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3부 32. 첫만남은 언제나
* * *
"기억해내라."
"아니, 당신 뭔데..."
사서가 들이미는 회중시계를 본 직장인이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평소처럼 퇴근하고 오는 길, 대체 무엇이 잘못됐길래.
이런 미치광이가 붙어 강요하고 있는걸까.
그러나 사서는 분명 무언가를 알고있다는 눈치로 회중시계를 요리조리 휘두른다.
"훈련이 제대로 되질 않은건가."
"그게 뭔ㅡ"
"그럼 일단 따라오는 게 좋겠군. 따라와라."
"그쪽이 뭔데 이러시는건진 모르겠지만...안그래도 피곤한데 갈 길 갑시다. 사이비 안믿어요."
순간 사서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 모습에 문득 소름이 돋는 정장의 사내.
이성은 분명 이 자리에서 당장 벗어나라고, 벗어나서 경찰에 신고하던 뭘 하던 조치를 하라고 말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 아로새겨진 본능은 달랐다.
이 남자를 따라가라고 마구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라면 이런 본능따위는 따를 일 없던 그였다.
그도 그럴게, 대기업에 입사해 차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도, 본능을 배제한채 순수 이성으로서만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 아닌가?
"고민이 너무 길면 안좋지. 대신 해주겠다."
그렇게 그 비지니스맨은 사서에게 넘어갈 뻔했지만, 결국엔 기다리지 못한 사서가 그를 기절시키며 끝났다.
땅바닥에 쓰러져 미리 새겨둔 마법진을 통해 아지트로 전송시켜둔 사서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해서야...한나절이 걸리겠군. 제대로 훈련된 놈들만 오는건 줄 알았는데."
사서가 방금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던 것은, 정신오염이 발생했을 시 그것을 타파하게 해주는 '트리거'였다.
본디 이런 부류, 그러니까, '엘로힘'혹은 신격과 접촉할 일이 많은 위치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하는 훈련이다.
극악의 난이도지만, 그걸 기본적으로, 숨쉬듯이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런 위치에 서있을 수 있다.
'쯧, 역시 실전에 오니 뒤죽박죽이군.'
트리거에 의해 정신오염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들도 확실히 많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결국 상정했던 것보다는 소수의 인원으로 일을 진행시켜야 한다는것.
"뭐, 그 꼬맹이가 알아서 잘 하겠지."
별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
한편, 사서가 발로 뛰며 이곳으로 넘어오는 군인과, 해방자들을 모으고 있을 시점.
나는 길거리에서 싸구려 음식들이나 골라먹으며 일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우선...마법이 이 세계에 전파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만약 내 주변을 걷는 이 모든 사람들이 꼭두각시.
그러니까, 학자가 신격 한번 훽 움직이면 곧바로 인형마냥 변해버리는 그런것들이라면...
'...그럼 가망이 없어.'
말 그대로, 이 세계 자체를 학자가 주물럭거릴 수 있는거다.
마법이 알려진다 해도, 세계를 비틀어 마법이 없었던걸로 하면 되고.
사람들의 뇌마저 주물럭ㅡ해서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면 된다.
물론 나나, 사서, 혹은 이곳으로 넘어온, '원래 세계'의 사람들에겐 간섭에 한계가 있는게 분명했다.
학자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우리에게 정신조종이 아니라 정신오염을 걸었으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이 도시만이라도, 학자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해.'
하지만, 어떻게?
"후우..."
했던걸 다시 해야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이 또 없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이라면, 후딱 끝내야한다.
"구슬을...다시 배치해야겠어."
일단 이 구슬로 이 도시 전체를 격리시킨다.
그러면 된다.
간단해.
그래...
간단하지.
하지만 구슬의 고정을 해제하는 것만도 수고스러운 일일 뿐더러, 이 도시에서 마력이 특출난 곳을 찾는 것도 완전히 새로 해야할 일이다.
"불평만 해선 소용 없어..."
입속으로 집어넣던 어묵을 허겁지겁 씹어삼키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낭비할 틈은 없으니까.
그리고 그 시간부로 모든 구슬의 재배치가 시작됐고...
"끄극, 그윽!!"
피잇ㅡ
거대한 섬광과 함께, 도시를 손아귀에 넣으려던 신격이 모조리 사라진다.
바깥에서 파도처럼 몰려오던 신격이 잠잠해졌다.
"허어, 하으."
이틀이 지나서야, 비로소 재배치에 성공한 것이다.
"피곤해."
지쳤다.
학자의 발악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 도시를 격리시키려는 내 움직임을 눈치챈건지, 골목으로 들어서 조사를 시작할때마다 벽이 뒤틀리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춤췄다.
어느 순간은 골목 전체가 아가리로 변해버려 씹어삼키려고 하는가 하면, 아예 마력을 감지하는 장치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물론 이상함을 눈치챈 내가 어떻게든 그 오류를 다잡고, 기어코 재배열에 성공했긴 했지만...
그 끝에 다다른 내 몸도 결코 정상은 아니다.
아니, 정상이긴 한데...
온 몸이 녹초다.
아무리 내 마력이 신격을 대신할 정도로 방대하다고는 하나, 신격만은 못하다.
하물며 내 본래 신격을 모조리 가져간 학자를 대상으로는.
그렇기에, 발악하는 학자와의 고전을 면치못했다.
이따금 신격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였을때는, 그걸 무시하면 미래에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되어 되돌아왔다.
그래서, 정신적 피로도 만만찮았다.
"쉬어...쉬고싶다..."
다리가 바들바들떨린다.
방금 학자가 내 눈앞에 신격으로 구현해낸, 마지막 발악으로 구현해낸 그 인간을 떨쳐내지 못한 탓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더러운 감정을 구현하다니.
선넘네, 진짜.
"어떻게든 성공하긴 했는데에..."
...학자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지.
학자의 목표인 나와 한서우가 있는 이 도시. 이 도시가 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났으니.
아마 지금, 현 시간부로 되찾아내려고 미친듯이 발악할 것이다.
물론 이 세계에 균열이 가게 하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마법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선에 제한은 있을지언정.
"학자는...정신조종같은 직접적인걸로 간섭은 못하겠지, 이제."
하지만 허공에 갑자기 촉수를 구현한다거나, 물리적 실체를 바꾼다거나, 하는 등의.
그러니까, 일반적인 마법 수준에서라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금에서조차 구현할 수 있을거다.
헤에ㅡ신격 대단해.
씨ㅡ발.
진짜, 존나 피곤하네.
한서우, 마스, 성화연, 이유리...그 외 기타 등등 모지리들때문에 내가 뭐하는짓이람.
"아무튼, 이제..."
바로 이어서 움직이자.
쉴 틈은 없어.
연계해야한다.
'학자는 결코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마법을 쓰진 않을거야.'
그렇다면, 마법을...
끌고와야한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그리고...'
한서우, 그리고 여타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상, 어지간하면 '히어로'가 좋아.
언제나 그 자신이 선의 편이라는 걸 일깨워줘야 한다.
비록 지금 상황에서 선, 악을 논한다는게 이상하지만.
이건 그저 우리가 살기위해 발악하는거니까.
그치.
그래도, 마음속의 합리화는 필요해.
그러니까, 나는 지금부터 '선의 세력' 흉내를 낸다.
어지간하면 사람을 살려야한다.
피해가 가지 않게.
학자는...사람따위는 벌레처럼 죽이는 악신으로 남아야한다.
그러니까.
이번 연극의 개요는 얼추 잡혔어.
"...더 준비할 게 있나?"
일의 스케일이 워낙 크다보니 실행전에 불안부터 앞선다.
"하아ㅡ모르겠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일단 대략적인건 모두 파악한 것 같으니...
실행부터 하자!
학자의 신격을 내 마력으로 어떻게든 조종하면, 잘 될거야!
그리 생각하며, 한서우의 학원이 끝날때까지, 마스와 성화연이 그를 따라 거리로 나올 때까지 골목 속에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
"아, 졸려 뒤지겠네."
"그러니까 밤에 좀 일찍좀 자라고. 너 또 어젯밤에 그 인터넷 친군지 누군지랑 게임하다 밤 샜지?"
"알바냐."
옆에 마스와 성화연이 책가방을 메고 따라내려오며 티격댄다.
언제나처럼, 말이지.
"그나저나 한서우 넌 요즘 되게 이상하네. 갑자기 말 수도 적어졌고."
"어...나?"
그러다가, 둘의 대화 주제가 자신으로 넘어왔을때는, 또 벙쪘다.
최근들어 갑자기 생긴 멍때리는 버릇 때문이다.
"그래, 너. 넌 스스로, 뭐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냐?"
"글쎄다...난 잘 모르겠는데."
"본인이 아니라면 아닌거지, 넌 왜 갑자기 말 돌리고 있어, 마스."
"아니, 나는 평범한 의문을 말했을 뿐인데?"
"그 의문이 뜬금없으니까 그런거지. 야, 한서우 너도 얘한테 뭐라 좀 해 봐. 정신을 안차리잖아."
그런가, 하며 또 어물쩍 넘어간다.
아무튼 그렇게, 오늘도 평범한 밤이 될거라 생각했다.
밤 10시, 학원을 마치고, 학원 버스를 타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그때.
쿠우웅ㅡ!
저 건너편 블록, 건물의 골목 사이에서 발생한 엄청난 섬광과, 폭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꺄아아!"
"뭐, 뭐야?!"
대로변을 지나치던 승용차들마저 순간 멈춰선다.
저게 뭘까, 사고인가?
그러나 사고라고 치기에는, 그 폭음이 연속해서 이어진다.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 지하로 내려가!!"
안내를 하던 선생님이 학생 모두를 불러모은다.
순식간에 몰려드는 학생들과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때문에 주변이 엄청나게 혼잡해진다.
"야, 한서우! 뭐 해! 빨리 근처 건물 아무데나 들어가야지!!"
"으윽, 나도, 들어가려고 하는 중이야!!"
인파에 밀려 서로 멀어진 지 오래지만, 간신히 소리치며 위치는 파악하고 있다.
쿠웅, 콰광!!
그 사이사이 가까워지던 폭음.
그리고ㅡ
쿠궁!
마치 장난감처럼 터져나가는 빌딩과, 콘크리트들.
그 사이로 비산하는 엄청난 양의 철근.
"아..!"
저런 잔해를 모조리 맞았다가는, 여기 있는 사람들도 전부 죽을거다.
어떻게 건물이 무너지는 바로 아래도 아닌데, 잔해가 여기까지 튀는건가.
그런 의문을 담을 틈이 없다.
"아아악ㅡ!"
저 높이 떠올랐던 잔해들이 순차적으로 후두둑, 하는가 싶더니 이내 차량의 창문을 깨트리며 우수수 쏟아져내릴 기미를 보였다.
안돼. 전부 죽을거야.
처음 느껴보는 죽음의 공포.
정말, 뜬금없이 느껴보는 죽음의 공포.
그러나 어째선지 심장은 뛰질 않는다.
그저 평소처럼 잔잔하게.
파앙ㅡ
"아...?
그리고, 떨어져내릴 잔해를 예상하며 눈을 감으려는 순간, 하늘에 그어진 붉은 빛.
마치...마법과도 같은.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쿠궁ㅡ!
뒤늦게 발생한 충격파에 유리창이 깨져나가며 모두가 움츠렸다.
한순간 조용해진 길거리.
그리고,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해진 아스팔트 위로, 누군가 떨어졌다.
"뭐, 뭐야. 누구야?"
"어린애야. 어린애가 하늘에서 떨어졌어...!"
그리고,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마스와, 성화연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인파를 헤쳐나가서.
아스팔트 위를 바라봤을 때 보인것은...
"카흑ㅡ쿨럭."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는 소녀와, 그 주변으로 내팽겨쳐져 있는 온갖 괴물체들.
아공간에서 뽑혀나온 촉수괴물들과, 그를 비롯한 소름끼치는 생명체들.
그리고, 마지막 한차례 굉음이 건물을 뚫고 나오는 순간.
그녀가 튕겨져나왔던 골목 속에서 나온 것은, 건물을 모조리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괴물이었다.
수생생물.
마치, 문어를 기괴하게 뒤틀어둔 것만 같은...
"...대체, 뭐야."
소녀의 모습은 후드를 뒤집어썼기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팔 하나가 없다.
위급한 상황이다.
배에는 철근 다섯개 가량이 쑤셔넣은듯 기괴하게 뒤틀려 박혀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저곳으로 가까이 갈 생각을 못했다.
이어ㅡ
[끼이이이이ㅡ!]
천지를 울릴 듯 내지르는 그 괴물의 포효에, 모두가 귀를 막았고.
콰광!
평생 보지도 못했던 비현실적인 광경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