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3부 27. 지긋지긋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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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간 캠프로 쳐들어온 사서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걸 제외하면 곧 조용해졌다.
성화연도 이미 저번에 사서랑 한 번 만난 적 있으니 소개할 필요도 없고, 난리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침대에 앉아서 이야기 듣는 중.
"완성이라니, 벌써?"
"기대치가 너무 낮은 것 아닌가? 이래뵈도 SOP의 가장 중요한 단체중 하나인데 말이야."
"그동안 보여준 이미지가 있어야지. 사람 첫인상이 그렇게 쉽게 안바뀌는데."
작게 투덜거린 사서는 제 집 안방마냥 편하게 의자위에 늘어졌다.
"뭐, 어찌됐던간에...쉽지만은 않았다. 꼬박 그 일주일 밤낮을 새서 만들어낸 마법진이니."
심지어 이 마법진은 그냥 이 우주에 와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사서의 수첩에 담겨있던 지난 수백년간의 연구자료까지 합하고 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던 마법진이다.
"그래도 아직 임상실험조차 되지 않은 실험작이라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데?"
"끽해야 죽는것밖에 더할까."
실패조건이 끽해야 죽는거라면 굉장히 적은 리스크다.
차원 관련 마법이라, 어디 머나먼 외딴 우주같은곳에 떨어져서 평생을 홀로 떠돌게 될 줄 알았는데.
"그런 추측도 흥미롭지만...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마법진이 실패한다는 말은 곧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차원의 틈이 넓어지질 못한다는 이야기니까."
"그렇게 되면... 바늘구멍에 머리부터 쳐넣는 꼴이네."
"그렇지."
오랜만에 말이 통한 게 기쁜지, 사서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좋아. 마법진은 완성이고, 임상실험도 지금 한창 진행중이다. 나머지는..."
"아니, 잠깐. 임상실험이 지금 진행중? 나보고 임상실험 해달라는 얘기 아니었어?"
"루시!"
옆에서 소리를 뺵 지르는 성화연때문에 귀를 틀어막았다.
아, 말 가려서 해야지. 참.
한 번 잘못꺼낸 말 때문에 한참동안 설교를 듣던 나는, 사서의 만류 덕에 간신히 벗어났다.
"아무튼, 인간이라면 자기 생명먼저 소중히 하란 말이야. 그 어떤 영웅도 자신의 생명이 하찮다고는 생각 안 해. 하다못해..."
"알겠어, 알겠다고..."
현실적으로 접근한 것 뿐인데. 참.
진이 다 빠진 날 배려한건지, 사서의 설명은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앞서 설명했듯이, 임상실험은 이미 인외의 생명체들로 따로 실험하는 중이다. 그들도 어차피 본질은 인간이었으니."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이번 일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그거다."
이 일을 캠프에 말하고 수백, 수천명이서 작전을 진행할 것인가. 혹은 우리끼리 진행할 것인가.
혹은 언제 진행할 것이냐, 등등.
물론 언제 진행할 것인가의 기한은 사서가 따로 정해줬다.
그 안에만 하면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면서.
"뒤로 늘릴 거 뭐 있어? 바로 진행하자."
"...괜찮겠나? 안 쉬어도 별 상관이 없는건가?"
"내 몸에 휴식이 뭐가 필요하겠냐."
왼쪽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사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다.
"최소한의 기간은 있으니, 내일 쯤 일이 시작될거다. 혹여 협력을 구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 안에 모두 포섭해놔라."
"그래."
그 말을 마친 사서는 코트를 휘날리며 캠프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보니 저새끼는 자꾸 여기 어떻게 들어오는거야.'
군대라는 애들이 경계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쓰겠나.
아무리 초상능력같은거 써서 침입한다 하더라도, 응?
그런것까지 다 막아내야 제대로된 경계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여튼, 사서의 갑작스러운 방문때문에 흐뜨러진 분위기는, 오디오가 비어버린 채 몇 분 정도 지나자 곧 안정됐다.
옆에 앉아있는 건 우물쭈물하며 날 의식하는게 너무나 티나는 성화연.
서류더미에 눈이 안 가 있잖아.
일 하는 척을 할거면, 적어도 눈은 일거리에 가있어야지.
"성화연."
결국 시선에 못이겨 먼저 성화연을 호출했다.
"으, 응?"
"이번 일, 너도 갈거지?"
"당연하지! 나도 가야지!"
우물쭈물하던 기색은 싹 사라지고, 한순간에 소리를 높인다.
그제야 캠프 밖을 의식한 듯 입을 확 가리지만, 어차피 근처에는 사람도 적다.
"우린 내일 바로 출발할거야. 더 이상 머뭇거릴 틈은 없어."
"...어, 따로 조력자는 안 구해?"
예를 들면, 이 캠프 전체의 군대같은..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냥...간단히 말해서 구슬 달랑 놓고오는거니까. 굳이 사람이 많을 필요는 없지."
아마 구슬 분배에만 한나절이 소요될거고.
"그리고, 사서의 공간제어 능력도 있는데."
사서의 초상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공간 자체를 확장시키고 축소시키는 사서의 능력이라면...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단축될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니까, 성화연 너랑, 한서우, 마스. 그리고...그 외에는 델리지아나 이유리 정도. 이렇게만 같이 동행하면 될거야."
"...아무리 그래도, 상위차원이라는 곳에 갈만한 인원 치고는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이게 다는 아니니까. 다른 해방자들도 많아. 그쪽도 어지간한 중대 수준은 될 걸."
"그렇구나..."
그러니 더 이상의 조력자는 필요 없다는거지.
내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성화연은, 곧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어온다.
나와 눈을 마주치며.
"그럼...이번 일만 끝마치면 전부 끝이라는거야? 전부?"
"음...그렇지 않을까?"
여기서 뭔가 더 튀어나오면 그때 가선 절망보단 그냥 분노먼저 솟아오를 것 같은데.
게다가 개연성도 적당히 말아쳐먹어야지, 여기서 나올게 또 뭐가 있다고.
만화나 소설이라면 이해할만 하지만, 여기는 또 하나의 현실이다.
이미 이 정도 수준의 일들이 일어난 것 만으로도 개연성은 안드로메다로 간 지 오래라는 것.
"그럼, 약속 하나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거 사망플래근데."
"아니, 야."
피식 웃으며 농담이라고 손사레치는 나.
내 머리에 딱콩을 한대 쥐어박은 성화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했던 말, 기억 나?"
"기억 안 나."
"아니, 말도 안했는데."
기억할게 하도 많아서 기억이 안 나는 것 뿐이야.
"아무튼...모든 일이 끝나면, 그땐 정말로 행복하게 살자고."
"그거야 전 인류의 소망이지."
"그래, 그런 평범한 소망이야."
아이러니하게도 전 인류가 꿈꾸면서 단 한번도 이뤄진 적 없는 소망.
가장 소박하다고 생각할만한 소망이지만, 실상은 가장 거창하고, 현실성없고, 그 규모마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소망이다.
초인류적인 소망?
하지만 구태여 그런 생각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뭐, 사람이 살면서 소망 하나정도는 품고 살아도 되잖아.
이건 말하자면...동심파괴 같은거다.
굳이 동심파괴 시켜줄 이유는 없다.
"그럼, 마지막까지 힘내보자구."
성화연이 날 바라보며 마주 웃어줬다.
***
"응, 응."
[그럼...결국 끝까지 대척한거야?]
"그렇지. 걔도 워낙에 고집이 쎘으니까. 한 발 늦었어."
[...수고했어.]
이유리는 머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유나의 목소리에 잠시간 생각을 멈췄다.
여기서 더이상 뭘 말해줄까.
아무리 악인이었다고는 해도, 그들에게 이성주는 가족이었는데.
남들에겐 어떻게 보일진 몰라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동요였다.
그 어떤 악독한 인물이라도, 그들에게도 가족이, 친구가, 지인이 어느정도는 있을테니.
이들도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일단 부탁한 건 위에 말해뒀어. 얼마 안지나서 또 대규모로 파견 나갈거래.]
"니가 생각하는 대규모라고 해봤자..."
[하하, 애초에 내 초상능력 자체가 극비리잖아. 그러니까 파견나가는 사람들도 죄다 그쪽 연관된 사람들만 있을수밖에 없지.]
쉽게 말하면, 그냥 정보가 퍼지지 않기 위해 자체적으로 마련된 특수부대라고 해야하나.
당연히 아무리 많아봤자 수십명밖에 안된다.
그 말을 들은 이유리는 피식 웃었다.
"왜 갑자기 허공에 대고 웃는거지?"
"당신 얼굴이 웃겨서요."
이유나와 텔레파시를 통해 어쩔수없이 생긴 표정의 변화였지만, 그래도 허공에 대고 갑자기 웃으면 미친년같다.
이유나와 텔레파시 중이라는걸 말할 수도 있었으나, 굳이 멍청한 델리지아에게 그런것까지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조심해. 사지 멀쩡히 돌아오고.]
"아니, 너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더 이상...]
가족을 잃기는 싫으니까.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그 뒷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할게.]
틱, 하며 머릿속에서 소리가 끊겼다.
'배려따위 필요 없다니까.'
이유리는 가족이라는 쓸데없는 연을 벗어나, 인간으로서 이성주를 봤다.
그리고, 그를 보내줬다.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한 명의 악인으로 간주했다.
그런 결심을 이유나가 모를 리는 없었기에, 이유나도 이성주에 관한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끌고가지는 않았다.
다시금 기분이 복잡해지려는 이유리였으나, 이미 마음의 정리는 끝냈기에 더 길게 늘어지지는 않는다.
"그나저나, 사서쪽이 얘기가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 남자 말인가. 아마 실패할 리는 없을거다."
"왜죠?"
"말 재간 하나는 기가 막히는 놈이니."
델리지아가 사람을 저렇게 평가할 수도 있구나, 하고 이유리는 감탄했다.
그도 그럴게, 저 놈은 이미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정신병자, 미치광이니까.
이유리의 앞에서는 죄다 고만고만한 모습만 보여준 사서였기에 더 그렇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삼십분 정도 더 지났을 무렵.
거대한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들의 앞에, 사서가 나타났다.
"일은 내일 바로 시작한다. 얘기는 잘 됐어."
"내일 바로요?"
"그래. 저쪽에서 보내준다던 부대는...언제 도착하지?"
"조금 더 늦게..."
잠시 턱을 쓸며 고민하던 사서.
곧 별 상관 없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그들은 나중에 진입하는걸로 하고, 우리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사서가 땅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을 바라본다.
"이 지긋지긋한 연도 끝을 맺어야지."
이유리도, 델리지아도 동감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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