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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41화 (41/371)

〈 41화 〉 도수공권

* * *

"어우, 썅."

싸움이 끝났다.

이에 맞추어 가볍게 몸을 풀고 있자니, 온 몸이 삐걱대는 게 느껴진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상대는 몬스터가 아닌 헌터. 그것도 A랭크에 준하는 놈이었으니까.

비록 이 쪽이 우선권을 잡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는 하나, 평소 내가 A랭크 몬스터를 도륙하던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격차다.

물론 헌터와 몬스터의 랭크가 무조건 1대 1로 대응한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싸우는 모습으로 짐작컨대 저 쪽은 필시 사람 잡는 헌터…… 소위 말하는 대인전 훈련을 받은 전문 요원일 게 뻔했다.

이를 포함해, 체감 난이도는 A랭크 상위. 하물며 저 쪽은 열대 우림을 무대로 기습 한 번 가하지 않았다. 목적은 대강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를 감안해도 뛰어난 전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저 쪽의 수를 막고, 이 쪽의 스펙으로 누른다. 숨겨둔 비장의 수와 상성도 좋은 상황에서 부상을 남기고 승리. 딱 할 만큼 했다는 느낌이다.

"윤하야, 괜찮냐?"

"개아나여……."

"이런, 마비독이네. 기다려 봐."

자기 채점을 마치며 윤하를 향해 다가가자, 윤하는 어눌한 발음으로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오감에 작용하는 마비독인 모양이다. 윤하의 팔다리를 결박한 밧줄을 잘라내며, 이번엔 이 쪽의 도구를 사용해 공간을 열어젖혔다. 평소처럼 하나하나 해독제를 조제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자, 쭉 들이키렴. 쭉."

"으븝, 으베베베."

"유럽 애들이 만든 해독제야. 어지간한 독이라면 이걸로 충분할 테니까, 입 안에 머금고 있다 삼키렴. 포도맛이니까 맛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내 말을 듣고 어설프게 따라 한 윤하의 볼이빵빵하게 부풀었다. 허나, 그로부터 머지않아 윤하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돼, 됐다!"

"그래, 된다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굳어있던 혓바닥이 돌아온 걸 보면, 아무래도 효과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그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만약을 대비해 윤하가 먹다 남긴 해독제를 옆구리에 콸콸콸 쏟아붓자, 마침 윤하의 돌아온 시선도 칼자국이 남은 환부를 향했다.

"서, 선생님. 그거……."

"어? 어어. 좀 치더라, 그 새끼."

낄낄거리며 그리 말하자, 윤하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고작 칼침 한 대 맞은 걸로 뭘 그리 호들갑이냐 싶은 기분도 잠시, 생각해 보면 아직 얘들은 실전 한 번 뛰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떡해, 저 때문에. 선생님, 죄송해요. 이거, 이걸 어떻게……."

"야, 야. 울지 마. 뚝! 선생님 더 아프다. 아니, 이거 별 것도 아니야!"

가만히 내버려 두면 패닉이라도 올 듯한 모습에 허겁지겁 창고 안에 쌓여 있던 포션 중 하나를 닥치는 대로 집어 환부에 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 사용한 건 사용자의 마력을 소비해 상처를 회복시키는 부류였다. 쓸데없는 부작용이 없는 건 좋지만, 갑자기 찾아온 현기증에 눈 앞이 뿌옇게 달아올랐다. 마력 고갈의 징조였다.

하긴, 이래저래 치고받느라 무리하긴 했지. 쓸데없이 낭비한 마력이 이제 와서 아깝게 느껴졌다. 사람을 상대로 할 땐 도대체 얼마나 마력을 써야 하는 건지 잘 감이 안 잡힌단 말이지.

"자, 봐. 벌써 나았지? 윤하야, 너도 선생님 싸우는 거 봤잖아. 선생님, 상당히 강한 편이거든? 걱정 붙들어 매."

시발, 팔자에 맞지도 않는 애들 달래기나 하고 있는 꼴이라니. 현역일 적 내가 봤다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어르고 달래자, 윤하 또한 간신히 진정한 듯했다. 대신, 훌쩍이는 소리가 우리 주변을 가득 메웠다.

'돌겠네.'

한없이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헌터가 고작해야 이 정도 상처에 죽는 소리를 내서 쓰겠냐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27살 아저씨에게 있어, 여고생이라는 생물은 그토록 강력한 존재였다…….

다행히 그런 우리들 사이에 자리잡은 정적을 깨트리는 이가 있었다.

"다 이긴 기분이라도 드나?"

사실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방금 전, 내게 두들겨 맞고 기절했던 양반이 어느새 정신을 차린 채 그런 말을 씨부리고 있었다. 거 참, 더럽게 튼튼하네. 나도 모르게 그런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하긴, A랭크 헌터가 내 움직임을 따라온 걸 보면 십중팔구 육체 강화계 헌터겠지.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한다냐. 현실적인 문제가 눈 앞까지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마비된 상태로 구속당한 윤하는 이젠 아예 다리가 풀렸고, 나는 걷기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아직 처리해야 할 일도 남은 판국이니, 된소리가 안 나올 수 없었다.

"그래. 지금은 그렇게 성취감을 만끽해라.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어째서 굳이 너 혼자만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걸까."

"야, 하연아. 나 부축 좀 해 줘라."

"어리석은 놈. 지금 심정은 어떻지? 다 이긴 기분인가? 그렇지만,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지금쯤, 내 동지들이……."

"네."

그리고.

방금 전부터 뭐라고 혼자 씨부렁거리던 양반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연이를 보고 그 입을 다물었다.

아니, 뭐…….

"나도 바보는 아니라니까."

비록 중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게 나를 노리는 계획이라 착각할 만큼 얼간이는 아니다.

용들의 습격도 악마의 내습도, 모두 하연이가 있었던 장소에서 벌어진 일.

그렇다면, 만일 이번 윤하의 납치극이 그에 뒤잇는 세 번째 사건이었을 경우상대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하연이일 가능성이 크다.

저 양반이 내게 기습을 가하지 않았던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겠지. 말하자면, 저 양반의 역할은 내 주의를 끄는 것.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라는 호위를 하연이와 분단시키는 것이었으리라.

때문에, 기습을 가하는 대신 모습을 드러냈다. 과장스러운 언동으로 내 이목을 끌었다. 만에 하나, 내가 윤하를 두고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상대는 썩어도 A랭크 헌터. 이만한 패를 무한정 동원할 수도 없겠지. 그렇기에, 치명상을 입은 내가 윤하를 포기하고 탈출하는 일 따윈 저쪽으로서도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을 터다.

여하간, 나를 상대로 A랭크 헌터라는 으뜸패를 낸 이상 저 쪽이 부릴 수 있는 인력은 한정되어 있다. 잘해도 C랭크 헌터 나부랭이, 어쩌면 윤하를 납치할 때 사용한 마비독을 대동하는 게 고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다쳤다 한들 내게 먹힐 만한 물건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저 쪽 입장에선 어떻게든 내 발을 묶는 사이 이번엔 하연이를 납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말하자면, 윤하의 납치극은 오로지 이를 위한 발판이었을 뿐이다. 혼자 오라는,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문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뭐, 거기까지 알아냈다면 저 쪽 생각대로 어울려 줄 필요도 없다.

방금 전까지 하연이가 두르고 있었던 건 독일 민속에 등장하는 정령, 코볼트의 힘이 깃든 망토였다.

그래. 소위 말하는 투명 망토다.

문자 그대로, 이를 걸쳐 투명해진 하연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저 쪽이 감지 타입이었다면 꽤 곤란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고.

덕분에, 하연이를 납치할 목적으로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을 납치범 친구들은 예의 여신에게 맡기고 방치.

실행범들 대다수 또한 무언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꽁무니를 뺐겠지.

오히려 나로서는 중립을 지킬 거라고 생각했던 여신이 적극적으로 협력한 게 더 묘할 지경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를 노린 거였으면 두 번째로 악마 새끼를 보내진 않았을 거 아뇨."

아카데미 명부에 떡하니 내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몬스터를 파견한 시점에서, 상대의 목표는 내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믿고 보낸 악마가 나자빠져 뒈져버린 뒤에야 이 박우찬이라는 놈이 뭐 하는 자식인지 깨달은 수준 아닐까.

"말도 안 돼. 고작해야 헌터 한 명을 상대로, 이게 무슨……!"

"거 시끄럽고, 잠이나 좀 자쇼."

더 이상 들어줄 생각도 없다.

하연이의 부축을 받은 채, 시원스레 사커킥.

지치지도 않고 일어나 멋대로 떠벌거리던 헌터 또한, 이것으로 완전히 침묵했다.

도수공권.

빈 손으로 온 것처럼, 빈 손으로 돌아가라.

패배자 무리한텐 그런 모습이 어울리는 법이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변하는 건 없었다.

아무리 심증이 있다고 해도, 물증이 없으면 무엇 하나 처벌할 수 없다. 하물며, 상대가 이 쪽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높으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목격자는 있다. 공간 계통의 능력을 활용해, 몬스터를 호출하는 모습 또한 보았다. 허나, 이런 경우를 대비하기라도 한 걸까? 그 때 사내가 사용한 도구는 일회용. 제대로 된 증거 따윈 남지 않는다. 몬스터의 시체 또한 게이트 폭주의 증거로 활용될 뿐이겠지.

적어도, 얼마 전까지 협회와 반목하고 있었던 도축업자와 생도 한 명의 증언으로는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정치적인 부담. 마침내 찾아온 평화의 시대에 몬스터의 위협을 상기시킨다는 리스크. 협회 상층부에 몬스터와 손을 잡은 자가 있노라 공표했을 경우 발생할 소요와 의심. 내분…….

저런 일에 상당히 무심한 편이라 자부하는 나조차, 납치범이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을 정도니까.

설령 최승준의 돈과 이준구의 네임 밸류가 있다 해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상대에게도 돈과 권력은 차고도 넘칠 테니까.

허나, 정말로 손 쓸 방도 하나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먼저, 이번 사건의 윤곽을 잡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나는 이를 망설임 없이 이준구와 최승준에게 털어놓았다.

반응은 격렬했다. 여동생이 휘말린 처지인 이준구는 물론이요,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 흙발로 들어오는 상황을 끔찍이 싫어하는 최승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둘이 사태를 깨닫게 된 시점에서, 반면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당장에 티를 낼 수는 없겠지. 여하간, 상대는 이준구의 색출 작업에도 어깃장을 놓을 수 있는 입장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개학 전부터 조사에 들어간 안건이 이토록 차도 하나 없을 턱이 있나. 이번 납치단 색출에 이준구의 조력을 요청하지 않은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이고.

때문에, 우리는 당장엔 침묵하길 선택했다.

과연 이 쪽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과연 이 쪽이 누구를 끌어들였는지. 이 또한 우리들의 무기가 되어줄 게 뻔했다.

그렇기에, 당분간 이준구는 성과 하나 없는 폴리모프 드래곤 사건에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마치 무엇 하나 모르겠다는 듯 아둔하게 조사에 매진하는 이준구의 모습은 틀림없이 훌륭한 위장막이 되어줄 테지.

최승준 또한 마찬가지. 다만, 지금 이상으로 아카데미 보안을 강화하기로 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후 아카데미를 습격하는 이들이 있다면 고생 깨나 하게 될 것이다.

예의 헌터 양반은 최승준 측에서 구금하기로 했다. 당연히 불법이었지만, 알 게 뭐람. 최승준에겐 돈이 있다.

하물며, 상대는 공식 신분 하나 없는 추정 에이전트. 이제 와서 문제가 될 단계는 진즉에 지나쳤다.

당연하지만, 이준구가 한 발 낀 이상 고문처럼 난폭한 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심문법 하나 배운 적 없는 우리가 손을 댄다고 해서 유의미한 정보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나서기로 했다.

돈으로 독심술사나 독심 능력이 담긴 도구 따위를 구매하기라도 했다간 자금 추적을 당할 수도 있는 만큼, 여기선 암시장 따위와 연이 있는 내가 물건을 구해 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내가 물건을 구할 때까지 녀석에게도 잠시 동안 유예가 주어졌다.

허면, 문제는 뒷처리다.

다행스럽게도, 윤하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연이가 나타날 때부터 한층 더 당황한 듯했다. 갑자기 이상한 변질자가 자신을 납치하더니, 담임이 찾아왔다. 거기에, 알고 보니 같은 반 친구도 동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아무래도 말을 들어 보니 자신이 납치당한 건 그 친구 때문이라고 하는 판국이다.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엔 아무래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에이, 저도 짐작은 하죠. 뭔가, 특수 임무? 그런 거죠?"

그렇게 말하는 윤하의 얼굴은 도저히 말처럼 가볍지 않았다.

윤하 또한 어마어마한 사태에 휘말렸다는 자각은 있겠지. 하다못해 헌터가 몬스터를 불러내던 모습까지 목격하지 않았던가.

허나, 윤하는 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대신 당찬 모습으로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어디 가서 말 안 해요! 대신, 출석은 채워줘요. 알겠죠?"

……결국 나 또한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예은 때도 그랬지만, 뭐 하나 제대로 마무리하는 적이 없구만. 어째 가면 갈수록 숙제가 늘어나는 기분이다.

그렇게.

게이트 내에서 이상 발생한 것으로 처리된 몬스터 덕분에, 협회에서 내려온 조사 지령도 마무리되었다. 이 이상 해체소를 기웃거리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어쩌다 보니 남아돌게 된 이 시간 속에서, 나는 굳이 여기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하연이의 첫 만남부터 이어진 일련의 사건.

마침내 주변 학생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기 시작한 저들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선, 슬슬 자문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자하연.

올해로 고등학생 1학년이 되는 여자애. 귀여운 인상. 헌터들 사이에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독특한 빛깔의 머리칼. 그 이상으로 신기한 눈동자. 겸손한 성격. 머리도 좋고, 의외로 끈기도 있다. 소질도 나쁘지 않고. 나를 오빠라고 부른다. 몬스터들을 끌어들이는 체질이라 생각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를 노리는 집단이 있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저들은 어째서 그녀를 노리고 있는 걸까.

이를 알기 위해, 나는 여기에 있었다.

고아원.

나와 그녀가 함께한 시간 이상으로, 16년이라는 세월을 지낸…… 하연이의 옛집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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