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중간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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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전투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힘을 깨달은 초등학교 때도, 이예은과 투닥거린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힘이란 어디까지나 불결한 것. 일찍이 자신의 부친을 비롯한 대다수 남정네들을 유혹해, 난민들의 캠프를 장난삼아 무너뜨렸다는 창녀에게서 유래한 힘이다.
때문에, 지금 류지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단 하나 뿐이었다.
혼인회 사람들을, 가족들을 잃고 싶지 않다는 일념.
남상원 아저씨의 마음은, 알고 있다.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동시에 잃은 그 날, 눈 앞에 펼쳐진 참상을 앞두고무슨 서원을 했는지감히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나.
적어도 지희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허나, 그 날 이후 남상원은 마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순 없다.
나는 너무나도 오래 참았다.
그 어느 누구도 내게 이 이상의 인내를 요구할 수는 없다, 고.
그렇기에 이토록 불공정한 조건도 받아들인 거겠지.
하지만.
역시 류지희로서는 이를 납득할 수 없었다.
반면에, 남상원은 탁월한 싸움꾼이다.
세월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20년.공부밖에 모르던 범생이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주먹꾼이 되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류지희의 공격이 통한 건, 어디까지나 남상원이 류지희에게 공격받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
그조차도 뺨에 잔상처 하나 남기는 게 고작이었다.
남상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 뜬 눈동자. 그 표정에 류지희 또한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지만, 억지로 이를 다잡았다. 그리고 외쳤다.
아니, 외치려 했다.
반응할 수 있었던 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마력을 압축해 발사한 손가락을 잡아당기기도 전에, 목덜미로부터 오싹한 느낌이 달렸다. 반사적으로 끌어모은 몽마의 마력을 있는 그대로 때려 박는다. 질량을 가진 그림자처럼 부풀어 오른 마력이 마치 장벽처럼 지희의 앞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벽을 이루고 있던 마력이 통째로 증발했다.
상성은 좋았다. 남상원이 다루는 건 물리적인 능력에 치중된 거인의 힘. 그에 반해, 류지희는 몽마의 혼혈이다. 물리적인 간섭이 어렵다는 특성 상, 몽마는 거인 같은 부류에게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대다수 설화에서 거인은 유혹에 약한 법. 몽마의 능력을 고려하면, 상성도 이만한 상성이 없을 정도다.
그런 만큼, 둘 사이에 존재하는 건 보다 단순한 격차.
순수한 힘의 차이다.
단순한 앞차기였다. 단 한 걸음에 거리를 좁히는 거인의 보폭으로, 성큼 하고 다가간 남상원이 그대로 다리를 내질렀다. 그것만으로도, 거인을 상대할 때 거의 절대적인 유리함을 보장하는 몽마의 마력이 산산조각났다.
"컥……!"
마력 장벽을 돌파한 남상원의 발끝이 류지희의 복부에 꽂혔다. 마력에 의한 방어와 몽마의 특징, 양 쪽을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턱 하니 숨이 막힌다. 뱃속이 통째로 요동치는 듯한 감각. 동시에, 치미는 헛구역질을 지희는 억지로 억눌렀다.
동시에, 날개를 펼쳐 뒤로 날았다. 평소와 달리, 힘을 억누르지 않는 지희의 능력은 거의 B랭크 헌터에 준한다. 혼혈로서 겪은 평지풍파 때문이다.
허나, 그런 지희라 해도 자신이 남상원과 정면에서 치고받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물리적인 내성이 있다는 이유로, 몽마가 거인에게 힘겨루기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방금 전의 일격을 허용하곤 생각이 달라졌다.
이길 수 없는 수준이 아니다.
'잡히면 죽는다……!'
그에 비해, 남상원은 실로 침착했다.
물론 지희가 자신을 공격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니 오죽할까. 마음 같아선 다시 한 번 지희를 설득하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당장엔 시간이 없었다.
당황하는 것도, 슬픔을 나누는 일도 나중에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최대한 빨리 책무를 다하자.
남상원과 류지희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싸움을 시작하고도 허둥대던 류지희와 달리, 남상원은 자신을 적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서 일단 제압해두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펄럭이는 악마의 날개를 향해 우악스레 손을 뻗는다. 몽마 특유의 어슴푸레한 날개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걸 억지로 틀어쥐며, 남상원은 그대로 지희를 내던졌다.
"이익!"
앓는 소리를 내면서 벽에 부딪히기 전, 날개를 휘저어 움직임에 간신히 제동을 거는 지희.
그런 그녀의 얼굴을 향해 거인이 주먹을 휘둘렀다.
팔을 들어 막은 건, 충분한 사고를 거친 끝에 나온 행동이 아니다. 눈 앞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가면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는 것처럼, 지희는 날아드는 주먹을 향해 양 팔을 올렸다.
얼굴을 방어했다기보다는, 팔을 헌납했다는 쪽이 어울리는 동작이었다.
우두둑!! 몽마의 육체조차 견디지 못할 부하에, 섬뜩한 소리가 팔 안에서 울려퍼졌다. 허나,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채 위력을 죽이지 못한 주먹이 가드 채로 그녀의 몸을 벽에 쳐박아버렸기 때문이다.
"으헉……!"
등을 부딪힌 탓에 멋대로 호흡이 튀었다. 온 몸이 저릿저릿한 게, 손발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고작해야 두어 번 부딪혔을 뿐인데, 벌써부터 꺾이려는 마음을 억지로 질타했다.
당연하지만, 각오를 다진다고 해서 상대가 손속을 늦춰주는 건 아니다.
한 번 더 거리를 좁힌 남상원의 주먹이 쇄도한다. 만일 몽마가 아니라면 단번에 전신이 으스러질 법한 일격을 휘두르며, 남상원이 그 시선을 지희에게 맞췄다.
지금은 자 두렴,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란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그 눈동자를 향해, 지희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상원의 주먹이 덜컥 하고 허공에 멈췄다.
"이건……!"
"허억, 허억!"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는 지희의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으로 반짝였다.
마안.
소위 말하는 사시Evil Eye. 시선을 맞추는 것으로 특수한 효력을 발휘하는 안력의 일종이다.
개중에서도, 지희가 발휘한 건 매료의 눈동자. 몽마를 비롯, 수많은 몬스터들이 공유하는 가장 전형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혼혈인 지희의 마안은 그 정도로 강력하지 않다. 하지만, 상대는 거인. 유혹에 약하다는 그 특성 상, 잠깐동안 움직임을 멈추기에는 차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아아아압!!"
그대로 남상원의 멱살을 붙잡은 지희가 기합성을 터트렸다. 상대의 신장도, 상황도 다르다. 하지만, 날개를 뒤틀며 남상원의 몸을 바닥에 내려치는 그 모습은 일찍이 연습 시합에서 이예은을 내던진 기술과 같았다.
도축업자, 박우찬에게서 배운 업어치기.
단순한 힘겨루기라면 모를까, 빈틈을 노린다면 이 정도는……!
콰앙!!
남상원의 몸이 제대로 바닥에 쳐박혔다. 거인인 남상원조차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는 위력이었다.
이게 바로 지희가 준비한 비장의 수.
거인을 상대로 체술을 시도할 리 없다는, 의식의 사각을 찌르기 위한 비수. 얼마 전, 박우찬이 조언했던 바와 같이 몽마의 능력과 지희 본인의 체술을 살린 복합기였다.
거인이라 해도 그 구조는 인간과 같다. 하물며, 그 힘만을 다루는 남상원이라면 더더욱. 상성도 좋고, 빈틈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렇게 한 수를 되갚아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장면은 처음 박우찬에게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은 이래 류지희가 끊임없이 궁리해 이끌어낸 승리의 도상이었다.
"어, 어때요?! 아저씨도 머리 좀 식히고 계세요. 나한테도 못 이기는데, 도축업자한테는 어떻게 이길 생각이신가요?!"
"확실히, 허투루 배운 건 아닌 것 같구나."
그러므로.
바닥에 쳐박힌 남상원이 태연한 목소리로 그리 대답했을 때, 류지희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전력 산정에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니다. 류지희의 공격은 깔끔하게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상원 본인조차 전혀 저항하지 못했을 정도다.
실로 아찔한 일격.
허면, 지금 이 순간 남상원을 움직이고 있는 건 무엇인가.
의욕? 사명감?
공교롭게도, 정신론으로 뒤집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책략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 순간 승패를 가른 건 단 하나.
지희가 알지 못했던 거인의 특성이다.
거인의 특징이라 하면 보통 육체 강화 계통 헌터를 상회하는 신체 능력과 질량. 그리고 그 이상으로 칼날도 들지 않는다 전해지는 가죽을 들겠지.
그러나, 거인에게 있어 그 이상으로 강렬한 특징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대다수 헌터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재생력.
단순한 근력이나 보폭에서 오는 속도는 물론이요, 내구력과 회복력까지.
물리적인 범주에 있어, 거인이 용조차 상회한다 일컬어지는 이유다.
공교롭게도, 지희는 이를 알지 못했다. 다름이 아니라,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상원이 상처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일이 그 지경에 이르자, 류지희 또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남상원이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강렬한 충격이 류지희의 전신을 덮쳤다. 거인이 으레 그렇듯이, 남상원의 행동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파괴이자 공격이었다.
단박에 천장까지 튕겨져나간 류지희가 한 순간의식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날갯짓을 시도하긴 했으나,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런 류지희를 향해, 남상원은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방금 전, 남상원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힘없이 날아간 류지희로선 제대로 반격할 수도 없었다.
"욱……."
짧은 신음성과 함께, 다리가 풀린 류지희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동시에, 치미는 욕지기. 자신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곤,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흘리고 만다.
이에 반해, 남상원은 방금 전 지희의 명치를 가격한 주먹을 끌어당기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결과만 보면 압승.
하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한 수.
단 한 수만 부족했다면, 지금 나뒹굴고 있는 건 지희가 아닌 남상원 자신이었겠지.
그 사실에 모종의 대견함을 느끼며, 남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희에겐 보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그 이상 무어라 첨언하는 대신 그는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훌륭하다. 대단하구나. 아저씨도 놀랐다…….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기에, 류지희가 볼 수 있었던 건 시야 너머로 사라지는 남상원의 발뒤꿈치뿐이었다.
'안 돼.'
턱끝까지 차오른 호흡에,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손을 뻗었지만, 등을 돌린 남상원에겐 보이지 않으리라.
3분.
그렇게나 열심히 준비했건만, 그녀가 벌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해야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눈 앞이 핑 하고 돌았다. 온 몸에 오한이 달리며, 귓가에 이명이 달리기 시작했다. 의식이 아찔해지는 게 시시각각 느껴질 정도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외치고 싶었다. 누군가 듣고 있는 이가 있다면 부탁하고 싶었다.
'제발 저 사람을 말려 주세요. 가족 하나 없던 제게 가족이 되어 준 사람들이에요. 부탁드려요, 뭐든지 할게요. 정말로 죽는단 말이에요.'
대답은 없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혼인회를 부려먹을 생각만 가득한 정치인은 물론이요, 누구 하나 혼혈들의 사정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토록 열심히 준비한 게 아닌가.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는 형편 좋은 일이 있을 리 없다고. 혼혈, 하물며 더러운 몽마의 딸에게는 그런 결말이 어울린다고 말이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까지 그녀의 부름에 응해 나타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달라붙는 얼음을 처리하는 데에 2분. 도처에 널린 기자들을 피해 잠입하는 데에 5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상대하는 데에 3분.
도합 10분 경과.
"이런."
자박, 자박.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경박한 발소리에, 남상원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손아귀에는 우악스러운 거검. 전신에는 단출한 정장.
한없이 가벼운 태도로 바닥을 차면서,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거 참, 화려하게도 했네."
박우찬.
도축업자.
몬스터와 혼혈을 가리지 않고 찢어 죽이는 살인마가, 하필이면 가장 바라지 않았던 순간 그 자리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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