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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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핸드폰 하나 사는데 우주복까지 필요하진 않다.
그러나, 내가 뜬금없이 우주복을 착용한 데에는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장 눈 앞에 우글우글 몰려든 인파가 바로 그 증거였다.
유주얼 서스펙트를 방불케 하는 움직임으로 광고들을 피해 핸드폰을 손에 넣은 우리들은 그대로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연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아무리 필요하다고는 해도 추정 몬스터 유인기라 할 수 있는 하연이를 데리고 도시를 활보한 것부터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마침 그녀 또한 이 쪽을 눈치챈 듯 선글라스 너머로 자수정빛 시선을 반짝이는 게 보였다.
사정을 알고 있는 나야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패션 모델이라 하기에도 부족함 없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뭘 묘사한 건지 알아볼 수조차 없는 동상 아래, 짝다리를 짚고 선 자세조차 우아하기 그지없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와 그 위를 부드럽게 감싸는 날렵한 디자인의 롱부츠. 타이트한 스커트와 한 쌍을 이루는 와이셔츠는 깔끔하면서도 다소 밋밋했지만,화려한 색상의 롱코트가 더해지자 오히려 딱 절묘할 정도였다.
코트 위로 꽃이 피듯 흐드러진 머리카락은, 장엄한 와인색.
평소 걸치고 있는 묵색 드레스가 여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우아함을 자랑했다면, 지금 복장은 그 이상으로 화려했다.
프로답다고는 도저히 말 못 할 차림새이기는 했지만.
'살판 났네.'
하긴, 프로 의식이라고 해 봐야 상대는 문자 그대로 아마추어.
살아생전 이런 일을 해 봤을 턱 없는 여신님인 것이다.
"하여튼, 쓸데없이 주목 끌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니까. 벌써부터 이렇게 이목을 끌어서 어쩔 건데?"
"흥. 그렇게 말한다 한들,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사람의 아이들이 본인에게 경외심을 품는 건……."
실로 당연한 일이라는 듯 그리 말하려던 그녀의 입이 덜컥 하고 멈췄다.
인파를 뚫고 다가온 내 발걸음 또한 자연스레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무언가 수상한 점은 없었다. 이상한 사람도 없었고.
다른 건 몰라도 감지에 한해선 내가 이 여자보다 수백 배는 나을 텐데?
그러나 아무래도 그녀는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팔짱을 끼다가, 이마에 손을 얹더니, 눈가를 덮고는, 마지막으로 제 입술을 만지작대길 몇 번. 그제서야 그녀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뭐, 뭔데?"
뭐지?
드디어 돌아버린 건가? 토벌해? 토벌?
쉭쉭, 입으로 쇳소리를 내고 있자니 창피해 죽겠다는 투로 말하는 하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그게 아니라. 옷이에요, 옷."
"옷? 옷이 왜?"
"아니, 뭐야……. 뭔데 이거?"
물론 그렇게 말해도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다만, 그렇게 말하며 내 옷깃이라고 해야 할지 합성수지라고 해야 할지 모를 부분을 잡아당기는 하연이의 손길에 못 이겨 어깨를 좁힐 수밖에 없었다.
"NASA 우주복이라는 거다. 비싼 돈 주고 구했지. 하긴, 매일같이 거기 쳐박혀 있으니 알 리가 있나."
허나, 여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혼절하겠다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을 뿐.
다소 미심쩍은 태도였지만, 그렇다 해서 자리를 바꾸기에는 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한층 더 명확한 사실이었다. 이 여자가 무작정 끌어모은 인파들이 어느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이게 나 때문이라고? 네 녀석, 진심으로 말하는 게냐?"
그 지경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책임을 외면하려 하는 여신은 덤이다. 이래서야 원, 도대체 누가 신이라는 건지. 이러다 내가 부처 되게 생겼다, 진짜.
여하간, 그 때문에 인파를 벗어나는 데에도 상당히 시간을 쓰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우주복의 성능은 체감할 수 있었다. 인파를 헤쳐 나오며 몇 번이나 이 여자와 어깨를 부딪히고 말았지만, 평소 같았으면 당장에 연장을 빼들었을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공중제비 도는 걸로 끝낼 수 있었으니까.
역시 큰맘 먹고 시중에 나돌던 물건을 구매한 보람이 있었다.
"여아야, 아무래도 너 또한 여기까지 오는 데에 심대한 고생을 겪었을 게 눈에 선하구나. 참으로, 참으로 훌륭하도다. 어딜 가서도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게야. 내 진심으로 그리 축복하마."
"언니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생각보단 괜찮았어요. 아, 저는 자하연이라고 하는데. 언니는요? 오빠랑 아는 사이이신 것 같고……."
"음. 티아, 그렇게 부르거라. 내 윤허하겠느니라."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능에 내심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이, 어느새 둘은 나를 빼놓고 통성명을 나누고 있었다.
제 딴에는 나름 기밀이랍시고 정체를 숨기려는 모양인데, 말투가 저래서야 속아주기도 힘들지 않을까.
"염병을 떠네, 진짜."
"넌 조용히 좀 해, 빡치니까!"
결국 그녀 또한 되먹지도 않은 컨셉을 내버리고 그리 소래기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만 보면 도저히 협회 최상층에 군림하는 여신, 지상에 강림한 성좌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부리고 나서야 그녀, 여신 티아마트는 천천히 제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우악스러운 뿔이 돋아있던 평소와는 달리, 길게 내리기른 머리카락이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추어 찰랑대는 게 보였다.
물론, 존재 자체가 기밀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별다른 이유 하나 없이 바깥을 싸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번 일에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어 이렇게 왕림한 셈이지.
현신Avatar.
통칭 그렇게 불리는 성좌들의 권능 중 하나.
문자 그대로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신들의 단면'을 지상에 내려보내는 것이다.
아무래도 비교적 대중적인 능력이라는 듯하지만, 본체와의 거리에 비례해 분신에게 부여할 수 있는 힘이 달라진다는 특성 때문에 다른 성좌들한텐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기능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금 눈 앞에 있는 분신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평소 그녀에 비해 한 단계 이상 뒤떨어지는 수준. 다시 말해, 대략 A+랭크 몬스터에 준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이러는 판국에, 지상에 강림하지 못한 성좌들이 사용해 봐야 능력 없는 E랭크 헌터 수준밖에 되지 않겠지.
티아마트 본인의 말이니만큼 어느 정도는 걸러 들어야겠지만, 게이트를 넘어 지상에 현현할 수 있는 성좌들은 극히 일부. 거기에, 정말로 이 세계까지 탈출할 수 있었던 성좌들은 개중에서도 더더욱 한 줌이라고 하는 판국이다. 실질적으론 그녀의 고유한 능력이나 다름없는 셈이라 할 수 있겠다.
말이 분신이지, 본인의 감각을 공유하고 조작할 수 있는 데다가 의식까지 투영할 수 있다면 사실상 예비 기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어느 쪽이든, 협회 카드를 신나게 긁어댄 듯 화려하게 치장한 꼴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반대로 말하자면 평소와 달리 구토하고 싶은 기분이 느껴지는 정도로 끝나는 시점에서, 확실히 존재감이 약해지긴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오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대강 상황이 정리되자 하연이는 그렇게 물었다. 하긴, 하연이 입장에서는 퍽 당황스럽겠지. 핸드폰 하나 사러 나왔더니 갑자기 머리 이상한 년이랑 마주치게 된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앞머리를 긁으려 했지만 헬멧에 가로막혀 정작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얘가 게이트 조사 전문가거든."
이번 사태를 보고받은 헌터 협회엔 비상이 걸렸다.
아무튼, 게이트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던 상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한 내용 뿐이었으니까. E랭크 게이트에서 S랭크 몬스터가 튀어나왔다는 사실만 해도 눈이 발칵 뒤집어질 지경인데, 하물며 그게 어쩌면 실습 시기를 노린 테러 행위일 수도 있다니?
다행스럽게도, 최승준의 발빠른 대처 덕택에 내가 몬스터를 썰어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당시 게이트 안에 있었던 둘과 최승준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사람들 입만 막았다고 어떻게 될 게 아니었다. 간신히 신문 1면에 아카데미 개교와 동시에 테러 발생 따위의 자극적인 기사가 실리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관련 부처가 뒤집어지고 몇 개나 되는 책상이 줄줄이 나가리 된 끝에 협회 상층부가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일단 뭐라도 조사해라.
갑자기 어디에서 그만한 몬스터가 튀어나온 건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닥치는 대로 파 봐라.
요컨대, 짐작가는 게 없다면 물량으로 떼우자는 다소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게이트나 몬스터에 대해 나름대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그녀가 파견을 나오게 된 것이다.
'하긴, 동족이니 어련하시겠나.'
물론, 파견이라 한들 협회가 그녀에게 이래라저래라 턱짓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힘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 대한민국에 있어 유일하게 인공적으로 헌터를 발생시킬 수 있는 존재. 문자 그대로, 게이트 발생 이후 인류에게 가호를 내렸다 일컬어지는 성좌들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지상에 현신한 여신이다.
고작해야 종신직도 못 되는 협회장 따위가 감히 무언가를 요청할 수 있는 처지는 못 되겠지, 아무렴.
십중팔구 이번 파견 또한 이 녀석이 자청한 게 틀림없었다. 협회 입장에서는 만에 하나라도 게이트에 휘말려 그녀라는 전력을 잃을 바에야 성좌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대우랍시고 반쯤 유폐하고 있을 정도니, 이런 일에 먼저 나서서 팔을 걷어부칠 리도 없다.
'매일같이 최상층에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는 판국이니.'
지루하기라도 했던 모양이지?
문제는 그 호위로 내가 발탁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었다. 여하간, 성좌의 정체가 몬스터라는 사실은 세계 각국의 수뇌부조차 알고 있을지 확실치 않은 사안이다. 오로지 감에 의존해 때려맞춘 날 제외하면 말이다.
게다가, 이를 제외해도 그녀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대외비.
그렇다면,그녀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호위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실력도 나쁘지 않은 헌터.
내가 생각해도 나 말고 있기나 할지 의문이다.
여기에 예의 몬스터가 튀어나왔을 당시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고.
말하자면 협회와 여신, 양 측의 이해가 일치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뭐, 이해했다고 해서 딱히 덜 빡치는 건 또 아니지만.
다른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하필이면 이 년이라니…….
언젠가 협회장의 머리를 삭발해 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그런 사정을 설명하자, 하연이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와 낙담, 양 쪽이 복잡하게 뒤섞인 태도였다.
"하긴, 갑자기 핸드폰 사러 가자고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더라."
"아니, 미안해……."
그렇게 들으니 내가 또 할 말이 없네.
아무래도 하연이는 이번 쇼핑을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 실체는 짜자잔, 사실 게이트 조사 차 이렇게 나온 거랍니다!
애시당초 별로 좋지도 않은 기억을 떠오르게 한 만큼,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핸드폰도 게이트를 들락날락대다 보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사러 온 거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나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게이트를 들쑤실 생각에 신났지만, 아무래도 하연이는 그러기 힘들 테고.
"음. 나도 사과하마. 아무래도 본인이 너희들의 데이트를 방해하고 만 모양이구나."
"씨발년아!!"
갑작스레 튀어나온 폭탄에 나도 모르게 그리 외치고 말았다.
썩어도 여신이라는 양반이 데이트 운운하는 단어를 사용한 건 이제 와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된 건 지금 이 년이 나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든다는 사실이었다.
상대는 현역 여고생, 그것도 열 살 차이! 여동생이라 말해도 터울 심할 나이에 대뜸 옆집 아줌마처럼 그런 말이나 늘어놓다니.
설마 싶긴 하지만, 마지막에 신고당하는 건 나란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헌터 아카데미가 손이 달린다 해도, 어디까지나 국가 주도 프로젝트. 원조교제 이슈 따위가 나돌기라도 하는 날에는 즉각 교직원의 목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게 해고당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더 이상 몬스터를 잡을 수도 없다, 이 말이야.
요 근래 내가 어마어마하게 풍족한 살육을 즐길 수 있는 건 오로지 헌터 아카데미의 교사라는 자격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헌터 협회의 보증이 있으니 이렇게 게이트를 쏘다닐 수 있는 거지, 만약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불과 얼마 전 사냥에 굶주린 모습 그대로 단칸방에 쳐박힐 수밖에 없다.
설령 천신만고 끝에 평범한 자격증을 발행하는 데에 성공한다 치더라도, 원조교제 문제로 짤렸다는 놈을 타 기관에서 고용해 줄 리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경우, 하연이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다른 녀석이 하연이를 보호하게 되겠지만, 이 단기간에 A랭크 몬스터가 셋에 S랭크 몬스터가 하나. 도저히 여타 헌터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나야 더 이상 몬스터 도살은 꿈도 못 꾸는 처지가 되는 걸로 그치겠지. 정 뭐하면 게이트에 투신하면 그만이고. 하지만 하연이는 다르다. 정말로 신변에 위협이 닥칠 만한 상황인 것이다.
바야흐로 모두가 상처 입는 세계의 완성이라 할 수 있겠다.
평소처럼 살심을 담아 여신을 노려봤지만, 정작 당사자는 방금 전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눈치채지 못한 듯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저 새끼는 진심 존나 무례한 새끼로구나. 내, 저 놈팽이를 대신해 사죄하마."
"감히 너 따위가 내 의사를 대변할 수는 없다, 미친 도마뱀."
"씨발놈아!"
하여튼, 천박하기 그지없는 언변 하고는. 저러다 애가 보고 배우면 어쩌려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절 여신이라는 작자가 뭐 저리 한국 욕을 잘 알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래서야 여신이 아니라 완전히 몬스터구만.
결국 여신이라고 자칭하는 성좌 종족 몬스터를 도살해버리기 전까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싸움은, 잔뜩 진이 빠진 태도로 입을 연 하연이에 의해 끝을 맺었다.
"아뇨, 괜찮아요.제가 이해해야죠……."
"봤냐? 너보다 한참 어린 애가 이러는 거? 반성 좀 하자, 응? 추하다!! 김티아!!"
"미친놈아!!"
저 나잇살 먹고도 꼬박꼬박 여고생한테 언니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미친 도마뱀 때문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10분은 지난 뒤의 이야기였다.
사실, 시간이 그렇게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여하간, 말이 조사지 실제론 게이트 하나 살펴보는 데에 채 1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나야 한 번 보면 척이고, 마력 공학 연구자 대부분이 설명하지 못할 마력적 현상을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있는 자칭 여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보기에, 최근 급격한 확장을 거듭하거나 예의 악마 새끼가 튀어나올 만한 게이트는 단 하나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검사라는 명목으로 게이트 안도 한바탕 뒤엎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아무래도 하연이에겐 미안한 일이 되겠다 싶어 참기로 했다.
그렇게 세 개 정도 되는 게이트를 돌았을 때, 마침 점심 시간이 됐다.
솔직히 검사보단 이동하는 데에 시간을 더 잡아먹은 기분이다. 뭘 먹어야 할지 조금 살펴보고 있자니, 문득 협회 파견 해외 에이전트라는 설정의 김티아 씨께서 입을 여셨다.
"햄버거라는 걸 먹어보고 싶구나."
"그럼 햄버거만 빼고 뭐라도 먹자."
허나 내 가련한 발악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나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하연이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은 근처 맥도날드로 향했다.패스트푸드 계의 강자로 일찍이 세상을 석권했던 맥도날드의 명성도 지금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해저 게이트 등에 의해 본사와의 연락이 차단된 끝에, 철저하게 현지 밀착형 갈라파고스화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부분의 맥도날드 한국 지점은 M보다는 K가 더 어울리는 맛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점포에서는 햄버거를 팔고 있긴 한 모양이다.
햄버거를 김치에 싸서 드셔보라는 마케팅을 상대할 필요가 없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뭐가 그리도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대고 있는 여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니꼬움이 솟구쳐 오르는 게 느껴진다. 도대체 언제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있다고 저러는 건지. 애초에 누가 여신을 앞에 두고 햄버거 얘기를 늘어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완벽한 센서 차단 성능 덕분에 자동문이 인식하지 못하는 날 대신해 깡총대던 하연이와 함께 발을 들였다. 도시의 시체 위에 재건된 신도시가 으레 그렇듯이, 매장 안은 깔끔했다. 자동문도 그렇지만, 마치 몬스터의 습격을 상상 한 번 해보지 않은 듯한 말끔함이 인상적이었다.
"어서 오세……?"
그런 감상을 삼키던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던 종업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역시, 썩어도 여신이라 해야 할 티아마트는 물론이고 하연이까지 데리고 다니는 건 아무래도 지나치게 주목이 쏠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멈칫하고 만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맥도날드 유니폼을 앞치마처럼 두른 채 이 쪽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황윤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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