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3부 35. 언질이라도 해 줘
* * *
"하아...하아..."
"루시! 괜찮아?!"
한 달 뒤의 날.
여전히 일의 진척은 가시적인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서 이새끼, 일 제대로 하고 있는거 맞아?
물론...날이 가면 갈수록 학자의 발악이 점점 심해지는게 느껴지긴 한다.
지금도 봐라. 다른 애들 다 멀쩡한데 나 혼자만 피떡되서 뒹굴고있잖아.
왜 나한테만 지랄인지 모르겠다. 물론 다른 애들한테 지랄 안하는게 다행이긴 한데...
"괜, 쿨럭."
"히익! 빨리! 빨리 재생해야지!"
그 사이 성화연도 벌써 본연의 힘을 되찾았다.
그야 당연한게, 한서우 마스 성화연 3인방중에 두명이 각성자가 됐으니 말이다.
성화연 저 혼자만 힘을 되찾지 못하는 게 되려 이상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뭐.
"괜찮으니까 호들갑좀 떨지마.."
"으, 으으...상태가 이런데 어떻게 호들갑을 안떨어...어떡하지..."
성화연은 여전히 호들갑이 심했다.
사람이 안죽는다는 걸 알면, 어느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말이지.
매번 내가 빈사상태에 빠질때마다 심장 떨어질 것 마냥 걱정하는 거 보면, 성화연은 현실에서나 여기서나 참 한결같다.
콰직!
뱃속에 박혀있던, 5m는 될법한 거대한 철근을 비틀어 뽑아냈다.
성화연이 꺄악, 비명을 지르며 눈을 돌린다.
'학자 이새끼...세계관을 대체 뭐 이딴식으로 설정한거야.'
나를 제외하면 다들 치명상을 입질 않는다.
민간인들도 그렇고.
정말, 배가 뻥 뚫릴정도로 다치는 건 나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밖에서는 피보고도 그나마 덤덤하던 성화연이, 여기 와서는 더 무서워하는거겠지.
여러모로 알 수 없는 세계관이었다.
"흐으...그럼..."
"루시! 쉬어! 일어나지마!!"
아.
일어나려던걸 다시 성화연이 눕혔다.
물론 맨바닥은 아니고, 무릎꿇은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내 머리를 올려둔다.
"...왜 자꾸 너만 이렇게 다치는거야...앞에 나서지 말라니까."
"아니, 걱정할 필요 없대니까 그러네..."
"으, 귀여운 배가 다 망가져버렸잖아..."
그리 말하며 성화연이 휑하니 드러난 내 배를 조물딱거렸다.
살짝 간지러워 몸을 틀자, 혈관이 또 잘못 엉킨 모양인지 뱃속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끄윽."
"히익, 미안. 안건드릴게."
살짝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골목 저 위의 건물, 그 너머의 파란 하늘이 보인다.
우중충한 하늘은 아니었다.
"...행복하게 살려면 이 세상이 딱 알맞긴 한데.."
"응?"
"역시 꿈속은 찝찝하단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몸을 꼭 끌어안은 성화연이 묻는다.
"딱히, 별 말 아니야...그냥..."
"그냥?"
"왜 그렇게까지 가짜 기억을 붙들고 있는지, 조금 이해는 돼서."
고개를 갸웃, 하는 성화연.
하지만 여기서 더 깊게 말해주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 루시. 이번에 학교 축제 너도 참가할거지?"
"아, 아..."
이런 일상적인 대화마저 나눌 수 있는거보면 정말 이상향을 그대로 구현해둔 것 같은 모양새네.
'하지만...'
하지만, 이곳이 꿈 속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현실과 환상속에서, 결국 마지막에 현실을 택한 나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상향이라는 말이지.
"...뭐, 나도 이제 더 이상 질질 끄는건 싫어졌어."
"맥락좀 파악하면서 말 좀 하라니까. 아무것도 이해 못하겠어."
"어차피 얼마 뒤면 알게 될거야."
조금씩, 조금씩 몽롱해지는 시야를 느끼며, 성화연의 품속에서 잠이 들었다.
***
학자의 행동은 점차 대놓고 행해진다.
더이상 기다릴 틈이 없다는건지, 아니면 이제 정말 사지에 몰린건지.
그는 소년만화의 암묵의 룰을 깨버렸다.
콰아앙ㅡ!
내가 처음 꺠어났던 아파트 단지, 그곳이 하룻밤만에 전부 날아가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방금전, 1초만에.
"카흑, 끄흑."
대량학살이다.
이곳에 있던 수천명의 주민들은,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의미없이 목숨을 잃었다.
"아으, 으, 미친새끼..."
온몸에 쳐박힌 온갖 철근과 콘크리트들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데, 시야 끝쪽에서는 공간이 일렁이며 검은 촉수가 흘러나온다.
아파트 내부에 고립시킨 뒤에 완전히 죽이려는 속셈인 것 같다.
특성자체가 불로불사인 나에게 무슨 죽음이냐 싶겠지만, 학자의 목적은 이 몸뚱이에서 영혼을 분리하는 것.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본질을 이 몸뚱아리로부터 분리하는 것.
그러니까, 내 몸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쑤셔넣어서 심장을 이 우주로부터 분리해내면 그만이라는거다.
내가 해야할 일은, 내 몸속에서 심장을 뽑지 못하게 하는 것, 혹은 뽑혔더라도 그게 저 촉수가 뻗어나온 아공간 너머로 빨려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
"끄흐윽, 크학!"
일단 첫번째는 실패다.
콘크리트와 철근의 잔해에 깔린 나머지, 사지가 모조리 뭉개져 반응이 늦은 탓이었다.
일단 심장이 뽑히기전에 어떻게든 무기의 소환과, 변신은 성공해서 빠져나왔지만...
되려 사지가 생긴 탓에, 촉수가 내 온 몸을 휘감을 수 있었다.
"케헥."
고통에 신음할 틈은 없기에, 가슴에서 뿜어지는 피를 무시한 채로 촉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타깝게도 이 몸뚱아리는 몸의 기관 하나가 사라지면 그것에 영향을 받기에, 몸이 미친듯이 비틀거리는 건 내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력으로 간신히 비틀거림을 조종하는 것 정도.
"야비하게, 이게, 뭔, 짓거리냐, 미친새끼야ㅡ!"
숨을 헐떡이며, 이리저리 오가는 나의 심장을 쫓았다.
아공간 너머로 빨려들어가나 싶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면, 다른 공간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내 심장을 이어받는다.
물론 이렇게 토스만 하는게 아니라 내 몸에 대한 공격도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일단 마력으로 아공간이 생길때마다 그 위치를 족족 막고있긴 하지만...
내 주위에 생겨난 아공간이 이제 50개를 넘어간다.
평소라면 아무 문제 없을 숫자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시야가 비틀거리는 시점에서는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자칫하면, 아공간을 막는 장막을 이상한 곳에 설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정신을 집중해야 해.
으, 기습을 해도 왜 하필 잠 들 타이밍이야.
분명 이 주변에 방비는 제대로 해 뒀는데 말이지.
마법진도 수없이 그려넣고, 경보 알람도 수십개를 달아놨다.
이 아파트 단지에.
이 방비를 뚫으려면 학자도 어지간한 준비를 한 걸 텐데...
'그럼 사서쪽은 아예 포기했다는 말인가?'
대체 어째서?
설마, 아직 내 심장에 미약하게 연결되어 있는 신격때문에?
그것때문에 신격을 마음대로 못다뤄서, 이 우주 안에 있는 것들의 정신간섭을 못한다는 말인가?
'쉽게 말하자면, 학자는 나를 죽임으로서, 사서나 해방자들, 혹은 한서우 일행같은...본래 우주의 존재들까지 정신을 조종하고싶은거야.'
단순 정신간섭이 아니라, 직접적인 정신조종.
지금까지 못하던 이유는, 여전히 내 심장이 미약하게나마 신격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때문에 어느정도 학자의 신격운용에 제약이 생긴게 분명했다.
알지 못했던 사실이네.
내가 신격이 전부 사라졌는데도 학자의 신격을 감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 사실 하나면 전부 설명된다.
'그렇다면, 심장을 뺏겨서는 안 돼. 절대로.'
이 우주에서 해왔던, 거진 3개월간의 고생이 그저 쌩고생이 된다.
콰직, 콰지직!
"히긱, 끄하아악!!"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은 털리는 중이다.
안그래도 비몽사몽한데, 으.
점점 세상이 초현실주의적인 미술작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안 돼. 정신차리자.
몸에서 뿜어지는 피가...물감 덧칠한 것 같네.
내 시야에 붉은 물감을 덧칠한 것 같아.
"으, 그으윽!"
다리가 뽑혀나가는 통증에 다시 정신이 말짱해진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수백개의 촉수를 터뜨렸다.
하지만 곧바로 촉수는 새로 나오기 시작한다.
팔을 휘감고 비틀어내는 검은 촉수.
맨살에 휘감기는 끈적한 촉수의 감각이 소름끼친다.
"흐극, 죽어, 씨발!"
심장을 계속해서 뒤쫓는다.
내 몸은 상관없어, 심장만 어떻게든 사수하면 된다.
촉수 수백개가 베어지고, 새로 나타나고.
또다시 촉수를 베어낸다.
내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여전히 압도하고 있다면 압도했지.
지금도 저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는 촉수와 괴물들을 바라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을 날아 심장을 쫓는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배에는 녹슨 철근과 뜯겨진 촉수들이 마구잡이로 쳐박혀있는 상태.
심장이...달빛 너머로.
달 너머로 움직인다.
"안 돼."
손을 뻗어 심장에 닿는다.
콩닥콩닥 뛰는 자그마한 심장이 마침내 손에 쥐어지는가 싶더니.
콰앙!
"끄흑!"
뱃속에 쳐박혀있던 촉수 하나가 급격하게 커지며 하반신과 상반신을 갈라뒀다.
"그욱, 이익....!"
필사적으로 심장을 쥐어잡는다.
공중에서 추락하면서도 주변의 촉수 수십개를 터뜨려낸다.
'으, 죽겠다.'
힘들다. 오늘 밤은 정말 좆같네.
어떻게든 넘길 수는 있으려나.
타앗!
상황이 좆같아서 헛웃음을 내보이던 찰나, 자그맣게 상반신만 남은 내 몸이 부드럽게 휘감겼다..
엣된 소년답게 살은 부드럽지만, 그 끝에 새겨져있는 굳은살들.
"한서우..."
"괜찮아?"
얘도 참 대단하다.
이런 꼴을 보고도 괜찮냐는 말이 나오다니.
"죽을 것 같아."
"그래도 잘해줬네. 상대도...엄청나게 당한 것 같으니."
거의 아파트 단지를 호수마냥 메우고 있다고 봐던 검은 촉수들을 보며, 한서우가 말했다.
그래,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이런 꼴을 하고도 저렇게까지 몰아붙였으니까.
"사서 이새끼...언질이라도 좀 주던가..."
...뭔가 말이 이상해.
"끄읍."
긴장이 풀린 탓일까. 고통은 한꺼번에 밀려온다.
하지만 이번엔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던 고통이었으니까.
"하으, 하악...일단...어떻게든...오늘밤은 넘겼나..."
푹신한 풀밭에 눕혀져서는 중얼거렸다.
달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있다.
등 뒤가 붉은 피로 덕지덕지 칠해진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새하얀 빛과 함께, 잘리고 터져나간 부위들이 재생되고있다.
"한서우."
"응?"
"할 말이 있어. 너한테만 할 말은 아니니까...웬만하면 다들 연락좀 달라 해봐."
"지금 당장 불러모을 수도 있어."
그래? 그럼 또 편하겠네.
"그럼...다 불러모아."
"응."
더 이상 일 끌다가 이런 엿같은 상황 만들기는 싫다.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독단적으로 행동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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