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1부 3화 너는 도대체 누구니?
* * *
1부 3화 너는 도대체 누구니?
방문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찬아."
"네. 엄마 무슨 일이세요?"
"할아버지께서 서재에서 기다리신다고 전해달라고 하는구나."
"네, 알겠어요."
나는 할아버지 서재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거라."
"할아버지.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오셨네요."
할아버지는 자다 깬 내 얼굴을 보시고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또 그것을 한게냐?"
'아차차, 자고 일어나서 세수하는 걸 깜빡했네'
"네.."
"이제 할아버지 말도 안 듣는 것이냐?"
"할아버지... 제가 스트레스 풀 방법이 이것 밖에 없어요."
"다른 학생들처럼 밖에서 뛰어놀 줄도 알아야지."
"요즘 누가 밖에서 뛰어 놀아요? 다들 피시방가서 게임이나 하지."
"그래도 너처럼 집에서 잠만 자는 애보다는 낫겠지."
"할아버지가 누구한테 맞았다면, 현실에서 복수가 불가능하다면 어쩌시겠어요?"
"누구한테 맞은 것이냐? 누가 감히 우리 손자를 때려!?"
"할아버지 저도 이제 열여덟이에요. 그러니 제가 혼자 해결할게요. 저는 이미 이렇게 스트레스 푸는 것에 익숙해 졌어요."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이렇게 반기를 들은 것이 처음이었다. 중학교 때나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는 조용히 지내는 타입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었다.
괴롭힘이 지속되면서 스트레스를 풀 분출구가 필요했고, '루시드 드림'이 나의 유일한 분출구라고 생각해왔다.
할아버지를 한숨을 푹 쉬시며 말을 이어가셨다.
"종찬아... 네가 꿈에서 그 애를 때려봤자 어차피 현실 세계에 그 애는 기억도 못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그것은 그냥 네가 꿈에서 만든 인형일 뿐이야."
"저도 그런것 쯤은 이미 알고있어요. 하지만, 저 나름대로 만족해요. 친구랑 약속이 있으니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종찬아.."
(쾅)
나는 집 앞에 있는 놀이터로 뛰쳐나갔다. 할아버지가 날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알고 있지만, 내 힘든 모습은 알아 주지 못한 서운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내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루시드 드림에 대하여 재미있는 얘기들을 해주시던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삼 년 전부터
내 꿈속에 감시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할아버지는 늘 루시드 드림을 자제하라고 말씀하셨다.
감시자란 꿈을 자각하는 사람들을 꿈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재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할아버지 말로는 백여 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했다.
사람마다 꿈속에 리듬이 있는데, 감시자들은 그걸 모니터 한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사람들의 꿈속 리듬이 불규칙하지만,
꿈속에서 꿈인 것을 인지하고 활동하면 이 리듬이 규칙적으로 바뀐다고 한다.
리듬이 규칙적인 정도가 심할 경우에 감시자가 꿈속 세계에 들어온다. 혹시 내가 꿈인 걸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감시자가 내 꿈속으로 들어와 나를 발견하게 되면, 숨어서 감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나를 지켜본다.
그래서 감시자가 내 꿈속으로 들어와서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의 말로는 아직 감시자들이 나를 경계 대상으로까지는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한다.
그래도 확실하게 구별하는 방법은 있다. 왼쪽 옷깃에 배지를 확인하는 방법도 있지만, 유일하게 그 사람들은 내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 감시자들은 내 머릿속의 생각까진 감시하지 못한다. 꿈속에서 내 머릿속의 생각들은 들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저기 있는 사람 앉아.'라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도 감시자는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는 내 머릿속의 생각까지 읽지 못하는 것이다.
내 꿈속에 감시자가 들어온게 확실시되면 감시자를 속이는 방법은 생각 외로 간단하다. 그냥 꿈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늘 감시자의 눈을 피해왔다. 나도 감시자들에 대해서는 이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
감시자가 내 꿈속으로 어떻게 들어올 수 있는지, 감시자들에 대하여 이것저것 여쭤보면 할아버지는 늘, '아직, 말할 때가 아니구나'라고 하시면서 말을 아끼신다.
'후.. 그래도 할아버지가 감시자 때문에 나를 걱정해줘서 한 말씀이실 텐데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어.. 집에 들어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겠다.'
나는 서재 앞에서 조심스럽게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 계세요?"
"종찬아, 할아버지는 회사에 급한 일이 생기셨다면서 나가셨다. 벌써 밤 열 시다. 내일 학교 가려면 빨리 자야지?"
"알겠어요. 엄마"
'일단은 늦었으니 오늘은 잠을 자고 할아버지한테 죄송하다고는 내일 말씀드려야 겠다.'
그럼 오늘은 꿈속에서 무엇을 할까?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고 '루시드 드림'을 집중하며 침대에 몸을 맡겼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생각보다 빨리 진동이 오는군'
나는 내 꿈속 세계로 들어와 빠르게 RC 체크를 마치고,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 잠들기 전에 뭐 하고 놀지를 고민했어도 딱히 할 게 없네. 곧 시험기간인데 시험공부나 해볼까?'
꿈속에서 공부는 몇 번(?) 시도를 해봤다. 달리기나 공중을 날아다니는 신체적인 운동을 한다고 해도
체력은 늘지 않지만, 공부 중에서도 암기과목은 기억력을 필요로 하기에 가능하다.
'공부는 집중하기 힘든데...'
하지만 공부는 나에게 지루하기에, 집중력이 쉽게 흐트러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내가 지금 꿈이라는 걸 인지하다가도 집중력이 흐려지면 그냥 꿈으로 흘러가 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일반 사람들도 꿈을 꾸게 되었을 때 가끔 '이게 꿈인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은 꿈을 깨기 위해 노력을 하거나, 지금 꿈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리고, 원래 꿈을 꾸던 느낌으로 꿈이 흘러 가버린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꿈속이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계속 각인시키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처럼 꿈이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
'아.. 꿈이라는 걸 놓쳐버리면 하루를 날려버리는 건데 그럴 순 없지. 그냥 역할 놀이나 할까? 컨셉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골을 넣는 주인공? 그래 그거나 해야겠다.'
그 순간, 내 옆을 스쳐 가는 한 소녀를 발견했다. 꿈속에서는 내가 소환하지 않아도 내 꿈속에서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게임으로 설명하자면 자동으로 설정되어 있는 일종의 NPC, 마을 사람들과 같다고 보면 된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꿈속에서 여자를 소환하고 성격과 말투, 행동을 설정하며
소꿉놀이같이 놀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런 놀이가 시시해져서 점점 하지 않게 되었다.
'엇, 살짝만 봤는데도 이쁜 거 같은데? 흠 현실에서는 여자랑 마주 보며 대화도 잘 나누질 못하는데 연습한다 생각하고,
말이라도 걸어볼까? 내가 소환한 것은 아니니, 연애 시뮬레이션보단 약간 헌팅 같은 느낌으로 해봐야지 후후..'
"야!"
상남자같이 터프하게 그 소녀를 부르니, 그 소녀는 천천히 나를향해 뒤를 돌아봤다. 만화에서 볼 법한 은빛과 파란빛이 오묘하게 섞인 머리칼을 가진 미소녀였다.
키는 또래 여자들과 비교하여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았으며 나이대는 나랑 비슷해 보였다. 특히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녀의 큰 눈망울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소녀는 내가 부르자, 아무 대답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그런 소녀에게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말을 걸었다.
'좋았어. 내 컨셉은 상남자 축구선수 컨셉으로 해야지.'
"나 알지? 축구 선수로 유명한데 내가 뛰는 경기장 구경시켜줄까?"
'소녀가 나를 유명한 축구 선수라고 알 거라는 확신. 좋아! 그렇다면 이제 소녀의 컨셉을 설정해볼까?'
"꺼져"
"응?"
'아니, 잠깐만?! 내가 방금 쟤를 츤데레로 설정했었나..?'
"꺼지라고 좀"
'하, 나는 다정한 소녀가 좋은데 요즘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건가? 무의식적으로 츤데레로 설정했나 보네. 뭐, 굳이 바꿀 필요는 없지.
반항적인 여자를 순종적으로 바꾸는 것도 제법 재미가 있을 테니.'
"아, 죄송해요. 너무 이쁘고 저보다 어려 보이셔서 제가 그쪽한테 예의 없이 반말을 했네요."
'이렇게 말을 하면 저 소녀는 나를 쳐다보며 부끄럽지만, 싫지는 않다는 행동이 좋겠..'
내가 소녀의 행동을 설정도 하기 전에 소녀는 급하게 어디론가 가는 듯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그 소녀를 쫓아가서 소녀의 오른쪽 어깨를 잡았다.
"잠깐만, 멈춰 봐."
'아, 설정좀 하자!'
짝!
순간 별이 반짝(?) 한 느낌을 받고 정신을 차려보니, 소녀는 내 뺨을 때리고 나서도 분이 안 풀렸는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내 어깨에 마음대로 손 올리래?"
'아니, 내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뭐지? 감시자인가..? 그럴 리가..근데 그건 그렇고, 왜 지금 내 뺨이 아픈 거야..'
꿈속에서는 원래 통증이나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소녀가 내 통제를 따르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뺨을 맞았을 때, 마치 현실에서 맞은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불길하다. 배지가 없는 걸 봐선 감시자는 아닌 거 같은데 뭐지. 돌연변이 같은 건가? 이런 적 없었는데.'
내가 뺨을 손으로 만지면서 당황해하자, 소녀는 나보다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뭐야..? 지금 통증을 느끼는 거야? 네가 이 꿈속 주인이야?"
'정말 불길한데? 그냥 무시하고 이 자리를 떠야겠어.'
내가 소녀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벗어 나려고 하자, 이번에는 아까와는 반대로 소녀가 나를 쫓아왔다.
"야, 너 거기서 봐. 차렷! 서보라고."
나는 소녀의 말들을 못 알아들은 척하였고, 소녀에게 내가 꿈을 자각할 수 있는것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허공을 보며 이상한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유명한 축구 선수입니다."
"야, 너 죽는다."
"제 꿈은 발롱도르 수상입니다."
"어쭈, 안 되겠다. 너 좀 맞자."
(퍽 퍽)
소녀는 내 언행에 화가 났는지 나를 뒤따라오며 때리기 시작했다.
'아프지만 참아야 한다. 감시자한테 걸리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입니다."
"유니폼 등번호는 7번입니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꼭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싶습니다."
소녀는 내가 해대는 개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계속 때렸다.
(퍽 퍽 퍽 퍽 퍽 퍽)
'너무 아파서 참을 수 없겠어. 차라리 그냥 꿈에서 깨서, 할아버지한테 지금 이 상황을 말씀드리고 방법을 찾자.'
"헉헉.. 깼나? 지금 몇 시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