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문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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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가 나를 불러다 앉혀놓곤 뜬금없이 흑역사 폭로를 시작한 그 날 이후로도, 내 일상에 변화는 없었다.
물론 내 삶에 변화 하나 주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일들 뿐이었다는 게 아니라, 단박에 결론이 나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사안들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무언가 일이 터질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럴 것 같더라."
무슨 중대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최승준은 그리 말했지만, 그 정도는 나 또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여하간, 상대는 그 최승준이다. 아무리 게이트를 상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고작해야 E랭크 게이트를 대비하기 위해 나까지 부른다?
좋게 말해도 전력 낭비고, 나쁘게 말하자면 편집증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만 해도 과잉 전력일 판국에 말이지.'
아무래도 녀석은 이번 실습을 틈타 협회의 반대 파벌 따위가 움직일 거라 예상했던 듯싶다.
평화의 시대가 찾아온 지금, 헌터 아카데미의 개교를 내키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점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단순히 평화에 취한 건지,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금 게이트가 열린다 치더라도 지금은 사회의 재건 쪽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런 이들에게 있어 이번 실습은 물어뜯기 딱 좋을 먹잇감이다. 만에 하나라도 부상자가 생기면 이 '평화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 교육'을 헐뜯으며 아카데미의 운영에 간섭할 생각이었겠지.
필시 최승준으로서는 그렇게 찾아온 반대 파벌의 인사들을 자신이 상대하고, 혹여라도 게이트 안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곧장 나를 파견할 생각이었을 터다.
허나.
나는 물론이요 최승준 또한 이번 일이 예의 반대 파벌 인사들의 음모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게 가능했으면 한국이 세계 정복했지.'
S랭크 몬스터의 출몰은, 곧 국가의 존망이 달린 대사건이다.
고작해야 대한민국의 일개 파벌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 상층부의 절반 혹은 그 이하나 되면 다행일 세력이, 독단적으로 S랭크 몬스터를 풀어놓을 수 있다고?
만약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했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은 미국조차 제치고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겠지.
"그렇다면 역시 다른 가설이 필요하겠군. 예를 들어, 게이트가 폭주한 거라던가……."
"아니, 그건 아니야."
"흠,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뭐,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아니겠지."
게이트의 발생으로부터 어언 20년. 아직도 우리들은 게이트에 대해서 무엇 하나 자신할 수 없었다. 인류가 게이트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게이트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사실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뿐이다.
게이트 연구자들이 으레 방패처럼 사용하는 문구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로서는 이번 사태가 게이트의 폭주 때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게이트 중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경우 또한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게이트들 또한 확장을 거듭할 땐 그에 어울리는 마력을 내뿜곤 했다. 말하자면 게이트의 확장에 필요한 요소를 갖추어 단기간에 폭발적인 확장을 거듭한 쪽이지, E랭크 게이트에서 S랭크 몬스터가 툭 하고 튀어나오는 것만 같은……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게이트 안에선 그런 전조 현상을 감지할 수 없었기도 하고.
만일 S랭크 몬스터를 잉태할 만큼 엄청난 마력원이 존재했다면, 아무리 그래도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사건이 해결된 후, 게이트의 랭크를 다시 한 번 측정해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게이트의 랭크는 여전히 E. 터주가 뒈져버린 탓인지, 내부의 마력 농도는 감소하면 감소했지 증가하진 않았다.
물론 내 마력 감지를 뛰어넘는 솜씨로 이를 은폐한 실력자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토록 어마어마한 실력자가 어째서 아카데미 지하까지 기어들어와 E랭크 게이트를 S랭크까지 성장시킨 뒤 홀연히 사라진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필이면 실습 시기에 맞추어 E랭크 게이트가 S랭크 게이트로 성장할 전조를 보이는 와중, 이를 깨달은 어마어마한 실력자가 게이트의 성장을 은폐한 뒤 사라졌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가정에 가정을 덧붙이는 것보다야 훨씬 더 심플한 설명이 있다.
즉, 정말로 E랭크 게이트 위에 S랭크 몬스터가 떡 하니 떨어졌다는 쪽이다.
물론 이 또한 문제는 있었다.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도대체 어떻게 그 빌어먹을 몬스터는 내 감각은 물론이요 헌터 아카데미의 방위 체계까지 뛰어넘어, 아카데미 지하에 있던 게이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후자야 단순히 얻어 걸린 것이라 치더라도, 전자는 도저히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사실, 짐작이 없지는 않았다. 애초에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한 것부터가 바로 이 때문이었고.
자하연.
어쩌면 이번 악마 새끼의 출몰 또한 그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마치 주변에 게이트 하나 없던 뒷골목에서 A랭크 몬스터가 도합 셋이나 튀어나왔던 그 날처럼.
문제는, 그 때와 비교해도 이번 사태는 상당히 특수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녀에겐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해 그녀를 주웠고, 실제로 그녀에겐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녀가 때 아닌 습격을 받게 된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다르다.
만일 그 몬스터가 하연이의 능력에 이끌려 찾아온 것이라 치자. 하연이의 능력이 S랭크 몬스터에게 먹히기나 하겠는가 하는 점을 완전히 무시한다 치더라도, 결국 그 몬스터가 어떻게 아카데미의 감시 체계까지 속여넘길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순간이동?
설마.
고작해야 그 정도도 감지하지 못해서야 내 능력이 운다.
애시당초 그 몬스터는 어째서 그렇게 행동한 걸까.
단순히 하연이의 능력에 이끌려 찾아왔다기엔 지나칠 정도로 훌륭한 솜씨였다. 깔끔한 강습. 그렇기에, 이 쪽의 의문 또한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어딜 어떻게 봐도 작위적이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허나, 그 몬스터 내지는 예의 몬스터에게 아무튼 무언가 대단한 방법을 전달한 누군가는 그토록 어색하기 짝이 없는 습격을 감행하면서까지 헌터 아카데미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하연이에게 무언가 있는 걸까? S랭크 몬스터를 무지성 투하하면서까지 손에 넣어야만 할 가치가?
평소 맹한 얼굴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하연이의 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쪽이든,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내 일상에 변화는 없었노라고. 내 일상에 변화 하나 주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일들 뿐이었던 게 아니라, 단박에 결론을 내리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사안들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다만.
"출석 부른다, 얘들아. 이예은."
"네, 선생님."
사소한 변화는 있었다.
첫째, 이예은의 태도.
실습 전까지만 해도 지나치리만큼 날이 서 있었던 이예은의 태도가 한층 누그러진 게 보였다. 보다 여유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그 날, 나와 입씨름을 하기 전으로 돌아간 듯…… 혹은 그 이상으로 마음에 여유가 생긴 듯한 그 모습은 내가 이번 실습을 통해 이예은에게 기대하고 있던 변화이기도 했다.
뭐, 정작 내가 해 준 건 없지만!
좋게좋게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멋쩍은 기분이었다. 씌인 게 떨어진 듯한 모습은 확실히 칭찬할 만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쩌다 한 꺼풀 벗게 된 건진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딱히 그녀의 고민이 해결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로서는 여전히 그녀의 전법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 판국이니 더더욱.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소 얼떨떨해하는 나를 상대로도 사뭇 점잖은 태도를 보였다. 아니, 그 뿐이랴? 이젠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다음 달 즈음엔 반말이라도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교육 실패, 교권 실추의 현장, 낙하산으로 들어온 선생의 한계, 중졸 교사가 그럼 그렇지 등 한껏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내겐 썩 고무적이라 할 수 있는 결과였다. 솔직히 선생님은커녕 너나들이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으니까.
비록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준구가 혼내기라도 했나?'
새끼, 가정 교육은 포기한 것처럼 말하더니 좀 치네~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갑자기 이 쪽을 불러내 흑역사 폭로 대회를 시작한 이준구 또한 어느 정도 참작해 줄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정도라면 다음 상담 땐 퍽 괜찮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물론, 그녀의 전법에 제대로 된 결론을 내놓지 않는 한 어디까지나 여름방학 숙제 미루기나 다름없는 기대겠다만.
"자하연."
"네."
그리고 둘째로는, 아무래도 하연이와 이예은이 친구가 된 것 같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 상당히 예상 외인 결과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헌터였다는 사실도 모르던 하연이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랬다. 차세대 헌터랍시고 뻐기는 애들 사이에 있다 보니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한 적도 있었던 만큼 더더욱.
분명 내가 뛰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당장에 멱살 잡기 직전이었는데 말이지~
도대체 어쩌다가 친해진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게 여고생의 힘인가?
출석을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면서도, 다시 한 번 이예은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하연이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마침 이예은 또한 그 모습을 목격한 듯, 멋쩍은 태도로 홱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성급히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가락 너머로 발갛게 달아오른 귀가 뚜렷히 보였다.
'뭐든 잘 된 일이지.'
하연이가 핸드폰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드래곤들한테 습격당했을 때 부서졌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슬슬 나도 핸드폰 정도는 갖춰야 할 상황이다. 언제 한 번 같이 사러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출석부를 넘긴다.
"류지희."
"네!"
"정필연."
"예."
"황윤하."
……그리고.
때 아닌 정적이 찾아왔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기보다는, 들려야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탓에 찾아온 침묵.
물론, 덕분에 분위기가 가라앉기는 했다.
바로 이게 세 번째 변화.
"윤하 아직 안 왔니?"
"그런 것 같아요."
"……그래."
우리 반에 지각생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지각 한 번 한 게 그리 큰 잘못은 아니다. 이런 말은 하기 뭣하지만,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들 차세대 헌터라느니 대한민국의 미래라느니 하는 이름으로 비행기 타던 게 당연하던 녀석들이다. 하물며 제 잘난 맛에 살기 딱 좋은 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각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 아닐까?
문제가 있다면, 황윤하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처음 지각했을 땐 괜찮았다. 나 또한 이해해 줄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적당히 주의만 주는 선에서 끝냈고, 황윤하 또한 나른한 얼굴로 다음부터 조심하겠다는 대답을 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나, 그렇게 말한 것과 달리 황윤하의 태도는 오히려 점점 악화되었다.
1교시를 빼먹던 게 2교시까지 빼먹고, 3교시에 이어 4교시까지 빼먹게 되기까지 고작 일주일.
나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실습이 맥빠지는 식으로 끝나기는 했다. 우리 반 애들은 물론, 학생들 전원이 그토록 고대하던 몬스터와의 첫 실전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실제로도 다른 반이라고는 하나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표출하는 학생들 또한 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단순히 불평불만을 터트리거나, 도리어 한껏 풀어진 모습을 보인다면 이해할 수라도 있다. 하지만 실습이 흐지부지 끝나자마자 학교를 빼먹는 학생이라니, 도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실습과 별로 상관 없는 이유일수도 있다. 우연히 타이밍이 겹쳤을 뿐이라던가. 허나, 나로서는 실습 외엔 달리 짐작 가는 일도 없었으니만큼 오히려 더더욱 곤란할 따름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실습 당일엔 갑자기 튀어나온 악마 새끼를 도살하느라 바빴고, 그 뒤로는 이래저래 뒷처리에 쫓기던 나날이었으니. 이제 와서 실습 당시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해보려 해 봤자 제대로 떠오를 턱이 없었다.
나름대로 괜찮게 굴러가던 교사 생활에 갑자기 이런 일을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혹시 톡톡 튀는 사춘기 감성으로 자신이 반항기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증명하고 싶었던 거라면, 퍽 성공적인 행동이었다고 평할 수는 있겠지만.
"음, 아무래도 윤하가 오늘도 바쁜 모양이로구나. 뭐, 어쩔 수 없지! 다른 선생님들 들어오시면 너희가 잘 좀 말해주고. 이따가 윤하 오면 교무실로 오라고 전해주렴. 수업 잘 듣고. 알겠지?"
"네!"
한데 모인 대답이 우렁차기 그지없다. 학생들 또한 슬슬 익숙해진 탓이겠지. 하긴, 나만 해도 질렸다는 듯 말하고 말았으니 어련하겠는가.
허나, 오늘은 아무래도 평소와 달랐다.
내가 퇴근을 앞두기까지, 황윤하는 교무실로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황윤하의 기개를 동경하기로 결정한 애들이 과감하게 내 말을 무시해버린 건 아니고.
오히려 정 반대라고 해야겠지.
드디어 황윤하가 오늘 하루 학교를 통째로 땡땡이치고 말았다.
만일 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라도 돌고 싶은 기분에, 문득 눈 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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