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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몬스터만 죽이고 싶음-3화 (3/371)

〈 3화 〉 몬스터포비아

* * *

박우찬과는 달리, 그녀…… 자하연은 당시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그토록 잊기 힘든 일도 드물었다. 하물며 그녀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기억의 초입에서, 그녀는 언제나 달리고 있었다. 무대는 새벽을 틈탄 뒷골목. 어슴푸레한 달무리가 회반죽 담장 위를 엷게 덧칠하는 가운데, 오로지 그녀의 발소리만이 종소리마냥 어둑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턱끝까지 닥쳐드는 호흡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때문에, 그녀는 어째서 자신이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한 건지 냉정히 반추할 수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자하연. 나이는 열 여섯. 정확히는 올해로 열 일곱이 된다. 지금 이 시대엔 그렇게 드물지 않은 고아 출신으로, 부모는커녕 사촌 한 명 없는 천애고아였다.

당연히, 별다른 악연도 없다. 달리 원한을 산 기억도 없었다.

허나,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 다급히 도망치고 있는 걸까?

도망.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단어가 입술을 훑었다. 반쯤 무아지경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누가?

어째서?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기억이 날아가기라도 한 것마냥, 도망쳐야만 한다는 절박감만이 가슴 속에서 샘솟는다. 불안한 예감. 내키지 않는 그녀의 등을 거칠게 떠미는 감정의 손아귀는 그토록 각박했다.

마치 자하연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된 듯했다. 그것도 자신의 배역에 제대로 이입조차 하지 못하는 삼류 배우.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었다.

'제대로 된 일일 리 없어.'

이런 야심한 시각에 여자애 한 명을 뒤쫓는 정체불명의 괴한들.

도저히 제대로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때 아닌 추격전에도 마침내 끝이 다가왔다.

애시당초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발소리로 미루어 볼 때, 추적자는 셋. 허나, 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도 자신을 뒤쫓는 발걸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니까.

조급하게 달음박치지도, 섣불리 거리를 좁히지도 않는다. 쉬이 놓쳐줄 생각은 없다는 양,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녀의 뒤를 밟는 발자국 소리에는 모종의 여유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콰앙!!

돌연, 소리가 폭발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뒤를 쫓던 발자욱 소리가 문득 둘이 되었다 생각한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뒤를 쫓고 있던 사내들 중 한 명이 어느새 그녀의 눈 앞에 서 있었으니까.

도약이라기보다는 활강이라 말해야 할 정도로 압도적인 신체 능력. 허나, 문자 그대로 자신을 '뛰어 넘어' 앞지른 거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에선 당혹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 앞의 남자를 마주보는 시선엔 은밀한 만족감이 실려 있을 정도였다.

저래야만이 용.

모든 몬스터들 중에서도 가장 오만하며, 동시에 가장 강대한 존재라 할 수 있겠지.

선글라스 너머로 얼핏 드러난 사내의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향해 자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던 그녀는,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용?'

물론 알고는 있었다.

그 이빨, 창보다도 뾰족하다.

그 발톱, 칼보다도 날카롭다.

그 비늘, 방패보다 견고하다.

그 마력, 대해보다 끝이 없다.

바야흐로 모든 몬스터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다 감히 단언할 수 있을 존재들. 그게 바로 용이었다.

허나, 그녀가 느끼고 있는 당혹감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용이라고?'

정말로?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이 사내가, 정녕 용이란 말인가?

기묘한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던 소녀의 인생에 몬스터 따위가 끼어들 국면은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님이 사실 헌터였다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면야 더더욱.

하물며 용이라니?

아니, 애시당초 자신은 어째서 이 남자를 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어딜 어떻게 봐도 용보다는 스토커에 가까운 행색의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하연은 제 앞에 내려앉은 이 사내를 용이라 단언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 슬슬 돌아갑시다 아가씨."

"……처음 보는 사람은 따라가지 말라고 들어서요."

주춤주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만다.

물론 저들에게도 그녀의 태도는 눈에 밟힐 듯이 뻔히 보였겠지만, 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방심했다 폄훼할지도 모르는 모습. 그러나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저건 단순한 자만심이 아니다.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일종의 자부다.

그럴 만도 했다.

머잖아 천천히 달그림자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내의 눈동자 또한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의태할 만한 실력을 갖춘 용이, 자그마치 셋.

여고생 한 명을 잡으러 왔다기엔 지나칠 정도로 호화로운 구성이었다.

"거 참, 교육 한 번 잘도 받았군."

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용을 눈 앞에 둔 채, 그녀는 천천히 마음 속 경종을 울렸다.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부터 그런 방자함이 허락될 만한 실력차도 아니었거니와, 어쩌면 혹시 도망칠 수 있는 구석이 있지는 않을까 용들의 오만함이 자신에게 활로를 내어주진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렇기에.

다음 순간 밀어닥친 폭력은, 방심했다던가 어쨌다던가 할 수준이 아니었다.

"어."

정말로 그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공교롭게도 그녀는 이를 설명할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눈 앞에 멀뚱멀뚱 서 있던 남자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눈을 떼지는 않았다. 꼬리나 채찍 따위의, 예측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던가 하는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어찌할 도리도 없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로서는 아무리 힘 조절을 했다지만 어떻게 자신이 아직까지 사람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주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담장에 쳐박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덤프트럭에 부딪힌 듯한 충격이 뒤늦게나마 전신을 덮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땅에서 떨어진 발끝이 바닥에 닿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우웨에에엑……."

도저히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으나, 당장 그녀에겐 이를 억누를 여유도 없었다. 철퍽, 뒷골목 사이로 추레한 소리가 퍼져나간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현기증과 어지러움. 그 위로 시큼한 위액의 향이 느껴지자 정말로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뱃속에 담긴 위액이란 위액은 모조리 게워낸 뒤에야 간신히 자신을 쥐어짜는 아픔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굳이 한 번 더 말하자면, 이는 역시 당연한 결말이었다.

아무리 아둔한 코끼리라 한들, 개미를 상대하는 데에는 차고도 넘친다. 하물며 코끼리가 자그마치 셋이나 된다면? 개미의 승산을 셈하는 일조차 어리석다는 평을 피할 수 없으리라. 실제로 그녀를 쫓고자 파견된 용들 또한 이제 와서 자신들에게 닥칠 위협 따위를 염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엉?"

돌연 울려퍼진 목소리 또한 본래 그들의 예정 속엔 없었던 일이었다.

귀에서 울려퍼지는 이명 너머, 신기할 정도로 잘 들리는 목소리. 그렇기에, 자하연은 방금 전 그 목소리를 낸 젊은이가 썩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이런 광경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놀라기 마련이다.

달빛이 쏟아지는 밤 아래 주저앉은 여자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

설령 그들의 정체가 용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당황스러울 장면이리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간신히 들어올린 시선 너머로, 그녀에게도 지금 이 장소에 새로이 끼어든 난입자의 모습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성의 없이 바닥에 대고 찍찍 끌고 있는 슬리퍼. 그 위로는 단촐한 옷차림을 걸치고 있는 후줄그레한 청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를 쥐고 있었던 듯 쥐락펴락하고 있는 손아귀를 보건대 아마도 건너편에 있는 쓰레기장에 들렀다 돌아가던 참인 듯했다.

물론 그녀 또한 이런 상황에 백마 탄 왕자님이 짠 하고 나타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형편 좋게 구해주기는커녕 때 아닌 희생자만 늘어나게 생긴 지금 이 상황은 그녀로서도 절망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도망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벌벌 떨리는 혓바닥은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내뱉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오만한 용들이 이제 와서 침입자를 놓아줄 거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당연히 용들에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번 일이 혹여라도 새나가면 귀찮아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애초에 용이란 그런 자비를 베풀 만한 생물이 아니었다.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처리한다.

세 용의 판단은 거의 동시였다. 굳이 말하자면, 그들은 눈 앞의 남자보다는 제 3자가 난입했다는 사실 자체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사냥개 역할이나 맡고 있었다곤 하지만, 이렇게 한눈을 팔고 있었을 줄이야.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사람 하나 매장하는 데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그러기에 충분한 힘 또한 있었다.

고작해야 이런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진 않지만, 반대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까진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 이상 잡무가 늘어나는 건 역시 사양이었다.

그렇기에.

"씨발 뭐고."

다음 순간, 그들에게 밀어닥친 폭력 또한 방심했다던가 어쨌다던가 할 수준이 아니었다.

순식간이었다. 방금 전, 저 남자를 향해 휘두르려 했던 꼬리와 발톱이 완전히 뜯겨져 날아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연함을 담아 그렇게 뇌까린 놈이 셋 중 가장 먼저 뒈져나갔다. 어떤 갑옷보다도 단단하다 칭송받는 용의 신체가, 마치 어설픈 초등학생의 회반죽 공예처럼 산산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허나, 임종을 맞이한 용이 마지막으로 입에 올린 건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이 아니었다.

공포.

혹은, 순수한 외경.

자신과 함께 이번 일에 나섰던 동포들의 육체가 양쪽 담벼락에 쳐박혀 박살나는 몰골에, 용은 어울리지 않게도 그런 감정을 품었다.

갈려나갔다. 진실로써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잘려나간 단면부터 그러했다. 뛰어난 솜씨로 단번에 절단했다기보다는, 마치 맹수가 물어뜯은 듯한 절단면. 그러나 용들은 알 수 있었다. 무기술에 소양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한 마리 용으로서 알고 있었다.

동포들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

비늘을 벗기고, 고기의 약한 부분을 베어, 뼈 채로 끊는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직관적인 용살법이다.

그러나.

고대의 영웅들마저 쉬이 타도하지 못한 용의 비늘을, 저토록 손쉽게 썰어대다니──.

사고를 마무리하기도 전에, 용의 육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재수없게 온 몸의 장기가 갈기갈기 작살나버린 용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남은 건 둘.

하지만,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건 과연 어느 쪽인가.

"이 새끼!!"

판단은 빨랐다.

범용한 생물이나 몬스터라면 진즉 죽어나갔을 육체를 억지로 수복한다. 마력을 있는 그대로 쳐박아 재생.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재생을 완료한 두 마리 용이 의태를 벗어던지고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딱히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동료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아니, 유아독존인 용에게 그토록 어울리지 않는 단어 또한 드물겠지. 복수심 또한 마찬가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누지 않은 그들이 호흡을 맞춰 덤벼든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최강의 몬스터인 용으로서의 자긍심도 없잖아 있다. 다만, 그보다는 최강의 몬스터인 용들조차 지금 저 사내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지 감히 확신할 수 없었다는 점이 더 컸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공교롭게도,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단지, 의태를 풀어헤친 용들의 육체가 완전히 형태를 갖추기도 전.

터더더더덕.

추잡한 소리와 함께, 피보라를 흩뿌리며 내장이 추락했다.

단순히 힘으로 때려 부순 게 아니었다. 방금 전과 같이 펼쳐진 탁월한 기술이, 용의 비늘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 뼈를 끊었다. 검술이라기보다는 요리에 가까운 검섬이, 용들을 문자 그대로 발라내버린 것이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 실로 3초 내외.

잠깐의 정적 후 남자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손엔 어느새 우악스러운 거검이 쥐여 있었다. 주변에 달리 남아있는 용이 있을까 살피는 그 동작은, 그러나 무엇 하나 현실감 없는 방금 전의 참상과 더불어 마치 길 잃은 여행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외관부터 그러했다. 며칠이나 밤을 샌 듯한 눈동자는 마치 죽은 물고기마냥 퀭했고, 그 위로 진하게 내려온 다크서클 또한 거뭇거뭇하게 핀 수염에 비하면 차라리 해맑다고 해야 할 정도였으니.

적어도 백마 탄 왕자님으로 보이진 않았다.

허나, 방금 전 있었던 일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그런 기색을 두르고 있었던가.

이제는 마치 머나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첫인상과 달리, 초연한 태도로 난입해 상황을 정리한 남자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영웅이나 초인이라기보다는 사뭇 색다른 단어가 떠올랐다.

사냥꾼Hunter.

"그래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방금 전, 순식간에 용들을 참살한 사냥꾼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 실로 영웅적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위업을 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열에 들뜨기는커녕 단조롭기까지 한 그 음성은 애초부터 지금 이 상황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만 같았다.

달무리 아래, 형형한 살의를 품은 눈동자가 되바라지게 번뜩였다.

그리고 그 시선이 더 이상 담장 너머의 그림자가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노라 깨달았을 때.

"이건 뭐가 어떻게 된 일이고."

벼락같은 검섬으로, 사내는 어느덧 그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넌 또 누구냐?"

……사냥꾼, 박우찬과의 첫 만남은 대개 그런 느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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