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성적평가
* * *
"죄송해요."
다음 날.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야 나와 독대할 수 있었던 지희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푹 숙였다. 그에 맞추어 흐드러지는 은발이 퍽 화려했다.
"어, 어어. 그래."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
평소 학교에서 까불대던 모습은 물론, 그 날 석양 지던 교실에서 보았던 모습과도 사뭇 다른 태도였기 때문이다.
뭐, 이번 사태를 두고 지희 나름대로 느낀 점이 있는 거겠지만…….
"뭐, 너무 죄책감 가지진 말고."
사실, 내가 보기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싶었다. 일전, 혼인회를 회유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다.
그토록 혼인회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중시하던 남상원이 아카데미 습격 따위의 오명을 감수하고 이번 일을 단행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다시 말해, 이번에 습격을 사주한 자들이 제시한 보수다.
즉.
"국회에서 언급해주기로 했었다며?"
이번 습격을 지시한 자들은, 남상원에게 그리 약속했었다고 한다.
만일 이번 일에 힘을 보태줄 경우, 결과와 상관 없이 국회에서 혼혈들과 관련된 사안을 언급해주겠다고.
가장 먼저 사람들에게 혼혈이란 어떤 존재인지 주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던 남상원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겠지.
물론, 이 쪽에 붙은 지금은 무용지물이 되었겠지만.
애초에, 그렇게 하청업체 굴리듯 혼인회를 대하던 이들이 정말로 남상원의 부탁을 마음에 담아두었을까 묻는다면 아무래도 회의적인 대답을 돌릴 수밖에 없다.
허나.
반대로, 그들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을까 하는 주제로 간다면?
썩 부정하기 힘들다.
여하간, 여태까지 보여준 솜씨만 해도 그렇다. 솔직히 말해, 저들이 이 나라에서 손을 대지 못할 안건이 존재하기는 할까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그만한 양반들이 도대체 뭘 위해 하연이를 납치하려 드는 건지 모르겠다는 점인데.
정작 여기에 대해서는 혼인회 또한 별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오히려 이 쪽에게 자하연이 누구냐고 되물었을 정도였고.
이를 통해 미루어 보건대, 저 쪽 집단은 점조직 체제인 게 아닐까 싶다. 이번 일에 써먹고 말 생각이었던 혼인회에게는 예의 헌터에 대한 정보를 흘렸지만, 반대로 하연이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도 하지 않는 식으로.
그렇지 않고서야, 기껏 아카데미까지 잠입할 인력이 있는데 하연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래도 이해하기 부자연스럽다.
아마도 이번 일을 추진한 건 예의 헌터 자식이 붙잡힌 탓에 큰 손해를 보게 생긴 측이겠지.
혼인회를 부리던 모습 등을 고려하면 정말로 수평적인 관계는 아니겠지만, 반대로 그렇게 세심하게 컨트롤할 수 있을 만한 구조도 아닐 거라는 게 나와 최승준의 추측이었다.
뭐, 덕분에 녀석들로서는 구사일생한 셈이다. 만약 그런 구조가 아니었다면, 남상원 등을 통해 그들의 계획이 새어나갔을 테니까.
그렇기에, 우리들은 때 아닌 휴식 기간을 가지기로 했다.
저들이 언론전을 시도한 끝에 역으로 반격당한 게 바로 얼마 전 일이다. 벌써부터 이를 수습하고 추가적인 공세에 나서기엔 요 최근 우리들의 득점도 심상치 않으니, 저 쪽으로서도 당장엔 머리를 낮출 수밖에 없겠지.
비슷한 이유로, 곧장 혼인회에게 손을 뻗을 수도 없으리라.
자신들을 이반한 혼인회가 괘씸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경우 혼인회를 공격하기 위해 정계 쪽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혼인회를 방패 삼아 한층 더 쉽게 저들을 특정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솔직히 말해, 저들이 만약 혼인회를 치기 위해 꼬리를 드러낸다면 우리에겐 좋은 일이 될 뿐이니까.
반대로, 그렇기에 별로 기대할 수는 없다.
저들과 싸우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나. 그리고 나를 위시로 한 이준구나 아카데미 등이지 혼인회가 아니고.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렴."
그만한 미끼를 아무렇지도 않게 턱 던지는 녀석들이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다소 마이너한 단체인 혼인회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니.
무엇보다.
'결과적으론 다 잘 됐고.'
혹여 일이 잘못되었다면 또 모를까, 잘 풀렸다면 나중에 이야기할 수 있는 환담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마음 고생은 지희가 더 심했을 테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건진 지희 본인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당했을 땐 빡쳤고, 사실 지금도 조금 빡쳤지만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이랑 아는 아저씨가 서로 칼부림 안 나게 하려 그랬다는 말에 달리 뭐라고 할 수 있겠나.
하물며 실질적으로 내가 본 손해라고는 고작해야 10분 정도 시간을 허비한 것 뿐.
'별걸 다 신경 쓴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지희가 유난 떠는 기분이다.
최승준도 그렇고 요 녀석도 그렇고, 평소엔 맹랑한 녀석들이 이럴 땐 더하단 말이지.
얼마 전, 이렇게 된 이상 혼인회를 처벌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사과하러 온 최승준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때도 그랬지만, 솔직히 그렇게 말해도 곤란할 뿐이다.
애초에 혼인회를 처벌한다 해 봐야 내겐 별다른 이득도 없다. 어쩌면 한 시간 정도는 통쾌할지도 모르겠지만, 고작해야 내 기분 하나 좋자고 그러는 건 조금 불쌍하지 않나 싶다.
때문에, 한층 더 심하게 풀죽은 지희를 향해 나는 조금 다른 말을 던지기로 했다.
"것보다, 알았으면 다음부턴 다른 어른들한테 상담도 좀 하고."
세상이 뒤집혔다고 해도, 고등학생은 어디까지나 고등학생.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 봐야, 이제 막 성장기에 접어든 녀석들이다.
요컨대, 성격이 급하고 채신머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지희 일만 해도 그렇다. 나랑 남상원이 싸우는 게 그렇게 무서웠으면,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릴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나한테 말했으면 됐잖아.
나나 남상원 그 양반을 억지로 떼어놓는다던가, 일개 고등학생 입장으로 혼인회랑 아카데미 사이를 조율하려 한다던가…….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던 건지 뭔지, 어느 쪽이든 결과는 성대하게 대실패. 결국 나나 최승준이 수습하고 끝났다.
이럴 거였다면 처음부터 나한테 말하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세요?"
"그럼!"
내 말에 다소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희는, 곧이어 맥없이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쯧쯧,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혀를 차며 손에 든 종이다발로 책상을 두드렸다.
"너 눈 또 그렇게 뜨는데, 그렇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봐, 이거 어떻게 할 거냐?"
"윽."
그리 말하며 책상 위에 늘어놓은 건, 물론 지희의 성적표다.
자신도 모르게 죽는 소리를 낸 지희였지만, 사실 성적 자체는 평균 정도였다. 요령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와 남상원 사이의 일정을 조율하던 것 치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실기 시험 쪽이다.
다시 말해, 이번에 지희가 내던진 바로 그 물건 말이다.
"아니, 지희야. 선생님 살면서 시험 불참자는 난생 처음 봤다."
"그야, 선생님 되신지 얼마 안 되셨으니까……."
"어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말도 아니었다. 하물며 내가 기대하고 있던 발언도 아니었다.
혀를 차는 내 목소리에, 방금 전과는 한층 다른 이유로 낙담하는 지희.
그러나, 저토록 넉살 좋은 지희라 해도 성적표 한 가운데에 뻥 뚫린 구멍을 보는 순간 탄식을 토하고야 말았다.
"지희 성적 실화냐? 실기 0점은 진짜 전설이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있었구……."
"그런다고 넘어갈 문제니, 이게?"
결국, 지희는 그 날 시험에 불참하고 말았다. 당연히 점수는 0점 처리됐고.
평소 훈련과 이번 시험 기준이 맞물린 것도 있어, 다른 반보다 평균점이 높았던 우리 반에선 한층 더 눈에 띄는 점수였다.
지희를 제외하면 모든 반 중 최상위. 지희를 포함하면 모든 반 중 최하위.
각 반마다 고작해야 열댓 명밖에 안 되는 지금 이 상황에선 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금 이 자리는, 문자 그대로 성적 평가.
중간고사 시험 결과를 두고, 각 반의 담임들이 실력 보충을 위해 학생들에게 조언을 건네는 시간이다.
뭐, 지희는 일단 참가부터 하자는 소리 외에는 달리 할 말도 없어 이렇게 환담이나 나누고 있었지만.
다른 교사들이 보기엔 무언가 문제가 있어 시험을 앞두고 도망친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 적당히 구색 맞추기로 이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내 생각에, 1학기 성적은 조졌다. 지희야, 포기하자."
"여, 열심히 할게요."
"그래.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그 이상으로 잘 해야 하고."
내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적, 나를 갈구던 선생들의 레퍼토리를 화려하게 펼친다.
마치 몬스터를 해체하듯 학생의 정신을 분해하는 연계 공격. 지희 또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조용히 뇌까리고 만다.
"아니, 전 딱히 졸업할 생각도 없다구요."
"엇?! 지희야, 축하한다!! 두 번째 능력을 각성한 거니?"
"네?"
"아무래도 폭발 능력인가 보구나. 선생님 속이 뻥 하고 터져버렸다, 지희야!!"
쾅쾅, 갑갑한 마음에 가슴을 두들기고 있자니 한층 더 울상짓는 지희.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역시 여고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휴우,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정리했다. 그런 내 숨소리에 지희가 잠시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번에는 혼낼 생각이 아니었다.
"이제는 졸업도 생각해야지."
"……."
"최승준도 말했잖냐. 너희 졸업 방해할 생각 없다고. 다음 학기부터 느이 동생들도 신입생으로 받을 거라고."
"교장 선생님이요?"
"어, 어어. 그래. 최승준 교장 선생님. 어어, 흠."
아니, 그 자식한테 존댓말 하려니까 왜 이렇게 입에 안 붙지?
나도 모르게 입 안으로 투덜거리고 있자니, 지희 또한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쿡쿡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으로부터 2주 전, 교실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그러게요."
"그래. 썩 좋은 형태로 만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게 끝났잖니."
이렇게 얻은 기회인데, 날려버리는 건 아깝지 않을까?
그런 취지의 발언에, 지희도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는 것도 잠시.
"뭐, 네가 참가했으면 성적도 나쁘지 않았겠지. 딱히 더 해 줄 말도 없고."
"으응? 정말요?"
"그래. 남상원 그 양반한테 실험도 해 봤다며."
몽마로서의 능력과 류지희 본인의 체술, 양 쪽을 결합한 전법.
지나가듯 말해준 거였지만, 아무래도 결과가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남상원 그 양반은 아직도 지희한테 당한 어깨가 뻐근하다고 엄살을 부리고 있을 정도니.
어느덧 학교의 경비병으로 취직한 혼인회 인원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자니, 지희도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마력 조작도 나쁘진 않지만, 결국 우리는 헌터잖냐."
몽마는 다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직접적인 전투 능력은 약하다.
정신 간섭, 마력 조작, 물리적인 간섭이 버거운 등 온갖 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데미지를 줄 수단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하지만, 이를 다른 수단으로 보완할 수 있다면?
직접적인 공격 수단이 없다는 몽마의 단점을, 온갖 보조에 특화되었다는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물리적인 간섭이 버겁지만 이 쪽도 물리적인 공격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점은, 백병전에서의 우위를.
정신 간섭이 가능하지만 지정할 수 있는 효과는 오로지 매료 뿐, 정신에 문제를 일으키는 식으로 공격할 수 없다는 단점은 전투 도중 상대에게 억지로 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된다.
몽마 특유의 마력 조작 등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날개까지 있으니 공중 전투도 가능하다.
앞으로 남은 기간 내내 지희는 이런 방향으로 훈련시키는 게 좋겠지. 내심 플랜을 구성하며, 지희를 향해 가벼이 턱짓한다.
"자, 상담 끝. 그러니까 이제 표정 좀 펴고, 다른 애들 좀 데려오렴."
말마따나 다소 복잡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혼인회와 관련된 문제도 일단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지희는 다시금 혼인회 소속의 몽마 혼혈이 아닌 아카데미의 학생으로, 나는 아카데미의 교사로 되돌아와야 할 때였다.
"네~"
한층 활기찬 태도로 그리 말하며 상담실을 뒤로하는 지희.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언젠가 같은 장소에서 색다른 감상을 품었던 적이 있음을 문득 떠올리고 있었다.
"하여간, 좋을 때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목적을 알 수 없는, 예의 세력과의 암투.
복잡한 정치적 술수나, 서로의 입장.
여러 사정이 얽히고설킨 저번 주를 지나, 마침내 중간고사가 끝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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