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3부 26. 쓸데없지만 쓸데있는
* * *
그 뒤 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다시 멈췄다.
그러고보니 이 심상세계는 몇 명의 생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거지?
설마 이 괴물이 해방되려면, 그 모두의 기억을 하나씩 읽어줘야하나?
트라우마나, 중요한 기억같은 게 왜 심상세계에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진 알 수 없지만, 결국 존재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인거잖아.
만약 아무에게도 보여줄 필요 없이 자신만 간직하고 싶었던 기억이라면, 그냥 황야의 모래 속에 자연스럽게 묻혀있었겠지.
이견의 여지는 없다.
'그럼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건 내가 알 순 없겠지.
그저 자기 자신의 위로를 위해서 라는게 가장 유효한 추측이지만, 다른 가능성이 있을수도 있고, 뭐.
이 세상에서 나는 그저 관찰자다.
우연히 그런 기억을 만나면 평가하고, 까내리는. 그런 사람이지.
평가받는 상대가 무슨 기분일지는 상관없다.
나는 그냥 내 가치관과 신념에만 따라 남을 정의내린다.
물론 상대는 내가 신 엇비슷한 것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만...
정말 부끄럽지 않으면, 신이 뭐라 평가하든 나는 내 좆대로 살았다, 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겠지.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여튼.
휘이이...
다시 불어닥치는 모랫바람을 헤치며 걸어간다.
이렇게 보니 이 심상세계라는건 또 굉장히 몽환적이다.
앞도 뿌옇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하지만 정작 중요한 대상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뭘 위해 존재하는 세상인거지, 대체.
여기가 무의식이라면, 사서가 말했던 상위차원이란 바로 이 곳일텐데.
"이해할 수가 없잖아, 이해할 수가..."
하지만 내가 본 상위차원은 이것보다 훨씬 이질적으로 생긴, 그러니까 3차원이라고는 감히 생각조차 못할 초월적인 광경이었단 말이야.
모순이 여기저기서 마구 튀어나온다.
3차원 생물의 시점에서 본 상위차원이란 이런 모습인걸까.
'알바야.'
어련히 사서가 잘 알아서 하겠지.
마음을 놓고 여행을 계속했다.
***
"...그래서, 그렇게 된거죠. 뭐."
"일정수준 이상의 정신력이라면, 정신간섭 계열 초상능력자가 포함된 괴물에는 교섭이 가능하다는건가..."
"예?"
루시가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지만, 칸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넘긴다.
칸의 시선은 눈앞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앉아있는 소녀의 눈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도대체 뭐가 우리들과 다른건지, 본능적으로 판단하려는듯한 눈빛.
루시는 그런 눈빛이 불편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지만 말이다.
"그 안에서 보낸 시간이 족히 세 시간은 넘는다고?"
"그렇대도요."
"...역시 의문 투성이군. 뭐, 말대로라면 그곳은 이곳과는 전혀 다른세계니 문제될 건 없지만..."
루시가 이변을 느낀 칸의 부름을 받고 깨어난 건, 고작 15초 남짓 뒤의 일.
시간의 흐름이 이상한 곳이었다.
어쩌면 홀로 그 세계에 있는 동안 사고가 가속되서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꼈거나.
어찌됐던, 체감 시간상 심상세계에 있을 때의 시간이 현실에 있을 때보다 훨씬 느리게 갔다.
"그 외에 다른 건 없나?"
"...있기는 한데, 솔직히 말해도 될 지는 잘 모르겠네요."
"우리에게 숨겨야 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정보인가?"
잠시 고민하던 루시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당신들같은 부류라면 뒷조사 엄청하고 다녔을 것 같긴 한데.."
"뒷조사라니, 우리는 그저 위에서 정보를 받은 것 뿐이다."
"그게 그거잖아. 정작 당사자도 모르는데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어쩌라는거야."
"...미안하군."
그래도 이야기가 빨라지니 좋긴 하겠네, 라며 사과를 넘긴 루시.
"아니 근데, 따지고보면 불공평하지 않아요? 나는 니들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너희들만 날 그렇게 알고있는건데?"
"아, 그러고보니 우린 소개조차 안했군. 미안하다. 갈 때 되면 자료라도 하나 넘겨주지."
"...네."
어째 너무 순순히 나오는 상대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리던 루시였으나, 더 깊이 생각하기 싫다는 듯 뒤로 몸을 확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쪽에 있던 사람들, 현실에선 이미 전부 사망한 사람들이에요."
"...그런가."
"그것때문인진 몰라도, 내가 뭐하는 놈인지 정확히 알고있더라구요."
"...? 뭐하는 놈인지 알고있다니?"
설마, 루시의 정체를 알고있다, 그런 말인가?
"맞아요. 신이니, 초월자니... 해석은 갖가지지만, 결국 결론은 똑같죠."
"현실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게 됐다는건가?"
"그냥 간단하게 세상의 진리를 알았다고 생각하면 편하죠."
학자로서 굉장히 혹할만한 사실이었다.
"아, 근데 그렇다고 그 사람들처럼 될 생각은 하지 말고. 어차피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몇 주 안지나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릴테니까요."
"그건 아쉽군."
칸이 입맛을 다셨다.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둘.
곧 지루함을 느낀 루시가 자리를 일어나며 대화가 끝났다.
"이걸로 뭐...알아낸 건 있어요? 이 정보들로 어떻게 할거라던가, 괴물들의 처리는 어떻게 할 거라던가."
"애매하군."
괴물의 원재가 된 이들은 생물학적으로 모두 사망했다.
게다가 괴물의 머릿속으로 어찌저찌 들어가는데 성공해봤자, 볼 수 있는건 그저 그들의 중요한 기억들 뿐.
괴물의 원재가 되는 사람들을 알 방법조차 없으니 그저 도박, 시간낭비다.
"그러는 루시 양은 이번에 뭔가를 좀 얻었나?"
"...얻기는 했죠. 꽤."
루시는 속으로 머리만 더럽게 복잡해졌다고 투정했지만, 표정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럼 갈 때 서류 하나 받고 가게. 우리에게 원했던 어지간한 정보는 담겨있을걸세. 물론 기밀이니...함부로 남들한테 보여주고 다니지는 말고."
"오늘 처음 본 상대한테 신뢰가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물론 당신들은 날 처음본게 아니겠지만.
그 말을 들은 칸은 멋쩍게 뒷통수를 긁었다.
"성격을 아니까 그런거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우리만 루시 양의 정보를 습득했던 것에 대한 사죄기도 하네. 이렇게 알게 된 사이기도 하니, 굳이 파토내고 싶은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면야, 뭐."
마지막으로 인사를 마친 루시는 휘적휘적 방 문을 닫고 사라졌다.
루시가 나간 걸 확인한 칸은, 의자 옆에 걸쳐진 털코트를 입고선 괴물을 향해 돌아봤다.
"결국 의미 없는 유기복합체였군."
이런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던 토착생물.
하지만 토착생물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존재 의의조차 없었다.
그저, 무언가의 영향을 받아 괴이하게 변했을 뿐인 인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없군."
기껏해야 이 우주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다일까.
얼마 전부터 이곳으로 넘어오는 인원들도 부쩍 줄어들었다.
수만명 정도 왔으니 적어도 군대 구실은 하겠지만, 다른 우주로 보낼 인원 치고는 적은 숫자였다.
저 건너편에서 지금 우리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더라면.
그들로서는 밤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은 소망이었다.
한동안 꿈틀대는 괴물을 그대로 바라보던 칸은, 체념한 듯 등을 돌려 방 밖으로 나섰다.
***
"야, 이놈들 근본이 의외로 탄탄한 놈들이었네."
"뭐야, 그거? 그 사람들이 준 거야?"
서류더미에 묻혀 있던 성화연이 뒤를 보며 묻는다.
"응. 사죄의 의미라며 나갈때 주더라."
"사죄?"
"지들끼리만 내 뒷조사한것에 대한 사죄라는데."
"고지식하네."
아니, 고지식이 뭐냐, 고지식이.
이건 당연하게 해야할 일인데.
"정부 직속기관인데 뭐 어때. 심지어 루시 너 정도면 뒷조사 하고 다닐수도 있는거지."
"아니, 성화연 너마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나는 뭐...중립이야."
어깨를 으쓱거린 성화연은 터덜터덜 내가 앉은 침대 옆으로 다가온다.
풀썩, 옆자리에 앉고선 서류를 훑어보는 성화연.
"그나저나 SOP가 뭐더라...잘 생각이 안나는데."
"아, 너한테는 안 말해줬지. 참."
SOP란, 내가 신우주였을 시절 있었던 지구의, 유일한 초상능력자 단체.
안그래도 마력의 농도가 희박한 본래의 지구라, 그곳에서조차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상상을 초월한 강자를 의미한다.
"대단하네...지금 그 사람들은 다 뭐하고 있대?"
"뭐하기는, 대재앙때 떼거지로 이쪽 우주로 넘어오다가, 마력 농도차때문에 그대로 마력벽에 직격되서 마수로 변해버렸지."
"...헐."
그 정도 강자도 마수가 되는걸 피할 수 없었다는거야?
"그래. 인간이라면 예외없이, 싸그리. 예외적으로 분신체같은건 남아있던데, 그건 특정한 마력파장이 없으면 충전도, 활성화도 안되서 아마 지금쯤 다 기능정지했을걸."
저 먼 옛날에 만난, 칙칙한 금발의 재수없는 애늙은이가 떠오른다.
"그래도 그 분신체들이 이 우주에 준 영향이 꽤 크긴 하지. 원본 SOP로부터 갈라져나온 단체만 해도 꽤 되고 말이야."
내가 알고있는 것만 해도 도서관, 해방자, 방금 만나고 온 짭SOP.
어째 단체마다 사상도 무력도 다르긴 한데, 그냥 갈라지면서 그렇게 변했겠거니 한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거래? 루시 네가 말해준 대로라면...그 사람들이 조사하고 있던건 괴물들이잖아. 붉은 괴물들."
"그렇지."
"근데 활용할 방법도 없고, 그냥 인간이 변해버린 비극적인 생물인것만 밝혀졌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정해.
"그래도, 그 사람들은 모르지만 우리는 얻은 수확도 꽤 있지."
"뭐?"
"사서한테 물어볼게 생겼어. 사람의 무의식이라는 거."
정말로 사람의 무의식, 다른 말로 심층의식, 심상의식같은게 상위차원이 맞냐고.
만약 상위차원이 맞다면 어째서 볼 때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
심지어, 왜 상위차원주제에 서로 나눠져있는건지 말이다.
'만약 내가 정말 그 괴물과 접촉해서 갔던곳이 무의식이라면, 거긴 이미 상위차원이라는거잖아.'
그렇다면 모든 인간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어야 정상 아니야?
상위차원에선 모든 인간의 본질은 하나뿐인데.
근데 어째서 사람의 의식마다 그 무의식이 나눠져있느냐, 이 말이지.
"쳐들어가야지, 언제 한 번."
사서 위치만 알면 날잡고 한번 끝까지 조져봐야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담기도 전에, 천막의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나다."
"존나 당당하네, 미친새끼."
이놈의 타이밍,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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