기를 갈랐을 뿐.
결과적으로, 박우찬의 칼이 캔이나 송판 등과 접하는 일은 없었다.
다음 순간, 공기의 흐름과 감응한 사물 속의 마력이 멋대로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허공을 향해 휘두른 박우찬의 검로에 맞춰, 상하로 찢어지는 사물들의 마력. 그 안에 담긴 마력의 흐름에 따라, 시연을 위해 준비했던 물건들이 제멋대로 두동강난다.
그렇기에, 이 시그니처의 본질은 사실 검술이 아니다.
박우찬의 행동에 맞추어 적들이 멋대로 자살할 뿐이니까.
방어하는 건 불가능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건 공격조차 아니다. 방어자가 준비한 갑옷이나 방어구 쪽이 알아서 둘로 쪼개질 뿐이다.
회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박우찬은 공격한 적도 없다. 눈 앞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감정을 이입하듯이, 체내의 마력이 동반자살을 택했을 뿐이다.
재생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꽤 힘들겠지. 회복을 위해 사용한 마력 또한 자괴할 테니까.
문자 그대로, 마검?? 그 자체.
방어 불가. 회피 불가. 재생 저해.
전설 속 마검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효과를, 기교로 재현하는 절기.
문자 그대로, 시그니처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기술이었다.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박우찬이 선뜻 자신의 시그니처를 보여주겠다고 나섰던 건지.
저건, 말 그대로 마검이나 다름없는 기술이다.
상대방이 얼마나 단단하고 재빠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상대방에게 공격을 명중시키기 위한 기교나 힘 따위는 필요 없다.
눈 앞의 공기를 휘저을 수 있을 만한 능력만 있다면, 누구라 해도 죽여버릴 수 있는 기술.
저런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검술 따위를 연습할까?
그럴 리 없다.
설령 누가 상대라 해도 슥 그으면 반으로 갈라져서 뒈져버릴 판국에, 도대체 누가 검을 다루기 위한 기술 따위를 연습한단 말인가.
저런 기술을 손에 넣은 자는 누구라 해도 자만하고 말겠지.
그리고 그 끝에 뒤에서 기습한 E랭크 몬스터 한 마리 처치하지 못하고 십중팔구 그대로 뒈져버릴 게 뻔했다.
지금 정필연이 요구하는 힘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길 고작해야 2개월. 채 반년조차 되지 않은 지금, 눈에 띄는 성장을 바란 자신과 방금 전 상상 속에서 E랭크 몬스터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힘에 취해 죽음을 맞이한 초짜 헌터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단 말인가.
꾸준한 연습으로 손에 넣은 힘이 아닌, 당장에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좇던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얄팍한지 정필연은 깨달을 수 있었다.
"뭐, 별로 쓰기 좋은 기술은 아니지만 말이다."
실제로, 박우찬 또한 그렇게 말했다.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스스로의 시그니처를 손수 시연한 박우찬의 모습에서, 정필연은 마치 옛날 무협지 속 한 장면에 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런데 기술 이름이 어떻게 예쁘게 베기……."
문제가 있다면 딱 그거 하나 뿐.
어떤 깨달음도 대오각성도 손사래를 치고 도망칠 만한 작명에, 정필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리 뇌까리고 말았다.
*
'어우, 씨발. 어지러워.'
오랜만에 사용한 시그니처에, 나는 때 아닌 두통을 삼키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제 2차 대침공의 종식과 동시에 반쯤 은퇴한 몸이었지만, 그 이후로도 훈련은 꾸준히 계속하고 있었다. 다시금 몬스터가 나타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제일 먼저 게이트에 투신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훈련 부족은 아니었다.
원인을 따지자면, 이 기술의 원리 때문이겠지.
몬스터만 봐도 발작하는 감각을 억지로 달래, 대기 중에 섞여 떠도는 마력 입자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몬스터와 같이 게이트 속에서 튀어나온 마력을 향해 의식적으로 정신을 기울인다는 건, 나로서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 일.
게다가 그 집중이라는 게 가벼운 수준도 아니고, 맨눈으로 사물을 구성하는 분자나 원자를 살피려는 행동이나 진배는 수준이다.
때문에, 머리는 머리대로 아프고 감각은 바퀴벌레 해부 실험에 도전하는 나를 뜯어말리는 것처럼 미쳐 날뛰는 상태를 억지로 유지한다.
그렇게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다, 칼을 한 번 휘두르면?
어머나, 신기하게도 깔끔하게 절단 완료.
어떠한 몬스터가 상대라 해도 순식간에 죽여버릴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필살기 완성이다.
문제는, 이런 구조 상 어마어마한 두통이 뒤따른다는 점.
기술 자체에 딸린 부작용이 아니라, 땅콩 알레르기를 무시하고 땅콩을 지분거리는 일이나 다름없는 내 행동에 몸이 멋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발열과 오한 등, 자칫 잘못하면 전선에서 이탈할 가능성도 농후하고.
한 마리를 잡는 데에도 다수를 동시에 상대하는 데에도 나쁘지 않은 기술이지만, 빗나갈 경우 뒷처리가 귀찮다는 뜻이기도 하다.
적절한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 필살기.
말 그대로 시그니처다.
'씨이빨, 부작용만 없었으면 확 그냥…….'
리스크만 없었다면 사냥할 때마다 갈기고 시작하지 않았을까.
효과는 확실하지만, 솔직히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도 언젠가 시그니처를 만들어야 할 때가 올 테니까, 그 때가 오면 참고로 삼으렴."
문제가 있다면, 과연 정필연이 이거 하나로 만족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정필연은 내 말에 적극적으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 참, 저렇게 좋아하니 또 뭐라 말하기 힘드네.
피식,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 그런 내 헛웃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금 전 내가 보여준 시그니처를 천천히 되풀이하는 정필연. 어설프게 손을 휘적대는 꼴이 퍽 우스웠지만, 적어도 처음보다는 나았다.
뭐, 단박에 따라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진 않지만.
일단 내 시그니처를 사용하기 위해선 마력 감응 능력이 필수적이다. 주변의 마력과 대상의 체내 마력이 맞물리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야 하니까. 설령 부족한 감응 능력을 어떻게든 보충한다 치더라도, S랭크 헌터가 한두 마리를 대상으로 사용하는 게 고작이겠지.
그조차도 내가 아니면 준비 시간이 너무 길어서 결함 기술 아니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을 정도니까.
아니, 애시당초 시그니처라는 게 당사자를 제외하면 으레 그런 법이지만.
솔직히 결함 기술이니 뭐니 해도 이준구 그 새끼보다는 낫지 않나?
제 신경을 100번 이상 벼락에 튀긴 다음에야 완성했다는 미친 기술을 떠올리며 부르르 턱을 떨고 있자니, 정필연은 천천히 입을 열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시그니처, 시그니처라."
"당장에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구상을 잡아둘 수 있다면 나중에 편리하겠지?"
"그것도 그렇네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필연의 모습에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 앞을 흐리던 미혹은 느껴지지 않았다.
캬, 저거 저 모습 좀 보소. 드디어 나도 교사로서의 '재능'을 일깨워버린 건가?
스스로의 성장과 진보에 감탄하고 있자니, 문득 정필연이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툭 하고 그리 내뱉었다.
"아니, 그런데 기술 이름이 어떻게 예쁘게 베기……."
이 새끼가?
"야, 필연아. 물론 네가 보면 이상할 수도 있겠지. 선생님이 저 나이 먹고도 아직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다 이해해."
"어,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는데요……."
"하지만 생각해 봐라."
당연하지만, 시그니처라는 건 좋든 싫든 당사자의 능력을 극한까지 규명한 절기가 되기 마련이다.
요컨대, 방금 전 내가 사용한 시그니처처럼 정밀 조정이 가능한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는 뜻.
개중에서도, 최승준과 같이 능력을 퍼붓는 타입의 헌터들이 사용하는 시그니처는 대개 그 범위도 위력도 장난이 아니다.
피아 구분도 안 될 만큼 말이지.
"교전 상황에서 '저번에 쏜 아무튼 대단한 우르릉 쾅쾅' 쓸 테니까 거리 벌리라고 하면 걔들이 알아듣겠냐, 아니면 못 알아듣겠냐?"
"못 알아듣겠죠."
"그래, 인마. 특히 난전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딱 봐도 그럴듯한 이름 하나 붙여두는 거지. 아무튼 대단한 거 쏜다고 하면 잘 모르겠지만, 이준구가 뇌신을 쓴다 하면 알아들을 거 아니냐."
본질적으론 헌터들의 이미지 메이킹과 마찬가지다.
막말로, 여태까지 C랭크 몬스터 토벌 몇 번 B랭크 몬스터 토벌 몇 번 한 적 있는 누구누구입니다 하면 알아들을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일찍이 맞이한 대침공에서 헌터들을 영웅시해 사람들을 결집시킬 필요가 있었던 대한민국 정부는 망설임 없이 헌터들에게 쪽팔리는 별명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A랭크 몬스터 세 마리를 잡은 중견 헌터가 왔다고 말하는 것보다, TV에서 보던 멋들어진 별명의 헌터가 왔다고 말하는 게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데에는 훨씬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동영상 사이트 1면에 대문짝하게 박힌 이준구의 얼굴 밑으로 달린 자막 또한 바로 그런 예시 중 하나였다.
[뇌 신 강 림]
……도축업자보단 뇌신이 낫지 않나 생각하던 나조차 경악할 만한 센스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이준구는 국회에서 큰 소리 한 번 못 내지 않을까?
헌터로서 민간인들을 윽박지르긴 조금 그렇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내가 이준구의 정적이라면 녀석이 손바닥 한 번 내려칠 때마다 뇌신 강림이라면서 뒤로 넘어갈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래도 조금 더 괜찮은 이름이 있지 않았을까요?"
"왜? 선생님이 예쁘게 베기니까 너는 깍둑썰기라고 불릴까봐?"
"……."
"……."
"에헤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고 그러십니까. 사람 섭섭하게."
이 새끼 봐라?
뭐, 내가 이런 기술명을 붙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시그니처 무브에 이름을 붙이는 건 동료들에게 지금부터 큰 기술을 쓸 테니 알아서 피하라는 신호에 가깝다.
당시 이 기술을 완성한 나 또한 예쁘게 베기라는 가칭을 정해두고 언젠가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일생각이었지만…….
'기회가 없었지.'
나는 파티가 없었다.
씨발.
홀로 게이트 근처를 전전하며, 가끔씩 일부 헌터들과 협력하는 게 다였던 나로서는 애초에 시그니처를 쓰겠다고 경고할 만한 대상도 경고를 했다 한들 알아먹을 만한 이들도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내 시그니처의 이름은 가칭으로 붙여두었던 예쁘게 베기가 되고 말았다.
아니, 나도 마음 같아선 막 멋진 이름 붙여주고 싶지~
하늘 베기!! 천지 가르기!!
얼마나 멋있냐 이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길 거진 10년.
이제 와서 다른 이름을 붙여도 헷갈릴 뿐 아닐까.
"하여튼, 도움은 됐니?"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래.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렴.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래도 기술 이름은 제가 붙일게요."
"하하하, 이 자식. 하하하!"
그렇게.
정필연과 관련된 문제도, 어떻게든 일단락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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