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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44화 (44/371)

〈 44화 〉 혼혈

* * *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참 획기적인 자살 방법도 다 있구나 하는 감상이었다.

허나,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창문 밖에서 테러리스트가 난입하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때문에, 곧장 그녀의 모가지를 꺾어버릴 생각이었던 나 또한 간신히 손을 늦출 수 있었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아무래도 면전에서 선전포고를 던질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휴, 무심코 죽여버렸으면 큰일 날 뻔했네~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글쎄, 적당히?"

실제로, 지희는 태연하게 그리 되물었다. 방금 전,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듯했다.

이런 이런, 결국 애라는 건가.선생님은 그런 지희가 걱정이에요~

"허면 처음부터 설명할까요. 저희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 한국 지부에는 현재 두 파벌이 공존하고 있답니다. 요컨대, 온건파와 과격파라고 할 수 있겠죠."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 아니냐?"

세상에 온건파랑 과격파 없는 집단이 어디 있어.

여하간, 이 아카데미에도 그 정도 파벌은 있다. 차근차근 헌터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우선적으로 가르치자는 내가 온건파라면, 일단 몬스터를 죽이는 방법부터 가르치자는 다른 선생들은 과격파라고 할 수 있겠지.

저런 걸 정보라고 넘기다니. 그리 투덜대는 내 목소리를 흘려넘기며, 지희는 방금 전 선전포고 비슷한 말에 추가로 부연했다.

"물론, 이번 습격을 계획한 건 과격파 쪽이구요."

"그래.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애초에 아카데미의 방위 체계는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니다. 국가와 협회, 두 세력이 손을 잡고 출범시킨 프로젝트니까.

저번 실습 당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던 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나빴을 뿐. 오히려, 아카데미의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던 적들이 그런 기책을 사용해야 했던 시점에서 방위 시스템의 우수함은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최근 사태를 핑계로 추가 확충한 시설까지.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라면 설령 S랭크 몬스터가 상대라 해도 나나 최승준이 출격할 시간은 벌어줄 수 있겠지.

심지어 요즘은 그 최승준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판국이니, 어지간한 녀석들은 채 2초도 걸리지 않아 무력화될 게 뻔했다.

"어머, 선생님께서도 미숙하신 부분이 있군요."

"응?"

"잘 들으세요. 그런 걸 계산하면서 달려들면 과격파가 아니랍니다."

"아하."

허나, 뒤이은 지희의 말엔 아무리 나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네. 하긴, 승산 하나 고려하지 않고 꼬라박겠다는데 뭐 어쩔 수 있나.

나 원 참, 이래서 과격파는 곤란하다니까.

"게다가, 우두머리 쪽은 그렇게 상대하기도 힘들 걸요?"

"리더?"

"어머, 모르세요?"

그럼 알고 있겠냐?

애시당초 내가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라는 이름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리스의 켄타우로스가 혼혈인지 몬스터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때 홈페이지에 관련 질문을 올린 적도 있었는데, 악의적인 분란 조장이라는 이유로 영구 차단당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새록새록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란 말이지~

뭐, 그렇다 쳐도.

"힘깨나 쓰는 양반이겠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비 인가 단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불법 집회와 다를 게 없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현실적인 사정이 있었다. 딱히 그들이 법에 저촉되는 일을 저지른 건 아니다. 하지만, 정부로서는 그들을 간과할 수도 없었다.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시대다. 혼혈이 모이기 쉽다는 특성 상, 이를 섣불리 인정했다간 국가 내에 또 다른 무력 집단이 생기는 걸 좌시하는 꼴이 될 테니까.

국가로서는 실로 당연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이런 태도는 오해를 사기 딱 좋다는 점이다.

이걸 봐라, 국가는 여전히 우리들의 권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녀석들이 보통 과격파가 된다.

"남상원. 과격파들의 우두머리고, 조금 특이한 케이스에요."

내 말에 지희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남상원 씨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확실히, 특이하다는 말이 겉치레는 아니었다.

과격파 거두 남상원, 올해로 44세.

요컨대, 물리적으로 혼혈일 수가 없는 나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소 특이한 혼혈 취급을 받고 있는 건 바로 그가 손에 넣은 기연 때문이었다.

제 1차 대침공.

몬스터들의 습격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던 사내는,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당시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던 남상원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주저할 정도로.

그렇게, 사내는 거리에 버려지듯 방치되어 있던 여자를 데려와 돌보기 시작했다.

없는 살림이었으나, 둘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싹트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허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저씨가 그러더군요. 자신이 그 날 만났던 여자는, 사실 거인이었다고."

어느 날, 여자가 자신의 정체를 고백한 것이다.

……혼혈 대다수가 건전하지 못한 이유로 태어나는 이 시대에, 남상원은 드물게도 그런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영 못 미덥다는 어투였지만,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하간, 거인이라고 해서 다들 멀대같이 크기만 한 건 아니니까. 오히려 북유럽을 비롯해, 거인 설화가 존재하는 대부분 지역에서 여성 거인은 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작거나 인간 이상으로 아름다운 경우가 흔했고.

"문제는 그 뒤, 아저씨가 머무르던 군락에 다시 한 번 몬스터들이 쳐들어왔다는 거죠."

아직 국가가 몬스터에 대해 주도권을 회복하지 못했던 시대.

몰리고 몰려 땅끝까지 도망친 사람들을 향해, 몬스터는 그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기긴 이겼다더군요."

지희의 말에는 많은 함축이 담겨 있었다.

이기긴 이겼다.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헌터가 나타나 몬스터를 쓸어버린 게 아니라면, 어떻게 된 일인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만일 그 뿐이었더라면, 비교적 드문 대침공 시기의 미담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당연히, 아저씨는 쫓겨났고요."

그런 미담엔 후일담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몬스터란 어디까지나 공포의 대상. 설령 자신들을 구해주었다 한들 이제 와서 교류를 나눌 대상은 아니었다.

때문에, 스스로의 안위와 맞바꿔 사람들을 지킨 부부는 그들이 보호한 사람들에게 역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다 여자 쪽이 죽었겠네."

처음부터 부상이 심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일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알고 계셨나요?"

"아니."

그렇게, 여자의 힘은 남자에게 계승되었다.

딱히 드문 이야기도 아니다. 용의 심장을 삼키고 인간 이상의 힘과 지혜를 손에 넣었다는 북유럽 신화 속 영웅이나, 죽어가던 거인 기사에게 힘을 받은 러시아 서사시 속 제일기사의 이야기처럼 쓰러뜨린 괴물의 힘을 손에 넣었다는 전설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 전해지고 있으니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운 끝에, 사람들에게 버려진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는 거인의 힘을 손에 넣었다.

혼혈 비스므리한 과격파가 탄생하기엔 딱 적절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거인이라 힘도 강하고, 경험도 풍부해요. 정면으로 싸운다면 모를까, 원거리에서 발만 묶는 건 힘들 걸요?"

"뭐, 그렇겠지."

이야기가 끝난 뒤, 잠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지희는 짐짓 쾌활한 어조로 그리 말했다.

확실히, 거인의 특징이라 하면 육체 강화 계통 헌터를 상회하는 신체 능력과 질량. 그리고 그 이상으로 칼날도 들지 않는다 일컬어지는 두터운 가죽이다.

정면에서 1대 1로 싸운다면 모를까, 원거리에서 깔짝대는 정도론 날도 박히지 않겠지.

하물며, 제 1차 대침공 당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베테랑.

몬스터 토벌이라면 모를까, 단순한 경험이라면 나조차 상대가 못 될 거다.

그렇기에.

"아니, 그래서 그렇게 대단한 양반이 왜 쳐들어오신대냐?"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게 궁금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그거랑 아카데미 습격이 무슨 상관이지?

아카데미에서 혼혈 차별 교육이라도 진행하고 있다면 또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고.

나로서는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지만, 아무래도 지희에게는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와락 일그러지는 얼굴. 내 질문에 화가 났다기보단, 달리 불쾌한 일을 떠올린 듯한 모양새였다.

"선생님과 싸웠다는 그 헌터 때문이랍니다."

"엥?"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도 그 쪽과 연이 없는 건 아니라서요."

"즉?"

"그가 흘린 정보로 우리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게 하나."

"그리고 하청받은 게 둘?"

너무나도 노골적인 내 표현에 아찔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곧 지희 또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래요."

요컨대, 그런 이야기다.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의 제 1 목표는 어디까지나 혼혈들의 인권 신장.

저들과 손을 잡은 이유 또한 십중팔구 그 때문이었겠지. 실제로, 아카데미에 손을 뻗거나 입학 서류에 손을 대는 등 저들의 힘은 실로 대단했으니까.

어쩌면,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에게 있어 저들과의 협력은 마침내 양지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저들에게 있어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는 단순한 버림말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설마 반학기도 안 돼서 아카데미에 몬스터를 풀어놓거나 학생들을 납치할 거라곤 과연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라 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저들이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를 배려했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인정받기는커녕 납치범과 손을 잡은 테러리스트라 낙인찍히게 생겼으니.

게다가, 하필이면 아카데미라니?

말로는 인간 취급을 바란다면서, 실제로는 예비 헌터를 납치하고 헌터 육성 기관에 테러를 저지른 혼혈들에게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겠는가.

테러리스트 취급이면 차라리 다행이지, 보나 마나 몬스터 취급할 게 뻔했다.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로선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걸 빌미로 삼으시겠다?'

이를 이용해, 저들은 손 하나 대지 않고 코를 풀 생각인 것이다.

목표는 예의 헌터의 신병.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이상으로 녀석이 알고 있는 정보가 문제다.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에게도 그렇게 말했을 테고.

본질적으론, 말 그대로 하청이다.

탈환에 성공한다면 그걸로 좋고, 설령 실패하더라도이미지가 상하는 건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 뿐.

지나치게 불공평한 조건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회 밑바닥까지 추락할 상황인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로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네?"

"뭘 원하는 거지?"

거기까진 알겠다.

온건파라는 양반들이 이를 빌미로 삼아 아카데미 측에 미리 줄을 대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여하간, 성공 확률이 높은 일은 아니니까. 어쩌면 이번 기회를 틈타 과격파를 제거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국 온건파는 뭘 하고 싶은 걸까?

과격파처럼 절망적인 국면을 타개하려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에게 전면적으로 협력할 생각도 없어 보이니.

"글쎄요? 저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치고받는 거."

물론, 지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고.

정말로 중요한 건 이거다.

'믿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자문을 던진다.

허나, 대답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랐다.

믿어도 손해는 없다.

여하간, 지희가 우리에게 딱히 피해를 준 적도 없고. 있다고 해 봐야 아카데미 내의 사정을 들어다 바친 정도겠지만, 그조차 일개 학생 입장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카데미의 방위 체계나 도면 따위를 입수해 악마를 던져놓은 미친 놈들이 상대라는 걸 고려하면, 고작해야 입학생들에 대한 소문이나 전하는 게 고작이었겠지.

무엇보다, 딱히 대비한다 해서 손해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면 귀찮을 수는 있겠다만.

"일단 염두에는 두마."

"……어머, 의외로 친절하시네요?솔직히 말해, 별로 기대하진 않았는데."

"또 어디서 이상한 이야기를 주워들어선. 야, 나만큼 착한 사람도 없어."

"그런 사람한테 도축업자같은 흉흉한 이름이 붙을 것 같진 않은걸요?"

아니, 그건 몬스터가 문제고.

굳이 말하자면, 내게 있어 몬스터란 바퀴벌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도 혐오스럽겠지만, 바퀴벌레 알레르기가 있는 내겐 더더욱 그렇다.

혼혈 또한 마찬가지다. 바퀴벌레 알레르기가 있는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하지만, 바퀴벌레를 사랑한 누군가가 바퀴벌레와 교미해 태어난 반인반퀴. 내가 보기엔 딱 그 정도다.

뭐, 내가 보기엔 역겹더라도 세상 모든 애완 바퀴벌레를 멋대로 쳐죽이고 다닐 순 없는 법. 거기까지 가면 단순한 미친놈이다. 그보다 민폐고.

때문에, 내게 있어 혼혈이란 바퀴벌레 데미글라스 소스로 목욕하는 정신병자에 가깝다. 직접 닿으면 무심코 죽여버리고 싶은 느낌?

살의라는 건 극단적인 감정이니까, 문자 그대로 반감Half된 수준이라면 충동적으로 죽여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정도다.

실제로 지금도 방독면 하나 없이 지희랑 대화하고 있지 않은가?

"됐고, 더 할 말 없으면 작파하자."

아무리 그래도 이 이상 시간을 끌면 하연이도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그리 말하자, 지희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대답은 제 때 건네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한 직후 교실 문을 열고 나간 그녀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메아리쳤기 때문이다.

"예은아, 나 상담 끝나써~!! 오래 기다렸다고 삐진 거 아니지, 응?"

적어도 이런 상황을 단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는 나와 달리,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퍽 익숙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순식간에 뒤집히는 목소리. 발랄하게 뛰어가는 뒷모습 너머로 울려퍼지는 코맹맹이 소리를 들으며, 나로서는 그리 뇌까릴 수밖에 없었다.

"씨발, 여고생 개쩔어……."

괜히 서브컬처 최강의 종족이 아니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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