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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55화 (55/371)

〈 55화 〉 시그니처

* * *

그렇게 방문한 정필연의 집은 꽤 으리으리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있어, 으리으리한 집이라는 건 대충 가족 수대로 방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허나, 이런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아도 정필연네 집은 상당히 널찍한 편이었다. 거기에는 대충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로는 보기 드물게도 고아가 아닌 정필연의 가족사 때문이요 둘째로는 이 집이 정필연네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검도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들은 내 예상과 달리 놀이터 근방에서 흙이나 지분대는 대신 뒷마당에 딸린 검도장에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캬, 너희 집 좋다. 연습하기 딱이네."

"아, 예."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정필연은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색해하고 있다 해야 할까?

물론 나 혼자만 왔다면 정필연 또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남고생에게 지금 이 상황은 퍽 당혹스러운 모양이다.

"아니, 선생님."

"왜?"

"쟤는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야, 선생님이 말했잖냐. 원래 너 다음에 쟤 상담할 생각이었다니까."

"듣기야 했지만, 그래도 다른 데 구경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죠……."

설마 여기까지 따라들어올 줄은 몰랐다는 듯이, 정필연은 이 도장까지 우리와 동행한 하연이를 향해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다.

하연이로서는 다소 억울했겠지만.

여하간, 이제 와서 칼질에 관심이 생긴 하연이가 멋대로 우리 뒤를 따라온 건 아니었으니까.

갑작스레 일정을 잡은 내 탓이지.

상담 일정도 당연히 핑계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 앞에서 '사실 쟤가 우리 집에서 살고 있거든' 하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정필연 또한 하연이에게 축객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다소 미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뿐. 속으로는 여기까지 따라와 저녁 상담을 진행해야 한다는 하연이의 가정사를 지레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나로서는 편할 따름이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고. 어지간한 고아들보다 기구한 사정을 가진 게 우리 하연이니까.

"왜, 긴장했냐?"

"놀리지 마십쇼……."

"아니, 뭐가 어때서? 그 나이 땐 다 그런 거지 뭘. 쟤도 좀 예쁘장하긴 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누가 와도 마찬가지에요. 저 남중 출신입니다."

"엇, 미안……."

내 대답에 정필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앓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이런 말은 조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남고생에게 동년배 여학생이란 미지의 생물이나 다름없는 법.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겠지.

결국 녀석 또한 하연이에게서 신경을 끄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훨씬 더 각 잡힌 모양새라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래. 해서, 뭐였지?"

"검술입니다."

으음, 검술인가.

나도 모르게 턱을 쓰다듬었다. 일단,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한 가지 정정해야 할 게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생님이 익힌 건 검술이 아냐."

단적으로 말해, 내가 사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해체법이다.

말 그대로, 처음 상경한 이래 활동 자금을 벌고자 해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뛰며 익힌 지식을 기반으로 한 기술.

거의 몇 년 가까운 시간을 자금 확보용 아르바이트로 허비한 게 아까워, 어떻게든 활용할 수 없을까 주구장창 고민한 끝에 짜낸 기교.

눈 앞의 몬스터를 상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한 해체술 일체다.

후일 다른 전문가들과 교류하면서 검술을 접목시키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당시 사용하던 연장들과 그나마 비슷한 게 검이었기 때문이고.

요컨대, 내 기술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손에 넣은 지식에 더해 추가로 검술.

반면에, 정필연 쪽은 검술 쪽이 주가 되겠지.

허면, 반대로 접근해야 한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고작해야 2개월 안에 무언가 극적인 성취가 있기는 어렵다. 단순 훈련도 마찬가지지만, 기술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아무래도 말하는 걸 들어보면 정필연은 대련 당시 내가 사용한 기술에 벽을 느낀 모양이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렇게 칼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역으로 길을 잃은 느낌?

뭐, 당장에 따라할 수 있을 리 없는 기술의 편린만 보고 무작정 삽을 푸고 있으니 그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쪽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차분하게 길을 잡아주는 거겠지.

"일단 자세부터 잡아 볼까?"

그리 말하자, 조용히 듣고 있던 녀석 또한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무난한 중단세. 기본 중의 기본이었지만, 섣불리 빈틈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완성도였다.

나 또한 고개를 주억거리며, 본디 시험에서 녀석이 마주했어야 할 상황을 제시한다.

"그렇게 게이트를 공략하고 있던 네 앞에, 갑각이 두터운 몬스터가 나타났다. 어떻게 할 거지?"

엇, 소리를 내며 허겁지겁 자세를 바꾸는 정필연. 일전 영상 속에서 본 적 있는, 강검을 내려치기 위한 자세였다.

"네 그런 모습을 본 괴조가 머리 위에서 강습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 말에 한층 더 막막한 얼굴로 검을 쥔 녀석은 하늘에서 틈을 노리는 괴조를 상대하기 위해 시선을 올렸다.

충실한 반응 참 고맙네. 하지만, 문자 그대로 눈 앞의 상황에 대응하고자 급급한 게 보일 정도였다.

"타이밍을 재던 괴조의 강습. 목표는 눈이군. 부리로 쪼려는 건지, 발톱으로 후비려는 건진 당장에 읽을 수 없지만. 허면?"

"괴조를 견제할 수 있도록 상단세를 유지해야겠죠."

"좋아, 그럼 넌 눈 앞의 갑각류한테 깔려 죽었다."

"네?"

내 말에 정필연이 당황한 듯 소리를 냈다. 무언가 자신이 간과한 게 있을까 의아해하는 듯한 태도였다.

물론, 이런 문제에 정답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점에 대해 예시가 될 순 있겠지.

"이런 거야."

"예?"

"방금 전 기술과 검술, 어디에 차이가 있는지 알겠냐?"

"어, 아뇨……."

"야, 인마. 대상이 다르잖냐, 대상이."

아,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딱히 엄청난 비밀도 아니건만, 헌터들 중에서도 이를 간과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무술이란 곧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 그렇기에, 최적의 투로라는 게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자신과 상대 모두가 사람이라면, 결국 취할 수 있는 움직임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니까.

사냥꾼의 기술, 수렵기???는 다르다.

먼 옛날, 이 땅에서 호랑이를 상대했다는 착호갑사의 기술만 해도 그렇다. 격투기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듯이, 오로지 철저하게 호랑이의 습성을 공략하기 위한 기술들만 존재할 뿐.

헌터들 또한 마찬가지다. 헌터들에게 있어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몬스터를 사냥하는 기술. 그 성질을 파악해 적절한 공략법을 제시하는 게 바로 헌터들의 일이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것도 바로 이런 쪽이고.

방금 전, 녀석이 펼친 어설픈 자세들은 내 수업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 적용한 결과물이겠지.

향상심은 나쁘지 않지만, 헛돌고 있다는 기분을 감출 수 없는 게 바로 그 때문이다.

막말로, 총기에 맞아도 멀쩡하지만 소금을 뿌리면 제압할 수 있는 몬스터 따위가 버젓이 활보하는 게 이 업계다. 헌터들에게 중요한 건 이런 몬스터들의 생태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난생 처음 본 몬스터를 상대로도 공략법을 짜낼 수 있는 분석 능력 쪽.

순수하게 실력 상승을 지향하고 있는 녀석이 손을 댈 만한 기술은 아니다.

아무래도 대련 당시 내가 사용한 기술을 지향한 탓에 내 말이란 말은 전부 접목해 본 모양인데…….

"일단 그건 그만두자."

저런 식의 대처법은 가장 먼저 몬스터에 대한 지식과 파악 능력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필요할 때, 필요한 기술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하면 당장엔 방해밖에 안 되겠지.

애초에 내가 교육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고.

녀석 또한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은 납득한 듯한, 반쯤은 납득하지 못한 듯한 얼굴이다. 본인 또한 느끼고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그 외에 마땅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아 막무가내로 시도해봤던 거겠지.

뭐, 기술이란 본래 그런 법. 형편 좋은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말해 봐야 녀석의 고민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할까.'

생각나는 방도가 없지는 않다.

막말로, 눈 앞에서 그럴듯한 검법 하나 보여주기만 해도 도움이 되겠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단한 기술과, 눈 앞에서 차근차근 설명하며 시연해 주는 기술.

어느 쪽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묻는다면, 불을 보듯 뻔한 이야기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당장 눈에 띄는 성취를 얻을 순 없겠지만, 맨 땅에 헤딩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고.

문제는.

'골때리네.'

내게 이런 상황에서 시연할 수 있을 법한 기술 따위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진짜로.

내 기술에 검법을 접목하며 익힌 건 발디딤이나 체중 분배 등, 어디까지나 내 몸을 제대로 다루는 기술 쪽.

몬스터를 썰어 죽이는 데에 사용하는 건 사냥꾼으로서 체득한 경험 등이다.

검술 또한 참조가 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몬스터가 상대라면 공략에 사용할 수 있는 지식 쪽이 기술보단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축지?

나쁘진 않겠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거나 벌리는 건 물론이요, 발판 하나 없는 장소에서도 똑바로 발을 딛으며 싸울 수 있다는 건 내가 생각하기에도 엄청난 어드밴티지였으니까.

심지어 이 쪽의 간격을 헷갈리게 하는 효과도 있으니, 축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보법이자 경신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녀석이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검술 쪽이란 말이지.'

내가 몬스터를 상대할 때 중시하는 건 뭔가 화려한 기교가 아닌, 차분하게 몬스터의 성질을 공략할 수 있는 부류의 기술.

즉, 화려함이 부족했다.

막말로 썰어댈까 깎을까 도려낼까 파낼까 고민하는 정도니.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넘길 때 사용하는 기술도 있지만, 이 쪽은 예의 대련 때 사용한 기술처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도 못할 공산이 크고.

으음, 어쩐다?

잠시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녀석이 살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궁금해하는 그 시선에, 나는 마치 생각이 다 있다는 식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러다 문득 도장 어귀에 버려져 있던 캔이 눈에 띄었다.

"아."

생각났다.

다행스럽게도, 딱 적절한 기술이 있었다.

"그렇지. 야, 필연아. 시그니처Signature라고 알고 있냐?"

"예? 그야, 알고는 있습니다만."

시그니처.

물론, 영단어를 물어본 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그니처 무브Signature Move라고 해야겠지.

문자 그대로, 한 헌터의 상징이 되는 기술이다.

정부가 나서서 헌터들을 영웅시하고 있는 지금은 다소 겉멋에 치중된 감이 있지만, 본래 헌터들이 사용하던 의미는 말 그대로 필살기.

걸핏하면 사람이 뒈져나가는 이 업계에서도, 저 기술 하나만으로도 밥 벌어먹기 충분하다 여겨지는 절초??다.

그리고 이런 물건인 만큼, 업계인들이 인정하는 시그니처는 정말로 막되먹은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준구의 시그니처.

통칭 뇌신?이 있다.

자신의 몸을 벼락으로 뒤바꾸며 내지르는 스트레이트.

문자 그대로, 벼락을 보고 대응할 만한 센스나 뇌속으로 날아드는 주먹을 맞고도 견딜 수 있는 내구력이 없다면 알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물건이다.

사실상, 녀석과 같은 씨름판에 오르기 위해선 저 기술을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갖추는 게 전제 조건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녀석은 저 시그니처 한 방으로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 테니까.

시그니처란 대개 이토록 막무가내이기 마련이다.

"보여줄게."

그리고 이건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시그니처를 보여준다는 내 말에 녀석은 당황한 듯 눈을 부릅떴지만, 사실 딱히 숨길 만한 물건도 아니었다.

애초에, 같은 계통의 능력이라 해도 사용자에 따라 세세한 부분은 천양지차.

거기에, 시그니처라고 하면 이런 미세한 차이점을 한층 더 부각한 전용 기술이니까.

녀석이 이걸 본다고 해서 단박에 따라할 수 있을 리는 없겠지. 것보다, 여태까지 따라할 수 있는 녀석을 본 적도 없다.

그러나, 녀석이 무언가 참고가 될 만한 기술을 찾아 헤매고 있는 거라면 보여줘도 나쁠 건 없겠지.

"어, 예?"

"보여준다니까, 시그니처."

방금 전, 내 눈에 띈 캔을 적당한 위치에 세웠다. 그리고 그 옆에 널부러진 송판과 돌, 거기에 적당히 창고에서 꺼낸 철판까지 일렬로 세운다.

균일감 있는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애시당초 내 시그니처는 옆에서 봤을 때 확 티가 나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대상으로 삼을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눈에 힘 빡 주고 있어라~"

갑자기 시작된 때 아닌 시연회.

당황한 듯 허둥대는 정필연의 모습을 뒤로하며, 나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사실, 다른 애들의 반응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재주 좋게 주변을 신경 쓰면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기술도 아니었고.

그렇게.

한층 확장된 내 감각이 저 멀리 세워둔 물건들 속의 마력과 접촉했다.

몬스터와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잠잠하던 감각을 억지로 일깨운다.

마력.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게이트가 흩뿌린 산물에 접촉하기 위해서다.

몬스터를 상대할 때라면 이 쪽이 의식하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 평소에는 굳이 의식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미세한 극소량의 마력을 향해 억지로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자, 평소와는 다른 내 행동에 당황한 감각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극한까지 예리해지는 육감.

억지로 일깨운 감각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 속, 희뿌옇게 흩뿌려진 마력이 주변을 안개처럼 감싼다.

그렇게.

우윳빛으로 요동치는 마력과 목표물 안에 담긴 마력의 흐름이 일치한 순간.

나는 허공에 목검을 가로로 그었다.

──쩍!!

베인 것도, 잘려나간 것도 아닌 기묘한 소리.

그와 동시에, 일렬로 늘어서 있던 물건들이 반쪽이 나 부러졌다.

"어?"

검압을 날린 것도, 보이지 않는 참격을 휘두른 것도 아니다.

문자 그대로, 눈 앞의 공기를 벤 결과 캔과 조약돌 등이 반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서로 각기 다른 높이에서 정확히 반으로 나뉜 그 모습들은, 참격에 의해 두동강났다기보다는 차라리 '반으로 나뉜다'는 개념을 억지로 적용한 듯한 모습이었다.

사용한 건 꽤나 오랜만이었지만, 이게 내 시그니처.

"예쁘게 베기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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