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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43화 (43/371)

〈 43화 〉 혼혈

* * *

마지막으로, 혹시 몰라 원장에게 호위를 붙이고 돌아온 다음 날.

아카데미는 중간고사 기간에 접어들었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해도, 여태까지와 크게 다르진 않다. 요컨대, 다른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시험은 하루. 학생부 평가를 위해 국영수 위주로 예습 복습을 반복하는 우등생들이 있는가 하면, 헌터 좋다는 게 뭐냐 몬스터만 잘 죽이면 그만이지 하고 포기한 녀석들도 더러 보였다.

물론, 아카데미라 해도 필기 성적을 평가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교양 있는 사람과 교양 없는 사람 중 누구나 전자를 택할 테니까.

그러나, 아카데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헌터 교육 기관.

학생과 교사를 불문하고, 가장 주목을 받는 건 당연히 헌터 과목 시험일 수밖에 없다.

뭐, 예정과 달리 실습이 중단된 만큼 시험 내용도 상당히 바뀌겠지만.

본래는 실습과 동일한 조건 하에 게이트의 터주를 상대하는 것이었던가?

어느 쪽이든, 게이트를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은 다른 방책을 궁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중간고사를 앞두고, 나 또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슬슬 개인 상담에도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학업, 누군가에게는 집안 문제. 여러 사정 탓에 십인십색 다양한 상담이 되어버린 기분도 들지만, 이예은처럼 중간고사 성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만한 경우도 있다. 적어도 시험 전까진 마무리하는 게 좋겠지.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개인 상담에서, 나는 때 아닌 곤혹을 삼키고 있었다.

모든 수업이 끝난 교실. 상담을 이유로 하연이까지 먼저 내보낸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토록 비현실적이었다.

주홍빛 노을이 창가를 통해 긴 발을 뻗는다. 하루의 태반을 보내는 장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렌지빛으로 젖은 교실의 풍경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간질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대를 잘라 이어붙인 듯한 풍경 한가운데에, 그녀가 있었다.

류지희.

솔직히 말해, 인상에 남는 학생은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엔 이예은과 실력을 겨루던 예비 헌터였으나,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진 사실상 전패. 동시에, 입학 직후의 대련에서 내 조언을 듣고 이예은에게 패배를 안겨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나와 그녀 사이에 진행된 내기, 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하나하나 나열하고 보면 이예은과는 불구대천의 라이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허나, 그녀는 오히려 중학생 시절부터 이예은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패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이 큰 역할을 했겠지. 특유의 경박함과 억척스러움. 때문에, 내가 그녀를 보고 느낀 첫인상은 마치 한 마리 토끼와 같았다.가벼운 발걸음으로 타인의 영역에 발을 들이면서도, 무례하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유들유들한 태도. 말하자면, 그녀는 우리 반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허나.

새하얀 다리를 아낌없이 드러낸 채, 고혹적인 태도로 책상에 걸터앉은 저 모습을 보고 감히 누가 류지희라는 이름을 단박에 떠올릴 수 있을까.

지독히도 낯선 장면이었다. 시월에 내린 첫눈처럼 창백하게 빛나던 백은색 머리카락이, 수줍게 달아오른 토끼를 연상케 하던 비취색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색으로 반짝인다. 출석을 부를 때마다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던 평소와는 달리,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묘한 장난기가 깃들어있는 듯했다.

그녀가 저토록 독특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바로 지금 이 교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한 쌍의 날개 때문이었다.

지희의 어깨 근처에 뿌리내린…… 아니, 날갯죽지로부터 돋아난 검은 날개. 언젠가 보았던 적 있는 악마의 피막을 연상케 하는 저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보시다시피, 저는 하프라서요."

우아한 태도로, 지희는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그리 선언했다.

마치 이 쪽이 어떻게 반응할까 기대하는 듯한 그 언동에서 묘한 익숙함을 느낀 나는, 결국 천천히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뭐, 라고……?!"

……흐뭇하게 미소짓는 모습을 보건대,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저렇게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으니, 사실 알고 있었다고 면전에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

물론, 지희가 만난 지 이제 막 두어 달 되는 담임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털어놓으며 상담을 요청한 건 아니었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최근, '사람 잡는 헌터'랑 싸우셨다고 들어서 말이죠."

지희는 한 집단의 대표로서 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

그게 바로 그녀가 속한 단체였다.

확실히 들어본 적은 있었다. 어물어물 되짚어 보니, 예의 고아원을 후원하고 있던 양반들 중 하나였던 기분도 든다.

"저희들로선 벌써부터 아카데미와 충돌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요컨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그녀를 평소처럼 푼수끼 가득한 학생이라 생각해선 안 된다. 그녀는 이예은의 절친한 친구도, 우리 반의 분위기 메이커도 아니다.

저 쪽 세력을 대표해 나와 접촉한, 대변인이며 파발꾼인 것이다.

여기서 참인지 거짓인지 따지고 드는 것만큼 무의미한 행동도 없겠지. 애초에, 일개 여고생이 알 수 있을 만한 내용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나 또한 저들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저희들, 인가?'

다소 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카데미에 손을 뻗다 못해 이미 끄나풀을 심어 둔 저들의 솜씨에는 나 또한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지만.

허나,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대답에 배어든 거리감. 숫제 이번 습격은 자신과 상관 없다는 투였다.

'오히려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아니,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상황 또한 이상하긴 매한가지다. 나와 접촉하기 쉽다는 점을 고려한 인선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에 얼굴을 내밀긴 너무 어리지 않나?막말로, 고작해야 열일곱 살 난 계집애를 상대로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애초에, 싸움을 건 건 그 쪽 아닌가?"

때문에, 한 번 떠보기로 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본의는 아니었다는 식으로 말해 봐야, 피해자는 이 쪽. 나로서는 날아든 불씨를 털어냈을 뿐이다.

'그보다, 몬스터를 보내라고 몬스터를.'

갑자기 헌터 따위를 보내니까 이 사단이 난 거 아냐.

만일 저들이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몬스터를 보냈다면 나 또한 평화롭고 행복한 도살에 빠져 희희낙락하고 있었을 테고, 시간이 남아 조사에 매진하는 일 따윈 없었겠지. 허면 저들 또한 꼬리를 밟히는 일 따위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끝날 수 있었던 이야기에 재를 뿌린 건 다름 아닌 저들이다…….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아니랍니다. 단지, 이번 충돌에 당황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그 정도만 염두에 두셨으면 해서요."

그 말에, 나 또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방금 전 그녀가 말한 '저희들'이란 표현은, 어디까지나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를 고려해 보면, 그녀 내지는 그녀를 내세운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가 전하고 싶은 바는 다음과 같겠지.

저번에 이 쪽과 손을 잡은 모 헌터를 상대로 교전했다 들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의 뜻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당신과 접촉을 꾀한 것이다…….

은연중에 내분을 암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건대, 어쩌면 저 쪽에게도 알리지 않은 단독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지금 품고 있는 의문 대다수도 해소할 수 있다.

벌써부터 아카데미에 잠입한 학생이라는 패를 드러낸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고작해야 열일곱 살인 계집애에게 한 집단의 얼굴마담을 맡긴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상대가 예의 집단이 아닌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라고 가정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도리어 극진한 대우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지.

여하간,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에 속한 열 일곱 살 혼혈아라면 십중팔구 최고 간부 중 한 명일 테니.

그런 집단이다.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

말 그대로, 혼혈들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한 범국가적 연합이다. 그런 만큼, 당연히 이 나라에도 지부를 두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허면, 혼혈이란 무엇인가?

공교롭게도, 메스티소 등을 칭하는 건 아니다. 제 1차 대침공 이래, 혼혈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다른 뜻으로 대체되어버렸으니까.

요컨대, 이 시대에서 말하는 혼혈이란 즉 인간과 몬스터의 교배종을 뜻했다.

경위는 다양하다. 여자를 덮친 몬스터, 혹은 그리스 쪽처럼 남자를 종마로 사용한 몬스터의 씨를 받아 태어난 아이들. 신화 속 존재들마냥, 생물학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무시하는 반인반마. 그게 혼혈의 정체다.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는 이렇게 탄생한 혼혈들을 몬스터의 일종이라 여기는 대신, 인류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진취적인 사고이긴 했지만, 대중들의 지지를 받진 못했다. 극히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영 온건찮은 이유로 태어난 혼혈들이 대부분인 판국에, 이들을 긍정한다는 건 몬스터에게 짓밟힌 피해자들에게 이해나 관용을 강제하는 게 아닐까 하는 풍조가 있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사용하는 힘이다.

일반인들과 달리, 몬스터와 비슷한 신체 구조를 지니고 태어나는 혼혈들은 처음부터 체내에 마력 운용 기관을 품고 있다. 말하자면 선천적인 헌터라고 할 수 있겠다.

마력을 운용하는 생물체란 생물체는 모조리 싸잡아 헌터라고 부른다면 말이다.

여하간, 그들이 마력을 다루는 방법은 헌터보단 차라리 몬스터에 가까웠으니까.

마력의 영향을 받아 잠재된 힘을 개화하는 헌터와 달리, 몬스터들은 선천적으로 자신들만의 생태와 능력을 지닌다.

문제는, 혼혈들의 마력 운용법이 전자보단 명백히 후자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지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학 서류에 기입된 그녀의 능력은 그림자 조작. 허나, 방금 전 펼친 날개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실체는 필시 그림자를 조작할 수 있는 악마와의 혼혈인 거겠지.

이처럼, 혼혈이란 대침공을 기점으로 발생한 우리 사회의 씻을 수 없는 상흔임과 동시에 언제든지 이를 상기시킬 '아픈 손가락'으로 자리잡았다.

지희를 비롯한 혼혈들이 기를 쓰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이었다.제 1차 대침공, 다시 말해 인류와 몬스터의 첫 접촉이 고작해야 20년 전 일이다. 다시 말해, 사회의 최전선엔 아직도 그 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다 못해, 그들을 태반으로 사용하는 몬스터들을 보며 사람들이어떤 감정을 품었을까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들에게 있어 혼혈이란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가 아닌 몬스터가 낳은 자식…… 권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17세 혼혈아라면 사실상 한국 지부 최고참일 공산이 컸다. 물론 이런 집단이 으레 그렇듯이 조직 중추엔 혼혈들의 인권을 위해 찾아온 인권 운동가나 혼혈들의 부모 또한 이름을 올리고 있겠지만, 그렇다 해서 거의 최고참에 가까운 나이인 혼혈아가 입김이 약할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고.

허면.

그만한 최고참을 파견해 나와 접촉한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는, 예의 집단과 정확히 어떤 관계일까?

단순한 협력 관계? 적어도 상하 관계는 아니겠지. 다소 느슨한 모습이 눈에 띄는 걸 보면, 어쩌면 단순히 특정 목적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들 사이의 이합집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번에 저희 측에서 선생님과 접촉한 이유는 단 하나. 조언을 위해서랍니다."

"조언?"

내가 그런 생각을 곱씹는 사이, 지희는 그렇게 말했다.

조언이라니, 다소 건방진 표현이다.

허나, 이에 답하는 대신 지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어디까지나 사과를 위해 찾아온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반응 하나 개의치 않는 그 모습에 묘한 불길함이 엄습했다.

"머지 않아, 어떤 집단이 중간고사를 틈타 대대적으로 아카데미를 습격할 거에요."

그리고 이런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는 법이 없다.

과연 나 또한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숨기지 못했다.

"……대담한 발언이구나."

"대담한 계획이기도 하죠."

"도대체 어디서?"

탄식처럼 흘러나온 내 물음에, 지희는 작게 어깨를 좁혔다.

"혼혈 인권 신장 위원회랍니다."

"뭐?"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허나, 여전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알기 힘든 얼굴로 지희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저희 조직에서 아카데미를 습격할 거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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