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3부 36. 자,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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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자가 일이 늦어진다면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되고, 내가 일이 조금 늦어진다면 협력자가 좀 더 노력하면 된다.
솔직히, 이런상황에서 써도 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학자 쪽은 잘 돼가고 있는거 맞나...?'
가끔씩, 길거리를 거닐다보면 아무런 연도 없는 사람이 뜬금없이 날 찾아온다.
그래놓고선 하는 말이 현재 일의 진척도.
알고보니 해방자였다.
내가 이 도시를 학자의 영향에서부터 벗어나게 한 이후, 도시 밖의 상황은 사실상 개판이 됐다고 한다.
이 도시 밖의 사람들은 아직 전부 학자의 꼭두각시였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이 도시 내부로 침입하는 것도 고역이었다고 한다.
뭐, 밖의 사람들이 죄다 꼭두각시다보니 사서쪽이 얼마나 일이 마음대로 안풀릴지는 말 안해도 뻔한거고 말이야.
"...일단 믿어달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한건 어차피 설명해도 못알아들어. 받아들이지도 못할걸."
여튼, 지금은 유일하게 부모 모두가 출장을 가있는 한서우의 집에서 작전타임이나 여는 중이었다.
전부 까발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거기까진 너무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 같아 그만뒀다.
애초에 나도 학자가 처음으로 발악하다시피 나와서 불러모은건데.
"...그나저나 한서우 너는 그....괴물이 나왔다는 거, 어떻게 알고 온거야?"
"모르겠어. 나는 그냥 반응만 한 거라서."
"반응?"
말을 들어보니, 한창 꿈나라에 빠져있을때쯤, 도무지 꿈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생생한 꿈을 꿨댄다.
번쩍이는 빛. 흩날리는 피와, 비명.
학살당하는 사람들과 알 수 없는 노인의 모습.
"노인의 모습이라는건 좀...뜬금없네."
"그치? 나도 마스한테 말했는데 안믿더라니까."
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도 저 말을 믿을 수 있겠냐는듯한 뉘앙스로.
"뭐어..그건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한서우는 그 자체로도 미스테리가 많은 놈이니, 뭔가 비밀같은게 있는거라 생각할 뿐이다.
"다들, 방금 전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 나?"
"미안, 까먹었어."
성화연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어차피 축역해서 정리할 내용이었으니.
"그럼, 다시 설명할게."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간단하다.
이 우주에서 학자의 영향력을 없애야한다.
학자의 신격. 학자의 자아가 만들어낸 이 가짜우주를.
전부 학자의 손에서 떨어뜨려둬야 한다.
사서가 지금 하고 있는 '격리작업'과는 방향성이 다르다.
이건 학자의 격리작업을 쉽게 해주기 위한 작업일 뿐이기에, 상대적으로 중요도는 덜 하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해.
사서가 실패해버릴 가능성도 염두해 둬야햔다.
그러니까, 실패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안쪽에서도 도와줘야지.
"...아공간 너머로 넘어가볼거야. 간단히 말해서."
"역시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네."
그렇겠지.
나는 아공간 너머로 넘어가서, 학자의 신격을 모조리 뽑아올거다.
학자가 내 신격을 가져갈 수 있다면, 반대로 나도 학자의 신격을 가져올 수 있을거야.
분명 방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 위험하지 않아?"
"...위험하겠지, 아마.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는거야."
한서우는 나와 같이 아공간 너머로 넘어간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촉수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과 무력 모두가 갖춰진 건 우리 둘밖에 없었다.
"마스랑, 성화연은...우리가 저 너머로 넘어가 있을때 이 도시를 지켜주면 돼. 아마 저 괴물도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을거야."
자신의 신격이 닳기 직전까지 무리해서라도 이 도시를 파멸시키려 들거다.
자신의 의도에서 벗어난 이 유일한 도시를 말이다.
"그런데...왜 갑자기? 갑자기 아공간 너머로 넘어가야 겠다고 생각한거야?"
"그녀석이 선을 넘었거든. 오늘."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진 몰라도 자신의 꼭두각시마저 전부 죽여버리고, 내 심장을 뽑아가려했지.
이곳에서 본질은 하나.
심장만큼은 내 본질이기에 재생되지 않는다.
만약 심장을 못찾아냈다면 꼼짝없이 이 우주 밖으로 튕겨나갔을거야.
"...선?"
"그런게 있어. 여튼."
처음엔 미심쩍어 하던 것 같은 성화연과 마스도, 곧 한서우의 설득을 듣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도박수같아. 루시 너도, 죽어도 아무리 부활한다고는 해도...고통이 없는 건 아니잖아."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각자 자기 맡은 일만 잘 처리하면 알아서 해결될거야."
그 뒤로도 몇시간동안 이어지던 우리의 이야기는, 부모의 연락을 받고 돌아가는 성화연과 마스에 의해 끝이 난다.
적막한 집에 남은 건 나와 한서우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난 집 없네."
"아, 맞다."
한서우를 올려다봤다.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는 한서우.
"2층 방 하나 비었는데, 거기 쓸래? 부모님 방이긴 한데 두분 다 출장가셔서..."
"그래? 나야 고맙지, 그럼."
유독 한서우가 날 바라볼때마다 멍때리는게 살짝 이상하신 하다.
저번에, 내가 만신창이가 된 채로 한서우의 등에 업혀가던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지금은 호흡도 고르고 얼굴도 붉지 않았으니까.
'혹시...'
"한서우."
"어, 응?"
"너, 헬리온 아카데미가 뭐하는 곳인지는 알아?"
움찔, 하며 한서우가 굳는다.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한서우의 입에선.
"들어본 적은 있어. 근데...어디서 들었는진 모르겠네. 루시 넌 어떻게 아는거야?"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헬리온 아카데미, 알고있구나. 꿈에서 본 수준이긴 하더라도.아마 한서우가 날 구하기 전에 봤다던 그 꿈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높은 확률로 그 꿈운 한서우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있는 진짜 기억.
무언가를 매개로 그것이 점점 현재의 한서우에게 흘러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의 매개란...지금 상황과, 이전의 상황들로 예상해볼때...
"...한서우."
"응?"
"오늘 나랑 같이 잘래?"
"그래, 뭐...."
멍하니 대답하던 한서우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 뭐?!"
***
"으, 이거 아닌 것 같은데..."
"왜? 따뜻하기만 해서 좋구만, 뭘."
물론 우리가 우리다보니,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야릇한 분위기는 연출되질 않았다.
기껏해야 내가 한서우를 죽부인처럼 쓰면서 누워있다는 것 뿐일까.
얘는 내 체구에 비하면 등짝이 워낙에 넓어서 껴안고 자기에는 최적이었다.
뜨겁기도 해서 겨울에도 좋고.
"한서우."
"왜?"
"내가 옛날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
"갑자기...?"
한서우의 말을 무시한채, 내가 사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준다.
이 세계에 인간으로서 내려온 신과, 그녀와 함께한 사냥꾼.
흔하디 흔한 이야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한서우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지금껏 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쳤던 온갖 의문을 ,마음속으로만 고민하지 않고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서다.
"그래서...죽은거야?"
"응? 아, 그렇지. 응."
이야기는 빨리 끝났다.
내가 말을 풀어놓는 재주가 없기도 했지만, 한서우도 중간에 다른 말 안하고 잘 들어줬거든.
"신기하네."
"뭐가?"
"우리 아버지가 간직하고있던 고서랑 내용이 똑같아서."
"...고서?"
한서우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중간에 멈칫, 멈췄다.
"어, 우리집에 고서가 있었나...?"
"너희 아버지 군인 아냐?"
"...군인이셨던가..."
혼탁해지는 눈빛.
머리가 살짝 톡 흔들린다.
죽부인처럼 껴안고있던 한서우의 몸에 살짝 떨림이 생기는게 보였다.
'예상대로야.'
결국, 사냥꾼과 한서우는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소리였구나.
그리고, 지금은 그걸 매개로 무의식의 기억이 올라오려 하고있고.
"나, 너무 어지러운데."
"누가 뭐래? 자고싶으면 자."
무의식에서 기억이 올라오려는걸 거부할 이유는 없다.
지금으로선 가장 원하는 상황이니까.
행복한 기억보다, 무의식속에 감춰둔 기억을 더 원하고 있는거다.
한서우가 현실을 기억해내면 기억해낼수록, 영웅이 되고싶다는 그 마음마저 더욱 강렬해질게 분명했다.
지금껏 죽어나간 온갖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이 눈앞에 떠오를테니까.
잔인하지만, 현실이 그런거다.
결국 떨쳐낼수는 없다. 숨길수는 있어도, 완전히 기억속에서 내칠 수는 없다.
그때가 미래든, 지금이든. 결국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는 소리.
그리고 어차피 매맞을 거라면 일찍 맞는게 좋잖아?
"자라."
그 말과 함께, 한서우가 곯아떨어졌다.
나는 이젠 잠도 안와서 그냥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고서...고서라."
기록을 남겨둔건가. 과거의 이야기를.
만약 실존한다면 그걸로 꽤나 많은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거다.
당장 2000년 전의 나, 그러니까, 내 일부중 여신으로서의 '내'가 엘로힘에게 찢겨죽은 직후에, 엘로힘들간의 대전쟁이 벌어졌다고 했으니까.
고작 내 조막만한 가슴속에서 뛰고있는 이 심장 하나때문에.
몇 개월 전 우리가 남미에서 싸웠던 예술가도, 윤서아가 훔쳐간 내 심장을 제물로 바쳐서 소환된거고...
"그러고보니, 윤서아는 아직도 안보이네."
적어도 이 세상에는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 죽은게 아닌가.
뭐, 살아있다면 이왕이면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였으면 좋겠다.
역시 그래도 그년에 대한 내 인상은 최악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니...
"에휴, 에휴. 뭔 상관이야. 살면 살고, 죽으면 죽는거지."
우리는 그저 살기위해 노력할 뿐이다.
더 오래 살아서, 언젠가 찾아올 미래의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서.
"어설픈 세상이야~"
허벅지 위에 한서우의 머리를 올려놓고선 쓰담쓰담 해줬다.
과거가 행복한 놈들이 거의 없네. 세상이 구슬프게만 돌아가는 것 같아. 슬프구나.
"뭐, 앞으로 행복해지면 되는거야."
창밖에 달이 떠오른다.
아침까진 아직 조금 남았구나.
아직 전부 자고있을 시간이니, 나도 그냥 조금 쉬어도 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말랑말랑하다.
부드럽고...
솜털같아.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라벤더 향기.
'내가 베게를...빨았던가?'
일어나기 싫어 베게에 볼을 좀 더 비비적거리려다, 순식간에 돋은 소름에 재빨리 눈을 떴다.
"말랑...말랑?"
폭신폭신이 아니라?
눈을 떴을때 보인건 우윳빛깔의 새하얀 피부.
고개를 들어보니, 루시가 새근새간 잠들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지금 내가 베고있는건...
"으와아악!"
"아읏, 아. 깜짝아."
허벅지라니. 허벅지라니!!
밤새도록 루시의 허벅지를 베고잤단 소린가??
부정하고 싶어 루시의 길게 뻗은 다리를 봤지만, 부정조차 못하게 붉게 물들어있는 피부가 보였다.
안그래도 루시는 지금 오버사이즈의 잠옷 상의와 속옷밖에 안입은 상태인데...
어차피 상의가 너무 커서 바지역할까지 알아서 다 하는데, 굳이 입을 필요가 있냐던 루시의 말.
그냥 억지로라도 입힐걸 그랬다.
"...루시, 제발...남녀끼리 정조는 지켜줘..."
"일어나자마자 또 이상한 소리네."
잠시 자신의 허벅지와, 새빨갛게 물든 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루시.
커다란 잠옷은 팔 한쪽이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려 간신히 가슴에 걸쳐있다.
그 새하얀 살이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또 뭘 떠올린건지, 표정이 또 웃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표정이 됐다.
"큽, 크흡. 아, 뻔해. 뻔해서 웃기네."
"아니, 으."
화악!
그 순간, 루시가 헐렁거리는 잠옷 속으로, 내 손을 확 잡아채서 넣었다.
"앗."
능글맞게 웃고있는 루시.
'몰캉?'
말캉말캉.
루시가 내 손을 조종할 때마다, 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의 감촉.
말랑거리고, 부드러웠으며, 차가우면서도 따뜻했다.
야릇한 덩어리감이 느껴지는, 계속해서 미약하게 움직이는 말랑거리는 것.
시야는, 커다란 잠옷 아래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루시의 날씬한 배로 옮겨간다.
내 손은, 루시의 자그맣고 보드라운 아랫배와 맞닿아 있었다.
"으갸아아아아아아악!"
"풉, 아하, 아하핫!"
루시가 결국 웃음을 빵 터뜨렸다.
***
"...해석은 얼마나 완료됐지?"
"이 이상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나머지는 전부 예측의 영역으로..."
그래도, 지금까지 해석해둔게 있으니 잘만 맞춰가면 빠른 시일 내로 끝날거라 말하는 연구원.
"우리는...한시가 급하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어."
국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던, '그들'의 고문서.
자신들이 칭하길, SOP.
그들의 초월적인 지식이 담긴 고문서의 해독은 벌써 수개월 전에 시작했다.
난관에 봉착하고, 그때마다 바늘구멍만한 해결책을 찾아내고.
땀방울 하나하나로 이루어진 사상 최대규모의 마법진이, 히어로 협회 중앙본부의 지하에 점차 그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인류는 전쟁을 끝낸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거대한 원탁 주변에 자리잡은 수십, 수백의 고위층 관료들을 보며 그가 외쳤다.
히어로 협회의 협회장, 로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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