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중간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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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감쌌다.
거짓말. 다음 순간, 남상원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바로 그런 단어였다. 허나, 이를 입 밖에 내기 직전 사내는 간신히 자신의 입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박우찬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달리 없거니와, 설령 거짓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증명할 방법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지지부진한 논쟁만 계속되겠지. 그리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해지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다.
때문에, 남상원은 반대로 생각해보고자 했다. 만일 저 말이 사실이라면, 무언가 달라지는 점은 있나?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물론 분위기가 어색해진 건 부정할 수 없지만,설령 참이라 한들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해서 꽁무니를 뺄 수도 없겠지."
"아니, 항복해도 되는뎁쇼."
그 말에, 박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대고 말았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남상원과의 첫 대화에서 말했듯, 못 먹는 감 찔러나 본 수준이겠지.
하지만, 정작 남상원은 그 말에 폐부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투항한다면 어떻게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겠지. 아카데미 측에게 그럴 마음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이대로 들이받는 것보다야 훨씬 더 가망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상원은 싸움을 포기할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해서?
대의는 사라졌다. 만일 박우찬의 저 말이 사실이라면, 혼인회는 혼혈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말아달라 외치며 편견만으로 다른 이를 대한 집단이 되고 만다.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들이 눈 앞의 사내에게 범한 실수를 시정할 기회조차 걷어차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대의라는 포장을 걷어내니 남은 건 바닥까지 긁어낸 욕망 뿐이다.
혼인회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이상,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욕망. 자신과 달리 아이들이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욕망. 그리고, 이를 위해 앞으로 흐를 피로부터 눈을 돌린 채 대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 있을 만큼 추악하게 눌어붙은 욕망.
스스로의 민낯을 직시하는 기분으로, 남상원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허면, 가겠네."
"앗, 예. 뭐, 오십쇼."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
물론, 그렇다 해서 싸움에 임하는 자세까지 둔해진 건 아니다.
자세를 낮춘 남상원이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류지희와 합을 나눌 때랑 달리, 이번에는 무기의 간격 안까지 접근해야 하는 상황. 허나, 남상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거인의 힘이다. 스타일을 바꿨다 해도, 변함없이 격투전으로 끌고 가
그에 비해, 박우찬은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칼날에 회전을 싣는 대신, 검면에 달린 보조 손잡이를 움켜쥔다. 세세한 부분은 다르지만, 서양식 대검의 리캇소를 활용한 자세와 얼추 비슷했다.
거인의 힘을 물려받은 남상원에게, 거인 몬스터 특유의 질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인전에 있어 이는 단점이 아닌 오히려 장점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체격으로 발휘하는 거인의 근력에 대응하기 위해선, 지금 당장엔 이 수단이 최선이었다.
저번 싸움과 달리, 무기를 포기한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야 거인의 육체 능력에 이리저리 휘둘릴 뿐. 아무리 박우찬이라 해도 거인을 맨손으로 상대하겠다는 건 지나치게 무모한 발상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전에, 손조차 닿기 싫은 것도 있고.
눈 앞에 떡 하고 자리잡은 철괴. 이를 상대하기 위해 남상원이 선택한 수단은 짧고 빠른 연타였다.
양 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주먹을 채찍처럼 후려갈긴다. 복싱에서 말하는 잽에 가까운 동작이다.
물론, 잽이라 해도 거기에 담긴 건 거인의 힘. 눈 앞의 무기를 단박에 때려부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반대로 쉬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물건도 아니다.
때문에, 감탄해야 할 건 남상원의 견제가 아닌 박우찬의 기교 쪽.
한 손은 검의 손잡이에, 한 손은 검면에 부착된 보조 손잡이에. 처음엔 마치 창처럼 들고 있던 무기를, 순식간에 반전시켜 마치 방패처럼 들어 올린다. 동시에,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손이 저릿할 거인의 연격을 미세하게 흘려 넘긴다.
마치 산을 두들기는 듯했다. 실내에서 다루기 힘든 거병을 상대로, 거인의 힘을 아낌없이 휘두르는 남상원. 박우찬이 예상했듯이, 맨손으로 맞붙는 것보단 낫겠지만 무기의 장점을 살릴 수 있을 만한 상황도 아니다.
허나, 남상원의 주먹은 단 한 발도 박우찬의 방비를 돌파하지 못했다.
농담같은 상황에, 무심코 헛숨을 들이키는 남상원. 공세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저 수비를 타개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훅? 스트레이트?
공교롭게도, 이 상황에서는 어느 쪽이든 오답이다.
이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다음 순간 박우찬이 움직였다. 마치 방패를 밀어붙이듯, 어깨를 활용해 한 걸음 내딛는 박우찬. 거인에게 힘겨루기를 시도하는 듯한 그 모습에 남상원 또한 곤혹을 삼킬 수밖에 없었으나, 이윽고 사내 또한 제 팔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동시에, 박우찬은 힘을 뺐다.
탈력.
당연히, 거인과 힘을 겨룰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한 호흡, 당황하는 시점을 노려 파고들어도 한 걸음을 버는 게 고작. 그렇기에, 박우찬은 일찌감치 접어둔 힘겨루기에 매달리는 대신 이를 이용해 남상원의 반응을 유인했다.
이 또한 당연한 이야기.
박우찬은 영웅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냥꾼Hunter이다.
거인과의 힘겨루기 따위, 팔힘에 자신 있는 장사들한테 맡겨두면 그만.
예상 외의 솜씨에 당황한 남상원을 상대로 벌어들인 한 호흡. 이를 바탕으로 힘을 겨루는 척 달려들어 남상원의 공세를 흘려넘기고 빈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틈새를, 박우찬의 검이 찢어 갈랐다.
발검.
보조 손잡이를 붙든 왼팔을 칼집으로 삼아, 단박에 베어 올린다.
그러나, 남상원 또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대지로부터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칼날을, 상반신만 뒤로 젖혀 회피. 앞머리 몇 가닥만을 희생해, 박우찬의 기습을 정면에서 파훼한다.
애초에, 남상원이 머리가 나빠 멧돼지마냥 달려드는 게 아니다. 거인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상원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이유는 단 하나. 두터운 외피와 재생력을 살리는 이 전법이야말로 거인에게 있어 가장 효율적인 전술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공격은 이빨도 박히지 않는 거인의 내구력. 거기에, 만일 공격이 통했다 하더라도 머잖아 재생할 수 있는 회복력.
거기에, 단 일격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거인의 완력까지.
내줄 건 내주고, 취할 건 취한다.
거인의 힘을 사용한 이래, 남상원이 나름대로 정립한 본인만의 싸움법이었다.
허나.
다음 순간, 칼날이 핑그르 하고 돌았다.
힘차게 헛손질한 칼날을 제어하는 대신, 역으로 손을 놓은 박우찬 때문이다.
당연히, 검을 내버릴 생각은 아니다.
휘리릭,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회전하는 대검. 이를 솜씨 좋게 회전시킨 박우찬의 오른손이 다시금 손잡이를 쥐었다.
칼날의 방향은, 어느새 반대.
대지에서 하늘로, 그리고 지금은 하늘에서 땅으로.
마치 송곳니처럼, 회전한 대검이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대검은커녕 단검이라 해도 저리 손쉽게 다룰 수 있을까 싶은 테크닉에, 남상원은 혀를 차며 박우찬을 노리고 휘두르던 팔을 들어 이를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카가가가각!!
가죽과 대검의 격돌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지간한 칼날은 먹히지도 않는다는 거인의 가죽이, 대검의 착점을 빗겨 흘린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거리를 벌린 건 공격에 실패한 박우찬이 아닌 남상원 쪽이었다.
"뭐, 지?!"
대검에 의한 급조 연속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오한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큼, 거인의 보폭으로 거리를 벌리는 남상원의 앞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남상원의 후퇴와 동시, 공간 계통 능력이 담긴 도구를 사용해 창고와 접촉한 박우찬이 그 안에 든 약품을 내던진 것이다.
유리 시험관 안에 담긴 건, 순수한 원소.
불꽃과 서리, 그리고 벼락이다.
쿠르르르릉!!
해방된 자연의 힘이 남상원을 덮친다.
물론,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다. 예의 '사람 잡는 헌터'와의 싸움에서 즉석으로 독극물을 해독한 박우찬이 그리 말했던 것처럼, 이런 소비품은 어지간히 잘 사용하지 않는 한 상위 헌터들의 싸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때문에, 박우찬이 이를 사용한 이유는 총 두 가지.
하나는 단순한 눈속임을 위해서요, 다른 하나는 시험을 위해서다.
'불이나 얼음은 그렇다 쳐도, 번개까지 효과가 엷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거인 설화라 하면 역시 북유럽 신화를 꼽을 수 있겠지.
그리고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서리 거인, 요툰은 천둥과 벼락에 약하다.
어쩌면 북유럽 신화 출신의 거인에게서 받은 힘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저 모습을 보건대 아무래도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뭐, 준비한 건 그 뿐만이 아니지만.
철컥, 칼날을 뒤집는다. 동시에, 시선을 흘려 칼등을 확인한다.
거기에는 방금 전, 남상원의 팔을 할퀴고 지나간 수많은 못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몬스터를 상대할 때, 그 관절을 꿰어 봉하기 위한 연장.
허나, 이 전천후 만능 해체무장의 힘은 그 정도가 아니다.
마치 날개처럼 흐드러진 거대한 쇠못들은, 하나하나 제각기 다른 술식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박우찬의 마력을 주입하는 것으로, 대못들은 각기 다른 성질을 지닌 말뚝이 되어 상대의 육신을 씹어 부순다.
물론, 각기 다른 속성을 함유한다는 특성 상 결정타가 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럴 땐 도움이 되지.'
찰나, 남상원의 팔뚝과 격돌한 대못은 도합 64정.
요컨대, 그 한 번의 교환으로 도합 64회의 실험 데이터를 손에 넣었다는 말이나 진배없다.
불꽃이나 서리, 벼락이 담긴 못은 역시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창날이나 화살촉에 가까운 형태의 대못 또한 마찬가지. 개중에서도, 바위의 성질을 담은 못은 오히려 이 쪽에 새겨진 술식이 마비되었을 정도다.남상원에게 힘을 양도한 거인이 땅에 강한 일화를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조사해도 별다른 정보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거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상원이 발휘하고 있는 힘 또한 그렇지만, 흙이나 바위 등 땅의 성질을 지닌 요소를 상대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 거인이란 대개 스스로의 힘으로 협곡을 부수고 산을 만드는 등 손수 지형을 형성한 부류일 가능성이 컸다.
다시 말해, 현지 전설에 이름이 남은 거물.
혹은, 세상의 모습을 제 손으로 빚은 창세의 거인 등이다.
허면 저토록 강력한 힘과 내구력도 이해가 간다. 그리 생각하던 박우찬의 눈이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서른 세 번째 못.
성스러운 기운을 담은 나무, 신목??의 성질을 새긴 대못 끝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단 한 번, 대검을 털며 이 모든 사실을 검증한 박우찬은 그대로 빈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렇게 휘두른 왼손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길 잠시, 일그러진 공간 너머에 도사린 창고와 접촉한 박우찬의 손아귀가 네 번째 플라스크를 꺼내들었다.
찰랑이는 황금색 액체. 저 서른 세 번째 못에 주각된 기운의 상위 호환이라 할 수 있는, 성스러운 나무로부터 직접 추출한 수액이다.
쨍그랑!!
망설임 없이, 박우찬은 검면에 대고 이를 내려쳤다. 동시에, 자신의 능력을 한껏 운용해 그렇게 쳐바른 수액을 조작한다. 격렬하게 준동하는 그의 마력을 따라, 성스러운 수액이 검신을 따라 미끄러졌다.
말했다시피, 이런 소비품은 어지간히 잘 사용하지 않는 한 상위 헌터들의 싸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달리 말하자면, 적절히 사용할 경우 상위 헌터들 사이의 싸움에서도 결정타가 될 수 있다.
결국 어떤 거인인지는 역시 모르겠지만, 여하간 신목에 약하다는 건 알아냈다. 그렇다면, 이 수액은 남상원과의 싸움에 있어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주겠지. 성스러운 나무의 수액을 바른 칼날은 스치기만 해도 남상원의 거죽을 서걱서걱 썰어댈 수 있을 테고, 자랑의 재생력조차 이 수액 앞에선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 터.
혼혈과의 싸움은 실질 처음이다. 거기에, 상대인 남상원은 여타 혼혈들 중에서도 상당히 특별하다. 힘을 손에 넣은 경위 또한 그렇지만, 본인의 실력 또한 마찬가지다. 초기 혼인회를 덮친 과격파 헌터 중에 A+랭크가 있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실질적으로 S랭크 헌터에 준한다 봐도 되겠지.
그에 비해, 자신의 능력은 평소에 비해 기세가 나쁘다. 일반적인 헌터를 상대할 때보단 낫지만, 몬스터를 상대할 때만큼 미쳐 날뛰지는 않는다. 어중간하기 짝이 없는 그 느낌이 묘하게 불쾌해, 박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뭐,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리 생각하며, 박우찬은 다시 한 번 대검을 움켜쥐었다.
자, 분석은 끝났다. 전초전도 이걸로 끝이다.
그렇다면, 슬슬 끝장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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