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3부 37. 급행열차
* *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학자의 도시 습격은 거의 일주일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계획해둔 일도 시작하지 못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좋은건가...?"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은거지, 왜 그래."
성화연이 내 등을 두드려줬다.
학교 옥상에서 걸터앉아 빵을 먹는 여느 날의 오후였다.
"아니, 그래도 이건...뭔가 찝찝한데."
"나중에 올 때 잘 대처하면 되는거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언제 올 지 아는 것과 모르는 건 큰 차이가 있단 말이다.
매 순간 긴장을 해야한다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기도 하고.
"게다가 한서우랑은 다른반이라 필요할 때 합류할 수도 없어."
"하긴, 서우가 엄청나게 강하긴 하지..."
당연하지. 우리같은 닝겐들과는 그 근본부터 달리하는 영웅의 후예인데 말이야.
이 세계에서도 그런 설정이 있는진 모르겠다.
"그나저나 루시, 그거 들었어?"
"주어를 빼먹으면 그냥 놀리는거지?"
"사람들이 도시 밖으로 못 빠져나간대."
삐질삐질 식은땀이 새어나왔다.
이 도시에서 못빠져나가게 만든게 나인걸.
이 도시 안의 사람들은 학자의 통제를 벗어난 탓에 미약한 자유의지가 생겨난 모양이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도시 바깥으로 나가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몇 있는 것 같고.
"도시 바깥에 왠 군인들이 빽뺵하게 서있었다는데?"
"뭬?"
근데 저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다.
도시 바깥에 군인들이 서 있어?
이 도시는 인공섬 위에 세워진 도시다.
밖으로 나가는 길은 중간의 커다란 강을 잇는 거대한 다리 다섯 개 뿐.
근데 그 다리 다섯개를 처음 보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막고있었다고 한다.
"군복은 어떻게 생겼대?"
"글쎄에...검은 군복에, 하얀색으로 무늬가 새겨져있다고 했던가."
아니, 저거 히어로 협회 산하 군 군복이잖아.
그게 왜 여깄어.
"뭐, 도시전설 수준이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치, 확실한거면 뉴스로 나왔겠지..."
확실하다.
히어로 협회 놈들 뭔 짓을 했는진 몰라도 이 우주로 넘어왔다.
다만 이 도시 내부로 진입하는 걸 미루고 밖에서 감시하는 걸 선택했나보네.
혹시 이 도시가 외부와 격리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걸까.
함부로 건들지 않는다, 좋은 선택이다.
지휘자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현명하군.
"우리는 우리 일만 잘 해내면 되는거야. 그런건 나중에 신경써."
"그치~ 우리는 평소처럼 살면 되니까."
잘 아네.
짹쨱, 새소리가 들린다.
평화로운 하늘, 평화로운 도시.
내가 꿈꾸던 이상, 바라지 못했던 이상향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자도 결국은 움직여야 할테고."
"학자?"
"그런 게 있어."
손 안에 들린 커다란 빵을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
내일은 희망차다.
이건 지금 내 상황만 봐도 확실했다.
학자에게 대항할 이들은 많다.
그 중 세 명은 이미 엘로힘과 한 번쯤은 싸웠다.
밖에서 군인들도 몰려들어온다.
협력자만 해도 수백명이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우리의 승리.
이것은 그저 승리의 단계를 조금 더 앞당겨오기 위한 일일 뿐이다.
사서는 어떻게든 성공할테니까.
설령 아무리 외부 세계가 개판이라 할 지라도 구슬의 배치에 성공하고 말테니까.
본래 우주에서 히어로 협회까지 넘어왔으니 더 수월해질 것이다.
해방자 또한 계속 나에게 보고를 하러 오는 거 보니, 그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뜻일거다.
그렇다면.
"넌 이 세계가 가짜면 어떻게 할 것 같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침대 아래에 누워있는 한서우가 물어왔다.
"이 세계가 전부 가짜고, 현실이 따로 있다면 어떡할래?"
"난 이 세계도 좋은데."
"누가 현실도 좋대? 아마 현실은 더 끔찍할걸."
그 모든 걸 알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나는 물었다.
"...사람은 왜 사는걸까, 루시."
"엥."
그런 내 질문을 들은 한서우는 역으로 질문했다.
"글쎄, 미래가 어떨지 궁금해서 사는 거 아닐까."
"뭘 기대하고?"
"아마 행복해질 걸 기대하고."
미래는 아마 행복할 것이다, 라는 기대감을 품고 살아간다.
과정없는 행복은 의미가 없기에 마약을 본능적으로 꺼리는 인간들이다.
그렇기에, 과정없는 행복을 상징하는 '환상'조차 싫어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현실을 택한다.
"사실 따지고보면 전부 일개 감정일 뿐인데."
그냥 우리 인간이 좋아한다 뿐이지, 행복이라는 것도 감정의 하나다.
그 감정 하나가 우리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그래도 나는 현실을 택하고 싶어. 웬만하면. 뭐, 난 겁이 많아서 선택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한서우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선 한서우를 내려다봤다.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거면 그냥 빨리 떨쳐내고 나오지."
"응?"
"못들은 척 하는 것도 질리지 않아?"
한서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기다고 저렇게 웃는걸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의 흐름이다.
"응,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어.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거."
"그럼 현실을 택할거야?"
"...루시, 그거 알아?"
뭘 아는데. 너도 주어좀 말해.
성화연이랑 아주 쌍으로 지랄이네.
"꿈이나 현실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냥 상황만 다르다 뿐이지."
"그런거야?"
"그래. 꿈이 조금은 더 드라마틱 한게...뭔가 꿈을 더 선택하고싶긴 한데..."
뭐, 꿈은 결국 꿈일 뿐이니까.
"어쩌면 우리가 아는 현실도 사실은 누군가의 꿈일 수 있어."
"애매해. 애매해."
"당연하지. 그래서 철학자들이 그렇게 골머리를 썩는 거 아니겠어."
결국 고민을 해봤자 원점으로 되돌아오니까.
"주어진 삶 속에서 행복하면 되는거지."
"멋진 말이네."
잠시 만담을 나누던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곯아 떨어졌다.
달이 밝은 날의 밤이었다.
***
내 인생은 피폐물의 탈을 쓴 소년만화다.
이건 누구나 동의할거다.
주변인은 모두 살아있고, 죽은 사람 하나 없다.
나도 수십번, 수백번 정신은 붕괴했지만 역시 아슬아슬하게 아직도 이렇게 살아있다.
신은 이제 곧 우리와 격리될 예정이고, 인간들은 다시 문명을 재건하고 있다.
희망을 바라는 인간찬가.
오로지 빛만을 쫓는 것.
나락부터 시작해서, 결국엔 태양에 다가선다.
우리는, 나는.
언제나 빛 아래 있었다.
어둠 안에 빠진 적은 없었다.
희망은 언제나 있었으니까.
내가 죽어야만 해결되는 일도 없었고.
아니, 있긴 했지만 그건 어떻게든 잘 해결됐다.
그러니까 암울한 과거같은건 이제 하나의 추억으로 받아들일 때도 된 거 아닐까.
그냥 한 문장으로 넘겨짚고.
마음속 깊이 새겨진 상흔 또한 그 시절 하나의 상처로 치부하고.
그냥 넘긴다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행복하니까.
과거의 우울은 이제 상관없다.
지금까지 내 생각이 피폐했던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냥 나 혼자 아프니까.
내 몸이 아프니까 그냥 머리도 이상해진거다.
주변에서 아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만 아팠고, 나 혼자만 울었다.
다른 이들에게까지 그게 전염되지는 않았잖아.
이 세상이 모두 암흑에 빠져버리진 않았다.
그러니까, 행복하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행복했다.
굳이 행복을 추구할 일도 없이 원래부터 행복한 세상이었다.
단지 조금의 우울과 고난과 어둠을 섞은 밝은 빛이었다.
이 사실을 나는 긍정했다.
***
"준비됐지?"
"물론."
도시 한가운데에서 생겨나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공동.
그 너머는 칠흑에 가까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꿈틀대며 먹잇감을 찾는 역겨운 촉수만이 보일 뿐.
저것또한 신격에 의해 조성된 가짜.
이 세계처럼.
"내가 바라는 건 이곳을 깨부수는거지."
"뭐? 세상 멸망시키고 싶어?"
"비슷해."
성화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물론 내가 하는 말이 장난이라는 걸 알고 짓는 표정이었지만.
"가자."
탓, 하며 공중으로 발을 디뎠다.
순식간에 쏘아지는 촉수들을 넘어 저 너머의 세계로 넘었다.
그저 쏘아지는 촉수에 막히지 않고, 벽을 넘어서.
우리는 신격 너머의 세상에 도달했다.
학자라는 것의 신격을 족치기 위해서.
***
"도시 내부 얘기 들어보니까,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공습이 진행중이랍니다."
"학자도 초조해진건가. 하긴."
구슬도 이제 단 십수개만 남았다.
하나의 선으로 가늘게 이어진 연관점만이 남았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우주는 사라진다.
이곳에 있던 것들 또한 모두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될 터다.
이곳은 상위차원. 인간이 있을 수 없는 곳.
아마 이곳에서 있던 모든 기억을 잊고, 다시 본래의 우주로 되돌아가겠지.
사서는 밝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학자의 신격과의 오랜 전투로 주변은 폐허가 된 지 오래였지만, 병력은 여전히 전의를 잃지 않았다.
도시 내에서 들려오는 지속된 승전보와, 앞으로 곧 진행될 계획에 대해 알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루시가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해결될 일이었는데."
뭐, 본인이 알아서 신격을 모조리 뽑아준다면.
이쪽에서야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상자는 많았으니까, 사람 하나의 목숨 가지고 장난질할 여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가자. 우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폐허 아래 군홧발이 울린다.
수백, 수천명의 군세는 주변에서 몰려드는 학자의 신격에 대항했다.
구슬에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현실과 환상을 격리하는 그 모종의 장치에 의지해 눈보라 속을 해쳐나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사서가 저 멀리 빛나는 한줄기 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